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85화 (685/1,000)
  • 685화 정상에서 기다릴게 (5)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이 종료되었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플레이어들은 트라이 횟수와 이동 거리, 팀 기여도 등등을 종합하여 각자 순위를 배정받았다.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레이스’ 블루 팀 1위 ‘고인물’>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레이스’ 블루 팀 2위 ‘별님두개’>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레이스’ 블루 팀 3위 ‘24살희은이’>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레이스’ 블루 팀 4위 ‘드레이크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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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레이스’ 레드 팀 1위 ‘아키사다 아야카’>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레이스’ 레드 팀 2위 ‘존★예★보★스’>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레이스’ 레드 팀 3위 ‘딸7I겅듀™’>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레이스’ 레드 팀 4위 ‘마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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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순위가 정해진 이후에도 레이스는 계속해서 완주할 수 있었기에 절반 가량의 참가자들이 정상까지 등반을 완료했다.

    나머지는 쓴 눈물을 삼키며 훗날을 도모해야 했다.

    그리고 곧이어 시상식이 열렸다.

    대회 참가자들은 남서쪽의 강변으로 이동해 시상식 장소로 향했다.

    재계 서열 1위의 NPC인 스크루지 후작은 섬 하나를 통째로 빌려 흥겨운 파티를 열었다.

    남대륙 외곽에 인접해 있는 ‘이디애무 섬’,

    중부의 미드가르드 산맥에서 발원하는 도르트강(江) 하류, 붉은 퇴적토들이 삼각형 모양으로 쌓여 만들어진 섬으로 부드럽게 낮아지는 분지 지형이 특징이다.

    1년 365일 24시간 연중무휴로 파티가 벌어지는 흥겨운 휴양지.

    몸이 절로 들썩거려지는 흥겨운 EDM이 섬 전체에 울려 퍼진다.

    곳곳에 있는 파티장과 놀이동산에서는 연일 퍼레이드가 한창이었다.

    NPC들은 유쾌한 어조로 말을 걸었고 플레이어가 있거나 없거나 자기들끼리 즐긴다.

    곳곳에서 샴페인과 맥주가 흘렀고 환호와 웃음소리들이 가득했다.

    하늘을 펑펑 수놓는 불꽃놀이 아래 거대한 대관람차가 돌았고 그 위에 올라서면 저 아래 지대에 있는 도시 전체의 풍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시가지로 통하는 진입로에 들어서면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골목 골목들.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높게 솟아 있는 중간 중간 수많은 공중다리들이 그 사이를 잇고 있었고 사시사철 늘어져 있는 푸른 식물들이 교각의 다리에 넝쿨을 주렁주렁 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는 동화 속 세계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고 환상적인 광경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좋은 저녁입니다! 오늘 시상식의 사회를 맡게 될 홍! 영! 화! 인사 올립니다!”

    공작새의 깃털로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홍영화가 붉고 파란 아이라인을 길게 늘어트리며 눈웃음을 짓는다.

    사실 오늘 시상식이 열리는 대회는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 뿐만이 아니다.

    스크루지 후작의 주관 하에 전국 각지 이곳저곳에서 벌어졌던 대회들의 종합 시상식이었다.

    물론 그중 스크루지 후작이 가장 애착을 많이 보였던 레이스는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이었지만 그 외에도 ‘미스터 데엑마 선발대회’, ‘미스 데엑마 선발대회’, ‘뎀 더 싸나이 선발대회’, ‘커스터마이징 대회’, ‘코스프레 대회’, ‘펫 콘테스트 대회’, ‘낚시 대회’ 등등 다양한 대회들의 우승자들이 모두 모인다.

    이윽고, 홍영화는 마이크를 쥔 채 다양한 대회의 우승자들을 소개하고 치하하기 시작했다.

    “네! 먼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세계 안에서 가장 남자다운 분을 모십니다! ‘뎀 더 싸나이 선발대회’에서 남자밖에 할 수 없는, 가장 남자다운 행동을 하여 당당히 1위를 차지한 한국의 ‘김여장’씨를 모십니다! 오로지 남자만 할 수 있는 행동인 ‘여장’을 통해 당당히 싸나이임을 입증해 보이셨는데요! 그 외 블라블라……”

    한편, 나는 무대 뒤에서 각 대회 우승자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참 별 대회가 다 있었군.”

    회귀 전의 세상에서는 없었던 대회들도 많이 생겼다.

    확실히 게임 속 세계가 다원화되긴 다원화되었구나 싶었다.

    나는 무대에서 시선을 떼고 수상자 대기실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쀼우- 후앵-]

    쥬딜로페가 의자에 앉아 슬라임 젤리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저번에 한 약속대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로 할당된 젤리기에 조금씩 조금씩 아껴먹는 모습이 뭔가 짠하다.

    그때 내 옆에 있던 윤솔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펫 콘테스트에 나갔어도 성적 좋았겠다. 귀엽잖아.”

    젤리를 오물거리고 있는 쥬딜로페가 많이 귀여웠는가 보다.

    하지만.

    “그건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펫 시스템 상에 등록된 데이터에 의하면 펫은 쥬딜로페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대회 규정 상 펫 대회에 나가는 쪽은 쥬딜로페가 아니라 내 쪽이 될 것이다.

    나는 윤솔이 나와 쥬딜로페의 관계를 잊어버렸나 싶어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하지만 윤솔은 너무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는데?”

    “……?”

    뭐 아무튼.

    그때쯤 해서 장막 건너편으로 내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다음은 그 악명 높았던 항아리 대회의 우승자! 요즘 들어 제일 핫한 선수인 고인물 씨를 모십니다!”

    홍영화가 무대 위에서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하이라이트를 받으며 무대로 나섰다.

    ‘……추억 돋네.’

    무대 정면의 관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 너머로 보이는 불꽃들과 대관람차, 그리고 롤러코스터.

    자연스럽게 옛날 생각이 난다.

    ‘여기서 재특회의 킬러들을 역으로 암살했었지.’

    당시 유다희와 유세희를 죽였던 킬러들 중 하나를 암살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게 벌써 몇 년이나 지났군.

    ‘이름이 야마타니 에리코였던가? 특이하게도 음공(音工)을 쓰던.’

    지금은 랭킹에서 찾아볼 수도 없는 플레이어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때.

    내 상념을 깨는 손길이 있었다.

    [허허허허, 오랜만이야. 우승 축하하네.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스크루지 후작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마몬 레이드 이후로는 꽤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기에 나 역시 밝게 웃으며 그의 악수에 화답했다.

    “간만입니다. 정정해지셨네요.”

    [약해진 게지. 더 튼튼해질 수 있었잖은가. 허허헛- 자네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아마도 전에 잠시 오크로 변했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을 한 스크루지 후작은 한 번 더 정겨운 어투로 말했다.

    [그레이 시티의 시혼 시장을 보내 버렸다지? 아주 잘했네. 통쾌했어. 그런 부패 귀족, 관료는 없어져야 해.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용케 오크나 리자드맨으로 안 변하고 그런 짓을 꾸몄어. 원래 음흉했던 녀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스크루지 후작은 한 번 더 나를 치하했다.

    그레이 시티의 살인자 토벌 건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 뒤로 몇 번인가 구구절절한 대사들이 더 있었지만 나는 과감하게 [SKIP]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러자 홍영화가 깔깔 웃는다.

    “시상대 위에 올라와서 시상자의 대사를 스킵하는 사람은 고인물 선수가 처음일 거예요!”

    “현실에서는 못 하니 게임 속에서라도 해야죠. 그리고 제가 밝히고 싶은 우승소감이 좀 길어서… 빨리빨리 진행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와우! 이거 두근거리는데요? 고인물 선수는 늘 인터뷰를 짧게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오늘은 하실 말씀이 많다니 아주 기대가 됩니다!”

    말을 마친 홍영화는 내 수상 소감이 끝났을 대를 대비해서 바로 다음 퍼레이드를 준비했다.

    “자, 스태프 여러분~ 고인물 선수의 소감이 끝나면 바로 하이라이트 행사 진행해 주세요.”

    무대 뒤를 향해 소곤거리는 홍영화.

    하지만 무대 뒤에서 돌아오는 스태프들의 반응은 다소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MC님!”

    “네?”

    “크, 큰일났습니다.”

    스태프 하나가 울상을 짓는다.

    그는 무대 뒤 텅 비어 버린 우측 공간을 가리켰다.

    홍영화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원래 저곳에는 커다란 대포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행사, 거대 폭죽을 쏘아 올릴 대포로 스크루지 후작이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주문 제작한 대포였다.

    일명 ‘세상에서 제일 큰 대포’.

    38,000mm 로켓포를 쏘며 탄의 무게만 해도 10톤에 육박한다.

    “아니, 그 큰 대포가 어디로 갔대요?”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축제용으로 제작되어 있어서 폭죽 같은 고운 가루만 넣고 쏠 수 있는 건데…….”

    “그럼 전쟁용으로도 못 쓸 텐데, 그걸 누가 훔쳐갔지? 좀 잘 찾아봐요!”

    “엄청 무겁고 큰 거라서 중장비를 동원하지 않고서야 어디 옮길 수도 없는데… 아휴, 그게 어딜 갔지?”

    스태프들은 울상을 지은 채 허둥거린다.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대포라서 누군가 훔쳐갈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때. 내가 손을 뻗어 그들을 달랬다.

    “진정하세요. 그깟 대포 하나 없으면 어떻습니까. 불꽃놀이 안 하면 되지.”

    “…하지만, 그게 이번 시상식의 하이라이트 행사인걸요!”

    “차라리 제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돈벼락 불꽃놀이가 더 호응이 좋을 겁니다.”

    나는 모두를 다독여 진정시켰다.

    최대한 대포에서 모두의 시선을 떼어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이번 대회에 참가한 보람이 있지.’

    나는 내 나름대로 모종의 꿍꿍이가 있단 말이다.

    이윽고, 거의 모든 대사를 스킵당한 스크루지 후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나에게 다가왔다.

    [자, 먼저 우승 상품 수여부터 시작하지.]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 우승 상품이 내 눈앞으로 다가온다.

    이윽고.

    S급임에 분명한 초 레어 아이템이 내 손아귀 안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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