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80화 (680/1,000)
  • 680화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 (6)

    반전(反轉).

    나는 원래 처음부터 블루 팀이었다.

    다만 타고 다니는 항아리를 빨간색 물감으로 염색해서 레드 팀인 척 하고 다녔을 뿐이다.

    ‘잘 보면 바닥에 끌려서 도료가 벗겨진 항아리의 밑바닥, 그리고 하도 부딪쳐서 물이 빠진 항아리 입구 부분의 밑동은 여전히 파란색이지.’

    그러나 이런 부분은 놓치기 쉬운 부분이라서 정말 뚫어져라 관찰하지 않으면 육안으로 식별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작정하고 감추려 드는 상대에게는 더더욱.

    <이어진>

    팀: 블루

    항아리 색: 레드

    아무튼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레드 팀이었던 아키사다 아야카에게 직접 몸으로 부딪쳐 육탄 공격을 한다거나 대놓고 길을 막아도 팀킬 패널티가 부여되지 않는다.

    물론 나를 적으로 오인한 아군(블루 팀)이 공격해 온다고 해도 팀킬 패널티로 역관광해 버리는 되는 것이니 상관없는 일이다.

    물론 레드 팀은 애초에 나를 아군으로 착각하고 공격해 오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래. 비로소 혼자가 되었군.”

    나는 오렌지 헬을 가로질러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석양이 아름답게 저물어 간다.

    나는 우수에 잠긴 시선으로 그 노을을 감상했다.

    -그윽한 척 하지 마라

    -빨리 달리기나 해 x신아;;

    -표정 역겨워요 횽ㅠㅠ

    -옷 좀 입어

    -다리 부분 그림자 왜 3개임???

    -여기 초등학생들도 보는데 뭐라도 좀 걸쳐주세요 제에발~

    -나 국민학교 일학년인디,,,우리,,학급,,급우,,,동년배들도,,,다 고인물 알몸,,좋아라~~한다,,이눔들아!!

    -아야카쨩을살려내wwww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

    .

    .

    하지만 채팅창에 나를 응원하는 시청자들의 성원이 열화와 같이 밀려들고 있는 관계로 사색은 여기까지만, 이제 또 쭉쭉 달려나갈 차례다.

    “오, 이제 오렌지 헬의 막바지인가.”

    나는 저 돌산 위에 있는 새로운 스테이지를 올려다보았다.

    상층부의 돌산으로 올라가는 중턱에는 뜬금없이 빨간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더욱 더 뜬금없이 오렌지 몇 알이 놓여 있었다.

    “오렌지 헬을 등반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함인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냥 ‘오렌지가 있구나 뜬금 없네’ 혹은 ‘오렌지 헬이라서 오렌지가 있는 건가?’ 하고 지나갈 일이지만…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이들은 이 뜬금없는 오렌지 한 알을 보면 누굴 놀리나 싶어 분노하고 말 것이다.

    쾅! 으직!

    나는 망치를 내리찍어 가장 큰 오렌지를 으깨 피떡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머지 오렌지들 역시 주변으로 후려쳐 흩어 놨다.

    -분노조절장애ㄷㄷㄷ

    -분뇨조절장애ㄷㄷㄷ

    -오렌지도살려내wwww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

    .

    .

    나는 시청자들의 채팅을 잠시 무시한 채 빨간 테이블 위로 올라가 위로 슈퍼 점프를 했다.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가구들의 땅… 심하면 출발선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

    아까 나에게 밀쳐진 아키사다 아야카가 나락까지 추락하는 것을 봤기에 조금 부담이 되긴 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뛰어올라 첫 번째 암벽에 망치를 걸고 살살 끌어당겼다.

    두 번째 암벽, 이어서 세 번째 암벽까지 등반에 성공했다.

    “마의 4번째 암벽이 남았군.”

    나는 정말 조심조심 심혈을 기울여 망치를 끌어당겼고 벽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망치 머리로 바닥을 쳐 위로 솟구쳐 오른 뒤 바로 망치를 360도 휘둘러 위에 있는 4번째 돌봉우리에 걸고 당겼다.

    …삐그덕! …삐그덕!

    매우 조심조심 천천히.

    항아리가 화강암 벽에 부딪쳐 튕겨나가지 않게 조심하며, 나는 무너진 교회와 사자머리 동상이 있는 곳까지 무사히 등반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그때.

    교회 종탑에 가까이 간 내 앞으로 무언가가 화다닥 튀어나온다.

    푸드드드드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코끝을 스치고 날아가는 것들은 바로 박쥐 떼였다.

    “…깜짝 놀랐네.”

    생각해 보니 이 맵은 단지 오르는 것만이 어려운 게 아니다.

    이처럼 맵 곳곳에 숨어 있는 몬스터들 또한 문제가 된다.

    “이제 오렌지 지옥도 끝이다.”

    마의 4번째 화강암 봉우리를 넘었으니 오렌지 헬에서 주의할 점은 이제 없다.

    박쥐 떼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가 떨어지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제 이대로 쭉쭉 나아가 다음 스테이지인 ‘모루 점프(Anvil Jump)’로 진입하면 된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가파른 경사와 거의 막혀 있다시피 한 통로, 여기서부터는 사실상 2스테이지 구간으로 출발선까지 추락할 일은 없게 되니 안심이다.

    ‘……딱 한 가지 경우만 빼고 말이지.’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어차피 쫒아오는 사람도 없으니 조금 느긋해도 되겠지.

    여기서부터는 아주 밑으로 떨어질 걱정이 없으니만큼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래서인지 지형도 아주 멀찍멀찍 거리를 두고 홈이 패여 있었기에 슈퍼 점프로 도약 거리를 최대화해야 올라갈 수 있는 경사로가 많았다.

    다소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레이스였다.

    이윽고, ‘모루 점프’ 구간의 끝을 알리는 커다란 모루가 보인다.

    이곳은 망치를 홈에 제대로 걸치고 약간 대각선으로 앉아 슈퍼점프를 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기에 어렵긴 해도 전 스테이지들의 난이도에 비하면 쉬운 편이었다.

    ‘옛날에 진짜 고인물들은 이곳을 스킵하고 확확 올라가던데… 대체 어떻게 했던 걸까?’

    지금의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고이고 고인 물들의 신위를 추억하며 나는 잠시 회상에 젖었다.

    이윽고, 나는 마지막 관문 앞에 섰다.

    다음 스테이지는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곳 ‘아이스 마운틴(Ice Mountain)’!

    심하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시야도 제한될뿐더러 바닥이 온통 꽁꽁 얼어 있어서 망치를 걸기도 힘든 악마의 구간.

    더군다나 춥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을 여러모로 고역시키는 맵이다.

    심지어 이 설원 맵은 지금까지 수직으로 뻗어 있던 구간들과는 달리 수평으로 길게 뻗어 있었고 그 사이에는 깊은 고랑이 패여 있어서 건너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홍영화가 마이크에 대고 우려를 표했다.

    “아! 고인물 선수! 엄청난 속도로 단독선두를 달린 끝에 아이스 마운틴의 초입에 들어섭니다! 하지만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엄청난 깊이의 벼랑! 이 사이로 떨어진다면 바로 출발선까지 낙하할 텐데요! 과연 고인물 선수는 이곳을 어떻게 넘어갈까요!?”

    시청자들의 의견도 분분했다.

    -떨어져라떨어져!!!!!

    -저거 넘어가려면 절벽 아래로 슬슬 내려간 다음에 툭 튀어나온 종유석 부근에서 슈퍼점프로 반대편 종유석으로 넘어가고 다시 절벽 올라가야됨ㅋㅋㅋ시간 엄청오래걸림

    -난이도 꽤 되는데...잘못하면 또 출발선으로 떨어지겠다

    -저 위부터는 추울 텐데 옷 좀 입어라;;

    -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여기서는 시간 좀 잡아먹겠는데??

    -아야카쨩을살려내wwww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

    .

    .

    하지만, 나는 또다시 모두의 예상을 뒤엎어 버렸다.

    “자, 이런 지형 한두 번 봅니까? 다 빨리 스킵하고 넘어가는 방법이 있지요.”

    동시에, 나는 오렌지 헬의 마지막에 굴러다니는 널찍한 널빤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망치를 골프채처럼 휘둘러 굴러다니는 작은 오렌지 하나를 후려쳐 버렸다.

    슝-

    오렌지는 위로 날아가 맨 위에 놓여있던 한 커다란 바위 밑동을 때린다.

    그러자 불안정하게 쌓여 있던 바위산이 흔들리더니 이내 커다란 바위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바로 내가 올라가 있는 널빤지의 건너편 끝으로 말이다.

    …텅!

    바위가 널빤지 끝에 떨어지는 순간, 건너편 끝에 있던 나는 시소를 탄 것처럼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렇게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아서.

    …통!

    깔끔하게 반대편 절벽 끝에 안착.

    완벽한 계산, 완벽한 타이밍이다.

    “어때요? 참 쉽죠?”

    그러자 채팅창에는 잠시 정적이 흐른다.

    -내가 지금 뭘 본거임???

    -충격 그 자체다...고이다 못해 졸아붙다 못해 썩다 못해 발효됐네...

    -밥 아저씨가 이걸...

    -현재 대회 참가중인 플레이어다. 뒤에서 이 사람 플레이 보고 따라하려다가 몇 번 추락했다...일반인은 따라 못한다... 부질ㅇ벗어...

    -존나 쉽네ㅋㅋㅋ죽었다 깨어나서 다시 태어나면 할 수 있을 듯?

    -이 정도야 껌이지ㅋㅋㅋ(껌이 기도를 막아서 사망)

    -누워서 떡먹기네ㅎㅎㅎ(떡이 목에 걸려서 사망)

    -식은 죽 먹기잖아 완전??? (식은죽 때문에 식중독으로 사망)

    -에잉 이건 그냥 땅 짚고 헤엄치기네 (땅에서 익사)

    -뇌절까지 가네 ㅂㅅ들이;;노잼이니까 그만해 (노잼사)

    -아니 근데 저러다가 망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함?

    -망친게 아닙니다. 다만 행복한 사고가 벌어진 것 뿐이죠~

    .

    .

    “에이, 다들 너무 오버하신다. 차근차근 따라하시다 보면 정말 쉬워요. 중요한 것은 한 번, 아니 여러 번 실패했다 하더라도 다음 차례에 다시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에요.”

    나는 다음 스테이지에 진입한 기념으로 채팅창을 열어 시청자들과 소통을 했다.

    순간.

    “……!”

    나는 열었던 채팅창을 닫아야만 했다.

    방금 뭔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휘이이이이이잉-

    매섭게 불어오는 눈보라 소리.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청각을 더욱 예민하게 벼리며 극도로 희미한 이 불길함의 정체를 간파하고자 노력했다.

    이윽고, 내 PTSD를 자극하는 끔찍한 소리가 바람소리에 섞여들어 내 귓바퀴를 타고 맴도는 것이 느껴진다.

    이히히히히히…

    아, 이거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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