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78화 (678/1,000)
  • 678화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 (4)

    홍영화가 들뜬 기색으로 스크린을 향해 외쳤다.

    “아아!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고인물 선수!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아오는 아키사다 아야카 선수입니다!”

    [오호, 과연 젊은이들이라 그런가 투지가 굉장하군요. 이 다음 코스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악마의 굴뚝 구간을 돌파하면 만날 수 있는 다음 맵은 일명 ‘가구들의 땅(Furniture Land)’입니다! 책상이나 소파, 사물함, 신발장, 침대나 샹들리에 등 폐기된 가구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는 공간인데요! 항아리를 탄 채 가구들 사이사이의 좁은 틈으로 지나가야 하는 일이 정말 고역이죠. 오죽하면 악마의 굴뚝을 이어 악마의 내장이라는 별명도 붙어 있을 정도입니다!”

    홍영화와 스크루지 후작은 열기구에 탄 채 계속해서 중계를 한다.

    한편.

    나는 커브 코스에서 드리프트를 하며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키사다 아야카는 성실한 모범생답게 내 뒤를 열심히 따라오고 있다.

    ‘흠, 곤란한데.’

    이 앞부터는 수많은 폐가구들이 쌓여 있는 산 코스로 군데군데 튀어나와 있는 목재나 철골 때문에 고속주파가 불가능하다.

    난코스로 접어들며 트랙 자체의 폭도 아주 좁아지기 때문에 플레이어 간의 다툼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헛챠!”

    나는 망치를 휘둘러 저 위에 붙어 있는 구부러진 CCTV에 걸었다.

    망치에 착 달라붙은 CCTV는 꽤나 튼튼해서 잡아당겨도 부러지지 않는다.

    하기야, 걸기가 어렵지 일단 걸면 잘 떨어지지 않으니 안심.

    나는 밑에 있는 폐 미끄럼틀에 떨어지지 않게끔 조심하며 위로 올라갔다.

    다른 아이템을 추가로 쓸 수 있었다면 요 밑에 점액을 깔아 뒀을 테지만 그랬다가는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전원 리타이어 되는 잔혹한 결과가 야기될 테니 참기로 했다.

    대회 규정은 준수해야 하니까.

    그때.

    …쿵!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상념을 깨고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키사다의 항아리가 어느새 내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잔잔한 재즈풍의 피아노곡이 BGM으로 깔린 아래, 아키사다는 열심히 쓰레기들의 산을 오른다.

    “…….”

    나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 버려진 가구들의 정상에 적혀 있는 녹슨 간판이 보였다.

    <우리가 실패라고 부르는 것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추락한 채로 있는 것이다.>

    (This thing that we call failure is not the falling down, but the staying down)

    원작 게임에도 있는 내레이션이 그대로 오마쥬되어 있다.

    나는 그 글귀를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다소 염치없는 말이지만, 이 말을 꼭 전해 주고 싶은 상대가 있었다.

    ‘말로 전해서야 꼰대밖에 더 되나. 직접 몸으로 보여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꼭 여기서 우승해야 한다.

    근면성실의 표본인 아키사다 아야카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바로 뒤까지 바짝 붙은 아키사다가 해맑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참 속도 좋다 싶었다.

    ‘…고인물로서는 분명 아틀란둠에서 한번 악연이 있었을 텐데 말이지.’

    과거 고인물 모드였던 나는 레흐락과 그의 친구 게슈탈트를 지키기 위해 아키사다가 이끄는 공격대를 막아선 적이 있었다.

    나야 뭐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라지만 아키사다의 입장에서는 거의 다 잡은 던전보스를 빼앗긴 것밖에 안 되니 화가 나 있을 법도 한데…….

    하지만 아키사다는 내가 타고 있는 빨간 항아리와 자기가 타고 있는 빨간 항아리를 한번 슥 번갈아 본 뒤 생긋 웃었다.

    “전의 악연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잠시 잊어버리죠. 일단은 같은 팀이 되었으니 잘해 봅시다.”

    카X라이더와는 달리 일단 같은 적팀이 된 이상 서로의 항아리에 타격을 준다거나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바로 팀킬 패널티를 받아 뒤로 밀려나게 되니까.

    ……하지만.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나는 대회에 나갈 때엔 아무와도 손잡지 않아.”

    나는 바로 항아리를 틀어 드리프트와 함께 미니 터보를 날렸다.

    …푸확!

    동시에 질척한 진흙들이 흩뿌려지며 아키사다의 항아리를 덮쳤다.

    “꺄악!?”

    아키사다는 일순간 흐려지는 시야에 놀라 항아리를 옆으로 틀었고 그대로 부서진 책상 모서리에 부딪쳐 나뒹군다.

    다행스럽게도 특유의 천재적인 게임감각으로 균형을 유지해 추락만은 면했지만 말이다.

    “…이 무슨!?”

    그녀는 항의를 하기 위해 나를 돌아보았지만.

    …푸확! …푸확! …푸화악!

    나는 계속해서 스네이킹을 하며 드리프트와 미니터보를 무한반복하고 있었다.

    자갈들이 튀어 아키사다의 항아리를 톡톡 때려 미묘하게 균형을 흔든다.

    심지어 나는 항아리를 계속 난코스에 접붙이는 쪽으로 틀어 아키사다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 고속도로 가면 저렇게 운전하는 차 많지ㅋㅋㅋ

    -맘에 안 드는 차 보면 가드레일이나 갓길로 밀어붙여서 달림ㅋㅋㅋㅋ

    -저거저거 쓰레기 마인드 보소ㄷㄷㄷ

    -미친놈아 우리 아야카쨩에게 뭐 하는 거야!

    -진흙페스티벌...보령머드축제 ㅗㅜㅑ

    -난폭운전보소;;;인성 무엇;;;

    .

    .

    채팅창이 엄청 시끄럽다.

    “아앗! 아아앗!”

    아키사다는 나의 계속되는 방해공작에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니 보살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미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단 말씀.

    나는 항아리를 왼쪽으로 틀었다.

    그리고 그 즉시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것을 엄청난 속도로 무한반복했다.

    스네이킹을 통해 무한 미니터보를 쓰려는 셈이냐고?

    ……아니다.

    이렇게 좁고 경사가 심한데다가 불안정한 길에서는 오히려 드리프트 없이 안전주행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계속해서 항아리를 꺾는 이유는…….

    끼걱- 끼-걱!

    바로 이 소리 때문이다!

    나는 어느덧 유리판들이 잔뜩 깔려 있는 구간에 진입했다.

    항아리가 바닥을 한번 긁을 때마다 고막을 찌르는 듯 듣기 싫은 소리가 토해져 나온다.

    나는 계속해서 드리프트를 연이어 시전했고 그 결과는…….

    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

    불쾌한 소음들의 향연!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음이 미친 듯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듣기싫어!

    -미친놈아! 뭐 하는 거야!

    -어우 듣기 좋아 좋같아

    -경기를 해 경기를!

    -4옥 파, 레, 파, 레 유지하는 거 보소. 모차르트십니까?

    -그와중에 절대음감보소ㄷㄷㄷ

    -갸아아아악 짜증나!

    .

    .

    시청자들의 반응도 한결같다.

    호불호 안 갈리는 불호!

    하지만.

    “…….”

    보살 아키사다 아야카는 이 소음 공격마저 참아낸다.

    욕 한마디쯤 할 법도 한데 그녀는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와;;; 아야카쨩 이쯤되면 진짜 부처님

    -멘탈甲 아키사다ㅋㅋㅋㅋ

    -진짜 나라면 쌍욕박았다ㅋㅋㅋㅋ

    -아야카... 당신이 이겼어...

    -게임플레이를 떠나 애초에 마음씨가 엄청 좋은 분인 듯...

    -반면 우리 고인물 횽아는...오늘도 인성도르 수상...

    .

    .

    하지만.

    “푸스스-”

    나는 조디악처럼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하는 트롤 플레이에 내면의 악마가 깨어나 버린 것이다.

    물론, 프로게이머의 초인적인 집중력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푸드 파이터 앞에 쩝쩝거리며 먹는 사람, 코를 풀며 먹는 사람, 트림을 하며 먹는 사람을 가져다 놔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과 같다.

    식욕이 떨어질지언정 푸드 파이터의 손과 입은 멈추지 않는다.

    프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셋 다라면 어떨까?”

    따다다다다닥! 따닥! 따닥! 따다닥!

    …푸확! …푸화악! …푹! …푹! …푸확!

    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걱끼-!

    시야를 가리며 마구 날아오는 진흙, 항아리 밑이나 중간을 때려 궤도를 틀어 버리는 자갈, 그리고 아까보다 시끄러워진 소음.

    이 셋의 콜라보는 단순히 1+1+1이 아니라 제곱의 시너지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트롤짓은 간단해 보이지만 자그마치 세 개의 기술이 합쳐진 콤비네이션.”

    나의 속도를 냄과 동시에 뒤에 바싹 붙어 따라오는 후발주자를 지옥으로 보내 버리는 플레이.

    -않이;;간단해 보이지 않아

    -ㅁㅊ진짜 인성왕이다

    -나였으면 항아리 벗어던지고 맞짱떴겠는데ㅋㅋㅋㅋㅋ

    -아무리 생각해도 현피각임wwwww

    -아야카쨩...그 와중에도 욕 한마디 안해...진짜 여래의 멘탈이다...

    -근데 저렇게 트롤짓하는 것도 능력이여ㄷㄷㄷ

    -아키사다님 메테오 한방 시원하게 떨궈~ 주세요!

    .

    .

    시청자들로 인해 채팅창이 점점 더 가열되고 있었다.

    거의 90% 이상이 욕, 나머지는 감탄과 찬양이었다.

    “…….”

    하지만 아키사다는 미간만 살짝 찌푸렸을 뿐 착실히 내 꽁무니를 쫓아왔다.

    비록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었을지언정 정말 초인적인 집중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끼이익!

    좁은 굴을 빠져나가는 그 중요한 순간.

    “……!?”

    아키사다는 다음 스테이지를 코앞에 두고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가구들의 땅을 빠져나가는 순간, 나의 선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야를 온통 꽉 채울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광경!

    결국 아키사다는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꺄아아악! 스케베 시네!

    (スケベ 死ね: 변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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