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화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 (7)
아, 이거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나는 엄습해 오는 불길함을 따라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눈 쌓인 둔덕들 너머 저 위로 길쭉한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늘어진다.
눈보라에 가려 희미한 그림자, 그것이 짙어질수록 웃음소리는 더욱 더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히이이이이이…
나는 이렇게 재수 없게 웃는 몬스터 하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 설산 맵의 난이도를 별 다섯 개로 만들어 버리는 필드보스 몬스터.
지금처럼 이렇게 알몸으로 항아리에 타고 있는 시점에서는 더욱 더 만나면 안 되는 녀석이다.
그것은 길쭉한 몸을 흐늘거리며, 깡총거리는 발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기다리는 술래 ‘히이이이’> -등급: A+ / 특성: 얼음, 어둠, 언데드, 술래, 뺑소니, 집착
-서식지: 아이스 마운틴(Ice Mountain)
-크기: 4m.
-억울하게 마녀사냥 당한 여자가 진짜 마녀가 되었다.
얼어 죽기 전 느꼈던 극한의 추위와 공포를 불특정다수에게 선사한다.
기어오는 술래 이히히히의 상위종.
원래 그나마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던 이 괴물은 정상적인 외형을 포기하는 대신 극한의 냉(冷) 속성을 손에 넣었다.
동상에 걸린 피부가 지나치게 단단하게 얼어붙어 만년설(萬年雪)과 같게 된 마녀.
이로서 완벽하게 얼음타입이 된 이 괴물은 3개로 늘어난 팔다리의 관절들을 기괴하게 꺾으며 거미처럼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눈두덩이에서 어둠을 눈물처럼 뚝뚝 떨어트리며 삭아 버린 잇몸을 비벼 별로 있지도 않은 이빨을 갈아댄다.
히이이이이이…
그리고 그 누렇게 뒤틀린 이빨들 사이로 흐느낌인지 웃음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기분 나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 진짜 운도 없네. 여기서 이걸 만나다니.”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몬스터가 여기에 서식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만날 확률이 1%도 안 되니 설마 했었다.
회귀 전에도 만나본 적 없던 것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쩌저저적!
이윽고, 공포의 서릿발이 나를 향해 엄습해 온다.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저기에 잡히면 강제로 얼어붙게 되고 누군가 나를 만져 줄 때까지는 도망칠 수 없게 되니 재수 없으면 대회 우승은커녕 완주도 하지 못하게 된다.
원래의 몸이라면 그냥 잽싸게 튀어 버리면 되니 상관없지만… 지금 이렇게 항아리에 타고 있는 상태로는 영 부담스러울 수밖에.
“아니, 이런 가파른 데서 무슨 얼음땡이냐고!”
회귀하기 전 이히히히에게 당했던 PTSD가 서서히 도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가다간 답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몰려오는 냉기를 피해 잽싸게 망치를 휘저었다.
바로 그때.
“꺄악!”
“…꺄악?”
어디선가 괴상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아아아! 아! 악! 저! 게! 뭐예! 요!?”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아키사다가 나를 향해, 아니 히이이이를 향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게 보인다.
살짝 풀린 동공, 창백해진 얼굴, 수없이 흐르는 땀방울, 거기에 부자연스럽게 휴지가 들어간 대사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과몰입 현상’ 중 하나다.
……왜 가끔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FPS 게임을 하면 엄폐물에 숨을 때마다 현실에서도 몸을 웅크리고, 축구 게임을 하면 슛을 할 때마다 책상을 세게 걷어차는 사람들.
말 그대로 게임에 과몰입하는 사람들 말이다.
아키사다는 전형적인 천재 플레이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런 모습이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궁지의 궁지에 몰린 끝에는 결국 한 사람의 연약한 플레이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오히려 게임과 현실의 싱크로율이 높은 천재이기에 더 반응이 격한 것일지도.
그 결과 그녀는 히이이이의 서릿발을 피하는 동작에 맞춰 말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저런! 끔! 찍한! 몬스터는! 아이디! 만든 이래! 처음! 봐! 요!”
나는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야 너, 떨어진 거 아니었어?”
“운 좋! 좋! 게! 미끄럼! 틀! 중! 간에 걸! 려서! 살! 았! 어! 요! 당신… 두고 봐!”
아키사다는 어찌나 씩씩거렸는지 붉어진 눈에 눈물방울까지 맺혀있다.
거의 불굴의 집념, 하기야 자존심에 상처 입은 모범생처럼 귀찮은 상대가 또 없지.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나는 히이이이가 쏟아내는 서릿발을 피해 계속해서 드리프트를 했다.
허공에 눈 덮인 종유석이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지나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뛰어넘었다.
가파른 빙판을 망치로 찍어가며 올라가다 보니 허공에 동앗줄 한 가닥이 내려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끝에는 정체불명의 양동이 하나가 매달려 대롱거린다.
“좋았어. 가 볼까?”
여기를 넘어가면 더 이상 히이이이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망치로 바닥을 쳐 점프했고 이내 망치를 양동이에 걸고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양동이가 진자운동을 하며 흔들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양동이라 가장 고점에 위치했을 때 양동이 위로 올라가 양동이를 망치로 내리찍어 점프했다.
그 결과.
“세이프.”
안전하게 얼음산 정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300시간 정도만 연습하면 누구나 쉽게 스킵하여 통과할 수 있는 코스라 고인물들 사이에서는 ‘얍삽이’ 혹은 ‘지름길’이라고 부르는 오버밸런스 코스 중 하나다.
공식 경기에서는 나중에 통과 금지 구역으로 선정되기도 하고.
‘이렇게 올라가면 구경하던 고인물들이 준비해 둔 오렌지를 집어던지곤 했지. 지난 번 코스였던 오렌지 헬에서 몇 알 집어올 걸 그랬나? …아무튼 감회가 새롭군.’
그렇게 경치를 구경하고 있을 바로 그때.
“아! 아!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어디서 EDM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귀! 신! 싫어어어! 원! 래! 호! 러 장르는! 안! 하는데!”
밑에서 아키사다 아야카가 지르는 비명소리였다.
“의외군.”
이 괴성이 아야카의 목소리라는 게 의외가 아니다.
그녀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게 의외인 것이다.
패닉상태에 빠진 것치고는 꽤나 끈질긴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적!
마치 맹수의 이빨처럼 먹잇감을 뒤쫓는 서릿발, 그 날카로운 얼음가시들의 끝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며 뻗어나간다.
바로 아키사다 아야카가 있는 곳이다.
[히이이이이- 이히히히히히-]
네 다리가 각기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려 꺾일 때마다 히이이이는 껑충껑충 솟구치길 반복하며 아키사다를 향해 가까워진다.
한편, 히이이이가 서릿발을 뿜어내며 필드를 조여오고 있는 동안 아키사다는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양동이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양동이는 불안정하게 대롱거리기만 할 뿐, 이것을 잡고 올라와 위로 타오르려면 상당한 숙달이 필요하다.
까딱이라도 잘못하면 오히려 저 아래 절벽 끝으로 떨어질 위험도 있었다.
노력하는 천재 아키사다조차도 이 양동이를 잡고 올라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때, 점점 접근해 오는 서릿발 때문에 조급해진 아키사다가 다른 것을 발견했다.
“엇?”
아키사다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눈보라와 추위, 공포와 다급함 때문에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다.
그녀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양동이의 좌측에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 환영이 아닌 실재였던 것이다.
<얼어죽은 뱀> -등급: S / 특성: 얼음 (특성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서식지: 아이스 마운틴(Ice Mountain), 거인국
-길이: 900m.
-능히 산을 휘감을 정도로 크고 길었던 고대의 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설산의 정상에 머리를 걸친 채 죽어 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몸은 등산객들의 길이 된다.
레비아탄보다도 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뱀.
너무나도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어 움직일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놈의 얼어붙은 몸뚱이는 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
“……이거 설마 비상구인 건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 거지?”
아키사다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뱀의 몸이 저 멀리 어둠 너머까지 쭉 이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
위기의 순간, 그녀는 갈등했다.
히이이이의 강제 얼음땡은 지금도 시시각각 필드를 압박해 온다.
만약 여기서 얼어붙기라도 하면 바로 리타이어, 뒤에 오는 같은 편이 땡 해 주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같은 편이 언제 여기까지 올지도 미지수고 심지어 땡 자체를 안 해 줄 가능성도 있었다)
도망치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위로 가는 것이 확실하지만 잡기가 너무 어려운 ‘밧줄 양동이’.
혹은 어디로 갈지 불확실하지만 안정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얼어죽은 뱀’.
‘……어떻게 해야 하지?’
양동이를 잡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걸 잡으려고 발버둥치는 동안 얼음에 갇히면 답도 없다.
아키사다는 시선을 돌렸다.
얼어죽은 뱀이 얼음 속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얼음 속에 갇힌 그 커다랗고 노오란 눈은 마치 자신의 머리를 밟고 올라오라고, 등을 밟고 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올라와, 나를 밟아, 일단 여기서 도망쳐야지! 그게 먼저잖아!’
얼음 속에서 속삭이는 뱀.
환청인지 진짜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귓가에 번져든다.
아키사다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뱀의 머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순간.
“너 그거 타면 큰일난다.”
얼음 봉우리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사람이 여기 하나.
바로 나다.
아키사다는 코를 훌쩍이며 나와 이히히히를 번갈아보았다.
“뭐라고요?”
아키사다가 묻는다.
나는 일단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창피해.”
내 말을 들은 아키사다가 발끈했다.
“내, 내가 창피하다고요?”
“아니. 일단 창 피하라고.”
“아앗!?”
내 말이 끝나는 즉시 히이이이가 뿜어낸 숨결이 얼음가시가 되어 아키사다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키사다는 항아리를 옆으로 쓰러트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 겨우겨우 얼음의 창을 피할 수 있었다.
“푸하!”
한숨을 토해 내는 아키사다를 내려다보며 나는 또다시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하는 것 아닌데.”
“아 또 뭐가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모범생은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양동이 타는 것 말야. 그렇게 하는 것 아니라고.”
내 점잖은 훈수를 들은 아키사다의 표정이 황당으로 물든다.
“……入れ知恵厨(훈수충)?”
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뭐, 뉴비를 향한 훈수라면 고인물들이 가장 좋아하는 콘텐츠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지.’
지금 내가 나서는 이유는 단순한 훈수 그 이상의 노림수가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