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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72화 (672/1,000)
  • 672화 정상에서 기다릴게 (2)

    …빵빵!

    뒤에서 울리는 클락션 소리.

    나는 깜짝 놀라 인로로 물러섰다.

    “야 이 X꺄! 인도로 좀 다녀라!”

    운전자가 욕을 내뱉으며 지나간다.

    “아니, 불법주차 된 차들 때문에 인도 다 막혔구만 어디로 다니라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도로가를 돌아보았다.

    빨간 벽돌담과 말라죽은 담쟁이넝쿨들, 깨진 아스팔트, 거의 다 지워진 노면표시, 불법주차된 낡은 차들이 쭉 늘어져 있는 동네.

    나는 지금 이곳에 유창, 유세희와 함께 와 있었다.

    “진짜 다희가 여기 살아?”

    내가 묻자 유세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네. 언니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나한테 말해 줘도 돼?”

    “그럼 뭐, 저라도 안 말해 주면 사부는 어쩌려고 했는데요?”

    “…….”

    유세희가 톡 쏘아붙이는 말에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유창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막내야, 형님한테 너무 그렇게 떽떽거리지 마.”

    “사부는 바보야.”

    “어허, 바보라니. 누나한테 아주 큰 상처를 주셨을 뿐이지 바보까진 아니셔.”

    유창의 말에 나는 또 뜨끔했다.

    우리는 지금 유다희가 이사한 반지하 원룸 앞에 숨어서 유다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회귀 전에, 그리고 회귀 이후에도 한동안 살던 원룸촌.

    급하게 이사를 간지라 부동산 매물이 얼마 없어서 아무 곳이나 빨리 입주할 수 있는 곳으로 갔다나? 그게 여기였나 보다.

    예전에는 윤솔이 회귀 이후의 나를 만나기 전에 여기서 잠시 살았던 적도 있기에 이 근방 지리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유창이나 유다희 역시 과거 이쪽에 사무실을 냈던 적 있기에 지리에 익숙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어. 꼭 범죄 같잖아.”

    내가 중얼거리자 유세희가 눈썹을 확 꺾었다.

    “사부 그럼 울 언니한테 사과 안 할라고 했어요?”

    “…아니. 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는 좀. 다희도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고.”

    “그럼 울 언니가 좋아할 만한 사과방식이 뭔데요?”

    그러자 유창이 낄낄 웃는다.

    “누나 평소 성격대로라면 할복이나 달아오른 철판 위에서 도게자 정도가 아닐까?”

    ……이것들이 정말.

    나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속이 쓰리면서 타는 듯한 이 복잡한 기분.

    지금껏 마동왕과 고인물의 정체를 속여 온 것과 하해대왕 레비아탄의 공격을 대신 받아 준 것에 대해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다.

    사과를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고맙다는 말부터? 어느 말을 먼저 꺼내고 어느 말을 나중에 꺼내든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다.

    내가 침울해지자 유세희도 유창도 슬쩍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앗, 저기!”

    유창이 손가락을 뻗었다.

    내가 잽싸게 고개를 든 곳에는 반지하 빌라의 현관문이 보인다.

    그 안에서 검은 모자, 펑퍼짐한 후드티를 입은 여자가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후줄근한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긴 다리에 햇빛을 보지 않아 더욱 하얗게 변한 손과 발.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유다희다.

    끼익…

    이윽고 빌라의 현관문이 열렸다.

    쫑쫑쫑-

    유다희는 몸을 웅크린 채 주위를 살피며 밖으로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어딘가 기운 빠진, 움츠러든 그녀의 모습을 보자 마음속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집 주소까지 전부 다 인터넷에 공개되는 바람에 아무도 모르는 이곳으로 이사했다는 그녀.

    유세희에게 전해 듣기로는 그 이후로 집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우편함에는 고지서나 각종 유인물들이 가득 쌓여 있어서 처음에는 빈집인 줄 알 정도였다.

    바로 그때.

    휘이이잉-

    강한 바람이 한번 불었다.

    그러자 유다희가 쓰고 있던 검은 모자가 벗겨져 도로에 구른다.

    “헉!?”

    보는 내가 다 놀랐다.

    하지만 유다희는 내가 놀란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깜짝 놀라하며 재빨리 도로에 구르는 모자를 잡아채 뒤집어썼다.

    길 가던 이들이 그런 유다희를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오, 지금 봄?”

    “봄. 되게 예쁜데.”

    “연예인인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몇몇 남자들이 유다희를 스쳐 지나며 저희들끼리 낄낄거린다.

    나는 가까이 있는 전봇대 뒤에 숨어있어 그들의 대화가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

    유다희는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숙덕이며 킬킬거리는 뒷모습들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쳐다볼 뿐.

    푸욱-

    유다희는 이내 모자를 깊게, 더욱 깊게 눌러쓰고 앞으로 도망치듯 달렸다.

    대학생들이 앞에 있었다면 집으로 되돌아갔겠지만 뒤에 있어서 그런가 계속 앞으로만 달린다.

    “…가네.”

    “간다고요?”

    유세희는 내 말에 귀를 쫑긋했다.

    “아니 간다고 중계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사부! 따라가요! 빨리!”

    녀석이 내 등을 찰싹 때리며 외쳤다.

    나는 엉겁결에 유다희의 뒤를 쫓아 잽싸게 움직였다.

    깊은 바다 속에서 움직이는 기분이다.

    *       *       *

    유다희는 꽤 긴 길을 걸어간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머뭇거리다가 구정물 고인 골목길을 빙 둘러 돌아가고 어쩌다 공원이나 카페에서 사람들이 셀카 찍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란다.

    한 손에 지갑을 꼭 쥔 걸 보니 생필품을 사러 나온 것 같긴 한데 그런 것치고는 한참을 걸어가고 있었다.

    분명 오다 보니 집 근처에 슈퍼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어디 가는 거지?”

    “언니는 슈퍼밖에 안 가요.”

    유세희는 유다희의 발소리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야외는 소음이 꽤나 많은 편인데 세희는 유다희의 발소리를 특정할 수 있었나 보다.

    하긴 당연히 평범한 감각의 소유자는 아니겠지.

    “슈퍼라…….”

    나는 당연하게 집 근처 슈퍼 방향을 가리키며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상한데? 슈퍼라면 바로 앞에 있잖아.”

    내 말에 세희는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란 시늉을 했다.

    “거긴 안 간대요.”

    “…왜?”

    “알아본 것 같대요. 계산할 때 한참 쳐다본다고.”

    “알아본 것……같다…고?”

    “네.”

    “그러니까 알아본 건 아니란 말이지?”

    “그렇긴 한데 알아본 것 같은 느낌이래요.”

    하기야, 지금은 그냥 사람 자체가 무서울 것이다.

    타인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말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유다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선은 길긴 했지만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산기슭에 나 있는 콘크리트 벽과 불법주차된 차 사이의 좁은 틈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허름한 동네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 루트였다.

    “냉동삼겹이랑 어디, 거거 처갓집 김치? 이만 이천 육백 원이우.”

    할머니는 작은 티비에서 하는 드라마에 열중하며 대충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유다희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이것도요.”

    “뭐 또 있어?”

    할머니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카운터에 올라간 소주 세 병이 보인다.

    그녀는 혀를 짧게 차더니 다희를 위아래로 훑었다.

    “쯧, 젊은 처자가 대낮부터 술을 이리 많이……소주까지 해서 어디 보자, 이만오천…오백육십 원.”

    그리곤 다시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것도요.”

    “하, 뭐여! 한꺼번에 올려야…….”

    조금씩 짜증이 표정이 드러나는 할머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소주 다섯 병이었다.

    할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리모콘을 놓쳤다.

    “…여, 여덟 병? 아니 저건 또 뭐여.”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쿵!

    유다희가 최종적으로 카운터에 올려놓은 건 소주 여덟 병과 커다란 담금주 두 통이었다.

    할머니의 눈이 커지거나 말거나, 유다희는 주머니에서 딱 맞게 세어 가지고 온 듯한 만 원짜리 네 장과 천 원짜리 세 장, 백 원짜리 여섯 개를 건넸다.

    ‘저게 대체 몇 병이야?’

    여자 혼자서 소주를 대체 몇 병이나 산 건지…….

    하지만 기가 막혀하는 나와 달리 유창은 태연한 기색이다.

    “음, 맘 고생이 심해서 그런가? 오히려 주량은 적어졌나 보네요 형님.”

    “…….”

    한편, 유다희는 손에 든 소주와 삼겹살을 들더니 담배가 있는 진열장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담배도?”

    “…….”

    “허 참! 몸 상혀 진짜. 그걸 어찌 다 마실라 그러는겨.”

    “엣쎄 한 보루…….”

    “뭔 병이라도 있는겨? 아니 자세히 보니까 어서 본 것 같은디. 어디 보자. 아가씨 혹시…….”

    “아, 아니다! 잔돈은 가지세요!”

    할머니가 수상하게 자신을 바라보자 유다희는 이내 제자리에서 홱 돌아 슈퍼를 빠져나간다.

    “원, 이쁘장허길래 요전에 드라마에 나왔던 처자인가 했는디 아닌가 보구먼. 요즘 것들은 정신이 하나같이 빠져서! 끄응, 액수가 딱 맞긴 맞네. 잔돈은 무신…….”

    할머니는 부채를 파닥파닥 부치며 그녀가 주고 간 현금을 셀 뿐이다.

    그때 유세희가 내 등을 한번 탁 하고 쳤다.

    “지금!”

    “알아, 곧 나갈 거야.”

    “나가요!”

    “곧……조금만 있다가.”

    유세희의 재촉에 나는 계속 머뭇거렸다.

    그러자.

    “제발 나가 뒤지십쇼, 형님!”

    유창이 엄청난 힘으로 나를 기세 좋게 밀어 버렸다.

    으아,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던 참이란 말이야!

    아무래도 스토킹을 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던 참이었다.

    원래는 놀라지 않게 지나가면 뒤에서 부르려 했지만, 결국 나는 자연스럽게 슈퍼를 나오는 유다희와 외나무다리 맞은편에서 서로 딱 마주친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예전에 그레이 시티 퀘스트 때처럼 말이다.

    “…….”

    나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아직도 하해에 가라앉아 있는 듯, 무거운 수압에 짓눌려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다……”

    내가 겨우겨우 걸음마를 떼듯 입술을 뗐을 때.

    “……!”

    그제야 나를 발견한 유다희의 표정이 급변했다.

    동시에.

    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다희가 들고 있던 비닐봉지가 도로에 내팽개쳐졌다.

    (냉동 삼겹살이 진짜 단단하다는 것과 소주병이 생각보다 그리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후다닥-

    유다희는 나를 보자마자 잽싸게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마치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쌔애애애애애앵-

    전직 육상선수 같은 움직임으로.

    “어어!? 잠깐…….”

    내가 당황해서 막 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이미 도로 저편에 까만 점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뭐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빨라!?

    그때.

    툭-

    내 옆구리를 치는 작은 주먹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유세희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유세희는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말했다.

    “뭐해요 안 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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