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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83화 (683/1,000)
  • 683화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 (9)

    아키사다 아야카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송전탑에 손을 얹었다.

    …….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아키사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눈 덮인 설원에는 결승선 하나 보이지 않는다.

    코스를 완주했다는 축하 메시지조차 없다.

    휘이이이이이잉-

    그저 을씨년스럽게 선 첨탑만이 불어오는 눈보라를 반으로 가르고 있을 뿐.

    열기구에서 이 모든 것을 중계하던 홍영화 역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레드 팀의 고인물 선수와 아키사다 아야카 선수가 나란히 정상에 오르는 순간입니다! 이러면 이긴 팀은 레드 팀이 되는 건가요? 두 선수는 공동 1등? 앗? 그런데 왜 승리 메시지가 안 뜨지?”

    MC조차 당황할 만한 일이다.

    자연히 시청자들 역시도 수군수군 설왕설래 의견이 분분하다.

    -않이 뭐야? 왜 경기가 안 끝나;;

    -뭐 원래 누가 우승했다 떠야 하는거 아님??

    -뭐지? 설마 고인물이랑 아키사다 중에 누구 하나만 우승 뜨는 건가?

    -둘이 같이 동시에 도착해서 그런거 아님?

    -자,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

    -(대충 의아해하는 댓글)

    -(대충 웃긴 댓글)

    -(대충 서로 싸우는 댓글)

    -(대충 버그 아니냐고 하는 댓글)

    .

    .

    그리고 그 모든 의문들을 종식시키는 스크루지 후작의 멘트가 있었다.

    [이 삶과 투쟁의 레이스는 평화롭기만 한 상태에서는 진(眞) 엔딩을 볼 수 없다오.]

    다소 미묘한 어조.

    그 말을 들은 홍영화는 현직 뎀걸답게 바로 발화자의 의도를 눈치 챘다.

    “아앗! 그런 거였습니다! 방금 주최측으로부터 들은 사실에 의하면 이 게임에는 숨겨진 진 엔딩이 있다고 하네요! 그 왜 보X보글에서 페이크 엔딩을 뚫고 나가야 진 엔딩을 볼 수 있는 것처럼요! 호옥시 최종보스를 소탕했더니 그게 사실 부모님이라는 식의 엔딩이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요? 호호호! 아, 이거 스포일러인가? ……에이 됐어요. 어차피 거의 40년 전 고전게임인데 아직도 플레이 안 해 봤다는 건… 여러분들 할 생각 없는 거잖아요. 스포 좀 당하면 어때.”

    홍영화와 스크루지 후작은 서로 마주보고 씩 웃는다.

    한편.

    나와 아키사다는 첨탑 앞에 서 있었다.

    홍영화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끝이 아닌 것 같아요.”

    “맞아.”

    나는 그녀의 아이디어를 칭찬했다.

    나와 아키사다의 시선은 동시에 한 곳을 향한다.

    첨탑(尖塔).

    철골만 남아 위로 뾰족하게 솟은 흉물스러운 구조물.

    이 뾰족한 탑의 끝에 도달해야만 게임이 끝나는 것일까?

    “같이 가자.”

    나는 아키사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키사다의 얼굴에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홍조가 어렸다.

    “……네.”

    그녀는 다소곳한 태도로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이내 항아리에 탄 채 망치를 이용해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따앙! …깡!

    탑은 뼈대만 남아 있어 오르기 아주 쉬웠다.

    철골들이 구불구불 휘어져 만들고 있는 척추뼈의 골마다 망치는 착착 잘 걸린다.

    그렇게 계속되는 모던 타임즈, 장시간에 걸쳐 이어지는 단순 반복 작업.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나와 아키사다는 첨탑의 막바지 부근에 이르렀다.

    탑의 뾰족한 끝에는 커다란 따봉 하나가 솟구쳐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는 모양새의 손 조형물이다.

    “좋아요네?”

    모 SNS의 의사표현 방법이 떠올라 중얼거린 말이다.

    하지만 아키사다의 얼굴은 또 빨개진다.

    뭐 ‘스고이네~’같은 맥락으로 이해한 걸까?

    -아야카쨩...번역기 좀 제대로 보지;;;

    -네가 그 네가 아닌데...좋아요는 따봉을 의미한다굿!

    -둘이 뭐야뭐야 나 촉 되게좋아~

    -솔직히 극한 상황에서 레드팀 둘만 여기까지 왔으니 전우애 생길만도 함ㅇㅈ~

    -ㅇㅇ전쟁이든 마라톤이든 중노동이든 힘든거 같이 겪었으면 유대감 생기지~

    -거기에...이 둘은...남녀관계잖아...

    -아야카쨩의 눈길...먼가 애틋해보여...질투난다www

    .

    .

    “아 뭐래요~”

    나는 시청자들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키사다는 진중한 안색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마동왕 님이 제일 좋아요.”

    “……?”

    이 상황에서 뭔 뜬금없는 말?

    -ㅋㅋㅋㅋ고인물 0고백 1차임

    -그래 인마! 아야카쨩과 너는 어울리지 않아!!! ٩(๑•̀o•́๑)و

    -그 전에 옷부터 좀 입으라고wwww

    -고인물쨩...나한테 와 잘해줄게 ლ(´ ❥ `ლ)

    .

    .

    시청자들 역시 아우성이다.

    그러나, 아키사다의 이어진 말은 모두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당신도 조금은 좋아질 것 같네요. 이제부터.”

    ???

    나도 시청자들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아키사다는 내게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같이 정상으로 가요.”

    저 위에 있는 따봉을 붙잡으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이다.

    아키사다는 그렇게 믿고 지금 나와 함께 끝까지 가고자 하는 모양.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철렁-

    가슴 한 구석이 울렁거렸다.

    감정의 동요, 그것의 정체는 미약한 죄책감.

    ‘휴, 하마터면 미안할 뻔했어. 아마추어같이.’

    나는 프로다. 프로 인성왕이다.

    2차 대격변을 위한 원대한 계획, 그 길고 험난한 길의 첫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턱!

    나는 아키사다가 뻗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오랜 전우를 바라보는 것처럼 따듯한 시선을 보내는 아키사다를 향해 물었다.

    “아까 전에 스크루지 후작이 중계하면서 했던 말 기억해?”

    “……네?”

    아키사다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크고 둥근 눈 안에 일렁이는 맑은 빛, 아! 아직 세상의 비정함을 모르는 저 눈망울이라니.

    ‘이 삶과 투쟁의 레이스는 평화롭기만 한 상태에서는 진(眞) 엔딩을 볼 수 없다오.’

    나는 스크루지 후작의 말에 동의한다.

    이 게임은 같은 편 둘이서 사이좋게 공동 1등을 할 수 없는 게임이다.

    중간에 넘어진 친구를 부축해서 결승선에 들어온 마라토너나 다 같이 손에 손 잡고 골인하는 이어달리기 계주들 같은 미담은 이 처절하고 극악한 게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안. 몇 주일 후면 지금의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아키사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뜬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키사다에게 짧게 말했다.

    ‘2차 대격변 후에 보자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통!

    나는 망치로 아키사다의 항아리 밑동을 쳤다.

    극도로 가파르고 불안한 철탑의 경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아키사다는 순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명히 철탑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착!

    나는 여봐란 듯 탑을 올라가 따봉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

    아키사다 아야카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드디어 그녀는 나의 항아리 밑면, 빨간 염색약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뚜렷한 청색 바닥을 보고야 만 것이다!

    “…브, 블루 팀!?”

    아키사다의 말에 중계진도 놀라고 관람객들도 놀라고 참가자들도 놀라고 시청자들도 놀랐다.

    홍영화가 마이크를 잡았다.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까지 레드 팀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고인물 선수가 사실은 블루 팀이었습니다! 아, 아니 근데 항아리 색이 왜?”

    [……아앗!? 설마 튜닝!? 세상에 이럴 수가!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채팅창이 뒤집어진 것은 물론이다.

    -상상도 못한 정체! ㄴ(ㅇㅁㅇ)ㄱ

    -ㅁㅊ그럼 그동안 아키사다 방해했던게 정당한 행동이었던거임ㅋㅋㅋㅋ

    -와;;;소름끼친다

    -화전양면전술,,,

    -하일 헤이드라,,,

    -미친ㅋㅋㅋㅋ저세상 전략이다 진짴ㅋㅋㅋ

    -레드팀은 팀인줄 알고 공격 안하고..블루팀은 공격하면 의문의 팀킬패널티 받고 날아가고...이런 공략이...

    -고인물...당신의 인성은 대체...

    -아야카쨩을 두 번이나 배신하다니!!!!!!!!!!!!!!!

    -이건 진짜 추천준다,,,상상도못했다ㅋㅋㅋㅋ

    .

    .

    한편.

    나는 냉정하게 탑 꼭대기에 올라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따봉의 엄지손가락 부분을 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도 레이스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거겠지?”

    나는 시청자들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물론 맵의 꼭대기가 여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나는 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 이 레이스의 진(眞) 엔딩을 보고 말 것이다.

    -않이;;근데 여기서 어케 더 높이 올라감?

    -항아리 게임 원작 해본 사람 있냐? 여기 탑에서 더 올라갈 곳이 있음?

    -스크루지 후작의 말이 단서일 듯?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진 엔딩 못본다고 했었는디???

    -그렇다는 건...레드팀하고 블루팀에서 적어도 한명씩 이 탑에 있어야 한다는건가??

    -알쏭달쏭하네...

    -아니 대체 진 엔딩이 뭐야!!!! 어떻게 보는 건데!!!!!

    -진짜 여기서 어떻게 더 위로 올라가요;;; 잡을 것도 오를 곳도 없는데

    -아키사다든 뭐든 배신해도 상관없으니까 엔딩만 보여줘 제발! 넘모 궁금해!

    -믿는다 고인물...반드시 클리어해라..이 대회!

    .

    .

    시청자들의 의견이 또다시 분분하다.

    바로 그때.

    “아-아아아아!”

    탑의 밑바닥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아키사다 아야카가 항아리 색처럼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노(小怒).

    중노(中怒).

    대노(大怒).

    사람의 분노에 3가지 단계가 있다면 아키사다 아야카의 분노는 그중 4번째 단계에 해당될 것이다.

    ‘극대노(極大怒)’

    아키사다의 그 예쁜 얼굴이 야차의 것처럼 변해 나를 집어삼키려 든다.

    “죽여 버릴 거야-아아아아아!”

    그렇게 격분한 아키사다 아야카가 새빨개진 얼굴과 새빨갛게 타오르는 분노로 내가 올라가 있는 탑에 손을 대는 순간.

    …쿠궁!

    이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테이지가 열리기 시작했다.

    코스의 정상, 청팀과 적팀의 갈등이 극한까지 치달았을 때에만 열리는 최종장.

    …쿠르릉!

    밤하늘이 반으로 쩍 갈라지고 시뻘건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철골만 남은 탑이 불길하게 떨리며 요상한 전기자석파를 내뿜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지직-

    그리고 이내 탑이 각성하며 내뿜는 자기장에 이끌린 존재들이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쿠오오오오오!

    불타고 있는 거대한 운석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려 오는 쇳덩이들처럼 첨탑을 향해 빨려들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아키사다 아야카는 화들짝 놀라 탑에서 손을 뗐지만 이미 늦었다.

    거대한 운석들이 탑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만약 저것들이 이곳에 충돌한다면 아이스 마운틴 스테이지는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되어 버리겠지.

    ……그러나.

    “줄곧 스탠바이하고 있었습니다.”

    왔다. 나는 지금껏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밟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들이 떨어지기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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