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화 무투룡(武鬪龍) (5)
아스라지는 포연.
싸움 나락이 통째로 뒤흔들린다.
조디악이 건 자폭 데미지는 HP가 한계에 이르러 있던 흰 용의 무릎을 꿇리는 데 성공했다.
…후두둑! …후두둑!
벚꽃잎처럼 흩날리는 흰 비늘들이 이 영원한 전장에 봄이 왔음을 알린다.
삶 내내 지속되던 싸움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띠링!
<세계 최초로 ‘무투룡 카프카타렉트’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고인물/조디악>
<보상이 지급됩니다!>
<‘무투룡’이 쓰러졌습니다>
<‘몽마의 접경’이 사라져 갑니다>
<‘싸움 나락’이 사라져 갑니다>
<모든 리자드맨들의 공격력이 2% 감소하고 체력과 방어력이 1% 증가합니다>
<기나긴 싸움이 종료되고 전쟁터에 꽃이 피어납니다>
<모든 이들이 조금 더 삶에 여유를 가집니다>
<잠시 게임을 끄고 밖으로 나가 햇빛 아래 산책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대멸종의 두 전쟁군주’가 ‘고인물’ 님의 업적에 관심을 표합니다>
<‘심록용 브라키오’가 ‘고인물’ 님의 업적에 관심을 표합니다>
.
.
나는 자잘한 알림음들을 싹 무시해 버렸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을 보다 빨리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흰 용의 HP는 빨피였고, 조디악이 그것과 함께 자폭했다 이거지?”
어차피 흰 용의 자폭에 가까운 발악기를 이겨 낼 수 있을지 미심쩍던 차에 잘 된 일이다.
자폭으로 죽은 조디악은 기여도와 보상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마지막에 조디악이 보여 주었던 이타적인 행보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찜찜한데.”
조디악에게 은혜를 입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하지만 분명 마지막 순간, 조디악은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 사이코 또라이가 대체 왜?”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음습하고 불길한 것이다.
대체 조디악이 노리고 있었던 바는 뭘까? 왜 나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를 한 것일까? 설마 놈의 악몽을 함께 공유했던 기억 때문에?
그런 이유를 믿기에는 나는 좀 때가 많이 묻었다.
“스무 살 때였다면 믿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마흔에 이른 나이에 남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좀.
하지만 어찌 되었건 결과는 나쁘지 않은 쪽으로 나왔다.
무투룡 사냥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나는 노이즈가 발생하는 상태창을 열어 레벨의 현주소를 확인했다.
<이어진>
LV: 95
HP: 950/950
호칭: ‘흰 용군주 카프카타렉트의 위상(특전: SM플레이어)’
SM플레이어 특성이라, 꽤나 쓸 만한 것을 얻었다.
“예전에 피반창이 얻었던 아이템에 붙어 있던 옵션과 비슷하네.”
이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입을 때마다 물리공격력이 증가하는 능력.
다른 점이 있다면 피반창은 S급 아이템 ‘변태패티쉬 링’에 붙어 있던 ‘SM플레이어’ 특성을 얻은 것이고 나는 호칭 특전으로 인해 그것을 패시브로 소유하게 된 것,
스킬을 아이템으로 얻으면 강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고 패시브로 얻으면 아이템과는 상관없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다른 스킬들과 중복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다 각자 장단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불완전변태나 싸움광, 야수, 백전노장, 여벌의 심장 등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기에 같이 연계해서 쓰기도 괜찮겠다.
“역시 SM은 도움이 되는군. 과학(Science)과 수학(Mathematics)처럼.”
나는 호칭 특전에 이어 아이템을 점검했다.
아이템 보상으로 떨어진 것은 여의주(如意珠)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작은 보석이었다.
흰 진주처럼 빛나는 이것은 힘을 주어 비틀면 마치 조개, 혹은 캐스터네츠처럼 두 조각으로 벌어져 열린다.
-<흰 용의 오르골> / 재료 / S+
삶의 극한에 이른 자들은 으레 그동안 살아왔던 전쟁 같은 삶을 반추해 보기 마련이다.
-특성 ‘회고록(回顧錄)’ 사용 가능 (특수)
※환영은 환영일 뿐입니다
“오! 이런 것도 나오네?”
나는 신기함을 느끼며 눈앞에 있는 오르골을 만지작거렸다.
싸움 나락의 환영들을 만들어 냈던 ‘회고록’ 특성을 이렇게 얻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내 아이템 설명을 살핀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아아, 뭐야. 환영은 환영일 뿐이라고?”
흰 용이 했던 것처럼, 지금껏 죽인 몬스터들을 실체화시켜서 싸우게 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내가 오르골에 힘을 불어넣자.
…반짝!
잔잔한 음악과 함께, 방금 죽인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가 홀로그램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환영은 환영일 뿐 아무런 힘도 없는 모습이었다.
붕-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흰 용의 환영은 나를 통과해 그대로 지나쳤다.
아무래도 카프카타렉트가 썼던 능력보다는 다소, 아니 많이 떨어지는 능력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전에 죽였던 몬스터들을 한번 추억하는 용도로밖에는 못 쓰겠는데?”
나는 입맛을 한번 다신 뒤 이 오르골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추억팔이를 할 때가 아니면 이것을 다시 쓸 때가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그때.
“……아니, 잠깐.”
나는 오르골을 인벤토리 구석에 던져 넣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내 눈길이 향한 곳은 알림음의 자막이었다.
<‘대멸종의 두 전쟁군주’가 ‘고인물’ 님의 업적에 관심을 표합니다>
방금 전 흰 용의 죽음과 함께 떴던 메시지.
나는 이 메시지 앞에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이 오르골을 써먹을 데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띠링!
또다시 알림음이 내 상념을 깬다.
<히든 퀘스트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완료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불사조’의 유지를 잇는 자-‘불사조의 대리인 호칭 필요 (1/1)’>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질투의 악마성좌 레비아탄 처치 (1/1), 백색의 용군주, 무투룡 카프카타렉트 처치 (1/1)>
<히든 퀘스트 완료 보상: ‘불사조’의 부활 쿨타임 대폭 축소>
<※파르테논의 최초 입장자만이 이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해대왕 레비아탄과 삶과 투쟁의 용군주 카프카타렉트를 둘 다 쓰러트렸다.
“…근데 불사조가 어디로 부활했다는 거야?”
그것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마 불사조는 퀘스트 완료로 인해 어딘가에 부활했을 것이나 그것이 어디인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모양.
나는 인벤토리를 뒤져 불사조가 사후에 남긴 주문서를 다시 읽어 보았다.
-<시간여행자의 예언서> / 재료 / ?
부정한 가치들이 범람함에,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고,
용과 악마가 몸을 섞을 것이며,
재앙의 별이 하늘에 긴 궤적을 그릴 때,
태양이 떨어지고 마침내 긴 황혼이 저물어 오리라.
-(아이템이 현재 봉인되어 있습니다)
예언은 지금 다시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불사조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또 한 번 판을 다시 짜야겠군.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다시 나오려나.”
나는 콧등을 한번 쓸었다.
여기 오기 전에 엄재영 감독에게 엄포를 놓았던 바가 있었다.
2차 대격변!
이제는 진짜 말로만 주절댈 게 아니다. 한번 판을 뒤집어 엎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혼자서 음흉한 계획을 짜고 있을 때.
“푸스스스스- 친구!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나? 뒤통수 치고 싶게시리.”
저 멀리 상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그곳에는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조디악이 낄낄 웃고 있는 것이 보인다.
놈은 자폭으로 인해 몸이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이내 놈의 갑옷 때문임을 눈치 챘다.
벨페골을 잡고 얻은 S+등급의 갑옷.
입은 데미지를 할부로 차차 나눠받는 기묘한 스킬이 붙어 있는 이 갑옷 덕분에 놈은 자폭의 데미지조차 할부로 끊어 흰 용을 죽이고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조디악은 나를 보며 낄낄 웃었다.
“푸스스스스스! 친구, 기여도 빼앗겨서 화났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나도 흰 용의 특전이 필요했거든. 나도 나름대로 다음 계획이……응?”
하지만 놈은 끝까지 주절거릴 수 없었다.
조디악이 나를 보며 짓는 미소보다 내가 조디악을 보며 짓는 미소가 더욱 더 불길하고 음흉했기 때문이다.
“…후후후. 그랬군. 역시나 네놈이 선의를 베풀 리 없지.”
“푸, 푸스스스… 뭐야? 왜 그렇게 불길하게 웃어?”
“기분이 좋아서.”
나는 깎단으로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사이코 또라이였던 빌런이 갑자기 착해져서 캐릭터 붕괴인 줄 알고 찝찝했잖아.”
“…….”
“그런데 역시나 바뀐 게 없어서 오히려 마음에 편하네. 다음에 죽일 때도 부담감이 없겠어.”
조디악에게 분명 경험치와 보상의 일부를 스틸당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얻고 싶었던 것들도 다 얻은 마당이기도 하고… 또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조디악의 과거 역시도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이다.
‘악당이긴 하지만 나름의 사연은 있다 이거지?’
그렇다면 조디악의 다음 행보를 예측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진다.
움직임과 목적을 미리 짐작할 수만 있다면 놈을 내 목적에 부합하게끔 유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불사조의 원수를 갚아서 기분 좋은 김에, 특별히 안 아프게 원킬로 보내 준다.”
“푸스스스스스- 뭐라고? 만용이 지나친데 친구,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어떻게 잡겠다는 거…….”
조디악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하지만.
…파팟!
이내 놈은 등 뒤로 나타나는 수많은 환영들에 기겁해야 했다.
“으아아아악!?”
조디악이 그동안 잡아 왔던 몬스터들이 협곡의 뒤로 우르르 소환된다.
내가 흰 용의 오르골을 가동한 결과였다.
물론 실체가 없는 환영일 뿐이지만 싸움 나락의 대난투를 목격한 바 있는 조디악은 내가 싸움 나락을 다시 가동시킨 줄 알고 기겁했다.
“이, 이런 사기적인 힘을 어떻게 플레이어가 다뤄! 에라 진짜 밸런스 똥망겜이네!”
조디악은 등 뒤로 보이는 수많은 보스 몬스터들을 피해 내 쪽으로 허겁지겁 도망쳐 온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마몬의 건틀릿을 시뻘겋게 달구고 있는 내가 있었다.
“아직 한 발 남았다.”
마몬의 건틀릿은 이 주먹질 한 방 이후에는 마을 대장간의 수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총탄처럼 나가는 주먹으로 충격파를 만들어 주변의 지형들을 모조리 붕괴시켰다.
콰-콰콰콰콰쾅!
주인을 잃고 허물어져 가던 싸움 나락이 이 마지막 한 방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으아아아아아!”
나의 공격까지 할부로 나눠받을 수 없었던 조디악은 충격파에 휘말려 리타이어되었고 그 여파로 인해 세상은 멸망한다.
파지지직!
나는 점점 심해지는 노이즈 사이로 최후의 알림음을 들었다.
-띠링!
<세계 최초로 히든 인스턴트 던전 ‘싸움 나락’을 올 클리어 하셨습니다!>
무너지는 세계. 요란한 노이즈.
붕괴물 사이로 균열이 벌어지고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포탈이 열린다.
나는 불사조의 원수를 갚아 조금 후련해진 기분으로 무너지는 악몽 세계를 완전히 떠났다.
긴 꿈, 짧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