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 (8)
나는 아키사다 아야카와 얼어죽은 뱀을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저기 있는 얼어죽은 뱀은 출발선까지 떨어지는 직통 코스야. 우리 출발선에 있을 때 구름 아래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던 가시 알지? 그게 저 뱀의 꼬리라고.”
그렇다. 이 뱀은 완주 직전에 있는 사람을 시험하기 위한 시련과도 같은 존재다.
평화롭게 살던 아담과 하와를 꼬신 뱀처럼, 이 녀석은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의 의지와 호기심을 시험한다.
왠지 모를 반항심이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심리에 이것을 탔다가는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처럼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
내 말을 들은 아키사다는 황급히 뱀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히이이이가 버티고 서 있었다.
[히이이이이이-]
특유의 그 끔찍한 신음소리를 내며 흐느적거리는 필드보스 몬스터.
평소였다면 마법으로 저항해 보겠지만 모든 아이템을 착용 해제한 채 항아리에 타고 있는 지금은 무리다.
“아아아…….”
아키사다의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여기서 얼음땡의 희생자가 되어버린다면 완주 자체가 불투명해 질수도 있기에 그렇다.
이제 그녀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히이이이의 얼음 속에 갇혀 후발주자들이 도착해 땡을 해줄 때까지 머물러 있든가(물론 이 경우 후발주자들이 아키사다 아야카를 위해 도움을 베풀지는 미지수이다),
아니면 이 뱀의 머리를 타고 다시 출발선으로 되돌아가든가.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망치 부분을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 3시 방향으로 맞춰 봐.”
나는 아키사다에게 팁을 주었다.
이것은 과거 ‘폭식과 부패의 악마성좌 벨제붑’, 그리고 ‘흰 비늘의 용군주 무투룡 카프카타렉트’를 잡을 때 잠시 신세졌던 보답이다.
오염된 피 사건의 최초 제보자도 흰 용 사건의 최초 제보자도 그녀였으니까.
한편.
“…….”
아키사다 아야카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싫으면 뭐, 거기서 얼든가.”
“자, 잠깐만!”
그녀는 황급히 두 팔을 휘저으며 발을 동동 구른다.
내가 발을 멈추고 아래를 빤히 쳐다 볼 때쯤에야 아키사다 아야카는 내 조언에 따라 망치를 잡았다.
“…이, 이렇게요?”
그녀는 떨떠름한 심경 반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 반으로 내 말을 따른다.
나는 엉거주춤 망치를 든 그녀를 향해 다음 팁을 주었다.
“그리고 원심력을 만들어. 망치 쪽에 힘을 줘서. 그렇지, 그렇게! 그리고 방향을 바꿔서 양동이에 묶여 있는 밧줄이 수직을 그리는 순간 점프해! 옳지! 아이고, 아깝다. 양동이가 왼쪽에 있어서 그래, 그때는 경사가 나빠서 미끄러지거든.”
“으으으, 불안해요! 이러다 출발선까지 떨어진다면…….”
“걱정 마. 거기서 조금 더 오른쪽으로 가서 시도하면 떨어져도 최소한 모루 점프 구간으로 떨어질 테니까.”
아키사다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표정으로 내 말을 따랐다.
그러자.
…퍼펑!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키사다가 양동이 위로 올라왔고 그대로 솟구쳐 내가 있는 빙벽에 망치를 거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호다닥- 파팟!
그녀는 실로 놀라운 적응력으로 양동이 위에서 균형을 잡았고 그대로 펄쩍 뛰어 빙벽으로 몸을 끌어올린다.
내가 회귀하기 전 세상에서 수십, 수백 번 실패해 가며 겨우겨우 배웠던 것을 약간의 조언만으로 단번에 해내다니… 과연 재능깡패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싶었다.
이윽고.
…쩌저저적!
아키사다가 지면에서 항아리를 뗀 지 0.1초 뒤, 그녀가 있던 자리가 히이이이가 만들어 낸 강맹한 서릿발에 뒤덮인다.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히이이이이-]
히이이이는 놓쳐 버린 두 먹잇감이 아쉽다는 듯 한동안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시커먼 눈을 번뜩거리다가 이내 포기한 듯 뒤로 터덜터덜 기어간다.
다음 먹잇감이 될 후발주자들을 향해서.
…뭐 아무튼, 이로서 우리가 술래가 되는 일만은 면했다.
“…헉! 허억! 허흑!”
아키사다 아아캬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말 까딱 잘못했으면 영원한 얼음 속에 갇혀야 하는 것이니 이렇게 쫄릴(?) 만도 하다.
“자, 그럼 수고.”
나는 아키사다를 등지고 또 내 갈 길을 간다.
그때.
“자, 잠깐만!”
아키사다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나를 부른다.
내가 돌아보자 그녀는 헉헉거리면서도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왜 나를 도와줬죠?”
나는 그냥 씩 웃어 보였다.
마동왕 모드로 진 빚을 갚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자 내 웃음을 본 시청자들이 또 한바탕 난리다.
-저 불길한 미소는 무엇이지?
-너를 죽이겠다는 뜻인가?
-고인물의 살.인.예.고
-아아, 당신이 한국의 시키인 것입니까? 개시키...
-진정한 살인미소다ㅋㅋㅋㅋ
-아야카쨩에게 작업 걸지마! 죽어!wwwww
-아키사다 불쌍한데 좀 잘해줘라...ㅠ.
-그래 좀 친하게 지내 ㅅㅂ! 괴롭히지말고! 지금처럼!
.
.
뭐 어느 정도 시청자들의 의견을 참작해 본다.
나는 시청자들과 소통도 할 겸 해서 아키사다에게 이 가파른 빙판길을 등반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자, 여기는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망치를 걸 홈이 잘 안 보이지? 망치로 눈을 쓸면서 신중하게 올라가야 해. 괜히 점프할 생각 말고 한 땀 한 땀 걸고 당기란 말야. 재수 없게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아까의 뱀 대가리 위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어요. 그럼 당연히 게임 리셋이야. 바닥의 틈에 망치를 잘 걸었다고 해도 당기는 힘이 너무 세거나 약하면 망치가 빠져서 미끄러지니 그것도 주의하라고. 혹시나 미끄러지게 된다면 망치를 경사에 최대한 수평으로 둬서 마찰력을 크게 해. 그러면 항아리가 통 튀어 오르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망치가 우연찮게 홈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내 말을 듣는 내내 아키사다는 입을 다물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알려 주는 팁들은 꼭꼭 따르고 있었다.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으로.
“……왜 갑자기 저한테 잘해 주는 거예요?”
아키사다는 약간 날 서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전의 오렌지 헬에서 나에게 당했던 괴롭힘이 앙금처럼 남아 있는 모양.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
그저 천천히 망치로 전면의 눈을 훑으며 홈을 찾고 항아리를 끌어당겨 앞으로 전진할 뿐이다.
-아키사다 0고백 1의심 1차임
-크으, 고인물횽. 현문노답 지렷다. 역시 애매한 질문엔 대답 안 하는거지.
-ㅇㅇ저기엔 뭐라 대답해도 죄인됨. 가불기임.
-왜 갭재개 재핸태 재래쥬시눈 걔얘얘¿(◔д◔)?
-내가 아키사다였으면 자존심 상해서 망치로 등짝 찍었다....
-척추 골에 망치 잘 걸리겠네ㅋㅋㅋ
-아야카쨩은 마동왕이랑 열애설 있다~~~ 임자 있는 분이셔 얘들아~~~
.
.
그 때문에 괜히 시청자들만 신났다.
* * *
휘이이이이이이잉-
찬 공기가 한층 더 매서워진다.
코끝을 시뻘겋게 베어가는 바람이 산봉우리 정상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어느덧, 우리는 눈보라 몰아치는 정상에 이르렀다.
산의 정점.
밑으로 옅게 흘러가는 구름 아래, 산을 등반하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이는 높이.
정상의 좁은 공간에는 뜬금없이 쇼핑카트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 철골만 남은 커다란 철탑이 솟구쳐 있었다.
휑한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이는 높은 탑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그저 검은 융단 같은 밤하늘 위에 굵은 소금 한 줌 같은 별들만 흩뿌려져 빛날 뿐.
“……아무래도 여기가 끝인가 보네요.”
아키사다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본다.
나는 그런 아키사다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같이 결승선으로 들어가자고.”
그러자 아키사다는 마치 뱀의 혓바닥이 목덜미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놀란다.
“왜, 왜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질문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키사다 아야카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같은 팀이잖아.”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아키사다 아야카의 얼굴이 별안간 확 달아올랐다.
-시간차 공격.. 이 형 인싸다..
-맞지. 같은 팀이지 참. 레드팀ㅋㅋㅋ하도 싸워대서 잊고 있었다...
-크으, 밀당 무엇? ㅁㅇㅁㅇ~ 둘이 뭐야뭐야
-하, 겜방보다 전여친 생각나는 건 처음이네.
-전여친? 위에 있는 놈 밴해 주세요
-꽁냥꽁냥 금지입니다 ㅡㅡ
.
.
채팅창이 달아오른 건 덤이다.
한편 아키사다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다.
“그……그…….”
그동안 호의를 베풀어 왔던 같은 팀원을 경계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빤히 보이는 타입.
‘그래, 우리는 같은 레드 팀이잖아.’
‘아까도 팀킬 패널티가 없었던 것을 보니 고의로 한 게 아니었을 거야.’
‘그동안 날 세웠던 내가 부끄러워.’
뭐, 아키사다 아야카의 성격이라면 지금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겠지.
역시나 내 예상대로, 아키사다 아야카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아까는 오해하고 욕까지 해서 미안했어요, 고인물 씨. 저는 당신이 자갈이나 진흙을 튀기고, 소음을 내고, 스틸볼로 유도하고, 몸통박치기로 날려버리고, 망치로 설산의 눈 바닥에 은근슬쩍 ‘아키사다 허접’이라고 적었던 것이 전부 일부러 한 행동인 줄 알았지 뭐예요.”
“아, 괜찮아. 오해할 수도 있지.”
나 역시 손을 뻗어 아키사다 아야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은근슬쩍 말도 놨다.
생긋 웃는 아키사다 아야카.
그리고 나 역시 마주 웃었다.
“자, 그럼 같이 들어갈까?”
“네. 우리가 공동 1등이네요. 첫 대회에서 우승이라니, 감격스러워요.”
아키사다 아야카는 두 손을 맞잡고 환희에 젖는다.
나는 그런 아키사다 아야카와 함께 나란히 정점을 향했다.
주위는 한 점 바람도 없이 점점 고요해진다.
…….
오로지 들려오는 것은 우리의 항아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그리고 망치가 땅을 긁는 소리뿐.
점점 결승선이 가까워지자 그제야 그녀가 다시 한번 입을 뗐다.
“……와아, 드디어 결승선. 그동안의 고생을 모두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에요.”
아키사다는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눈앞의 결승선을 바라본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나는 희미한 미소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느낌 절대 모를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야.”
여러 의미로 말이다.
도착해 봐야 도착한 느낌을 알 것이지 않은가.
우리는 정확히 말하면 ‘아직’ 도착한 것이 아니다.
“진짜 오래 기다렸어요, 이 순간만 기다리며…….”
“그것도 마찬가지지.”
“같은 마음이군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턱짓했다.
아키사다는 감격에 차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씩씩하게 앞서 나간다.
“자, 가요!”
야레야레, 아야카쨩. 그렇게 한 곳만 바라보다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게 생길지 모른다고.
‘아키사다야 또 속냐!’
가령 음흉하게 웃는 내 얼굴이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