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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68화 (668/1,000)
  • 668화 무투룡(武鬪龍) (3)

    …철푸덕! …철푸덕! …철푸덕!

    나는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슬라임 젤리들을 바닥에 처덕처덕 뿌렸다.

    “무색은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재미가 있지.”

    원래 투명했던 젤리들은 바닥에 늘어진 채 가지각색으로 빛난다.

    -<츄츄의 슬라임 젤리> / 재료 / D

    그레이 시티의 명물 슬라임 젤리.

    슬라임으로 만든 젤리답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다.

    이 모든 젤리들은 무통증 협곡, 화산의 심장, 심록의 숲 그린헬, 하해의 밑바닥 등등 이 세계 곳곳의 극지(極地)에 절여 뒀던 것으로 암석, 화염, 바람, 물 등등 다양한 속성을 함유하고 있다.

    조디악이 지옥불 코어의 속성을 슬라임 젤리에 옮겨 놓았듯, 나 역시도 그렇게 했다.

    심지어 나는 그레이 시티의 NPC인 젤리팔이 소녀 츄츄와의 호감도도 MAX였고 젤리의 레시피 또한 아는 상태인지라 이것들을 대량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곡! 이 많은 물량을 어떻게 다 대요! 이렇게 많은 젤리는 못 만드…….’

    ‘만들 수 있어. 우리 같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보자고. 의지의 한국인 아니겠냐.’

    ‘으아앙! 한국이 어딘데에에에에-!’

    지난날 힘들었던 악전고투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매일 츄츄와 날밤을 새 가며 살인자들의 탑 5층에 마련해 둔 젤리 공장을 가동시켰었지.

    ‘생 슬라임 즙을 짜고… 건더기 건져내고… 증류하고… 정수 거르고… 원심분리 하고… 굳히고……’

    ‘쀼.’

    ‘앗! 이 녀석! 그만 집어먹어! 명절 전 부치는 것도 아니고!’

    ‘쀼!’

    ‘간이 덜 되었다고? 아니 우리 집안에서는 원래 이렇게 만들어. 네 입맛에 맞게 먹고 싶으면 친정 가.’

    ‘……쀼.’

    ‘뭘 또 변했다고 내가.’

    젤리도둑 쥬딜로페가 만들 때마다 젤리를 운반하는 척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집어먹지만 않았어도 생산량이 더 많았을 텐데.

    뭐 하여튼.

    “그동안 대량생산했던 젤리들을 모조리 들고 왔지. 무슨 맛을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 매운맛, 역겨운 맛, 따끔한 맛, 저세상 맛, 공포의 쓴맛, 죽을 맛…….”

    각 속성, 각 맛으로 물든 젤리들이 흰 용을 향해 데미지를 뿜어낸다.

    땅 속성의 젤리는 단단함을, 불 속성의 젤리는 뜨거움을, 바람 속성의 젤리는 날카로움을, 물 속성의 젤리는 차가움을.

    그 외 다양한 젤리들이 온갖 지형 데미지를 뿌리며 흰 용의 주변을 감쌌다.

    …파파파팟!

    흰 용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거리를 너무 좁혀 놓은 탓에 도주로는 봉쇄되었다.

    1페이즈에서 니가와 스타일에 당했던 것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 패인.

    [뿌앵-]

    젤리를 본 쥬딜로페가 군침을 흘리며 손을 뻗었지만.

    “에헤이. 땅에 떨어진 거라 지지야 지지.”

    나는 젤리를 노리는 쥬딜로페의 손을 탁 쳤다.

    “물론 GG를 말한 거란다!”

    그리고 동시에 젤리들의 데미지와 함께 흰 용을 향해 폭탄 공격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마몬과 데스웜의 힘이 실린 주먹 세례!

    거기에 일곱 가지 색으로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젤리들의 빛이 내 뒤를 따른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힘을! 하나로 모으면!”

    [크, 크윽!? 나, 나머지 두 가지는 뭐지?]

    “캡! 틴! 플래닛! 캡틴플래닛!”

    [크아아악! 나머지 두 가지는 뭐냐고! 왜 무시하는 것이냐 인간!]

    HP가 깎여나갈 때마다 흰 용 카프카타렉트가 발악하고 있었다.

    너무 뜨거워서 하얗게 보이는 불길이 용의 발톱 모양을 형성하며 전후좌우를 사납게 찢어발긴다.

    나는 수중에 가지고 있던 모든 슬라임 젤리들을 흩뿌렸다.

    “무지갯빛 총공격이다!”

    슬라임 젤리들이 지뢰처럼 터지며 쌍무지개를 띄웠다.

    퍼퍼퍼펑!

    이윽고, 싸움 나락이 통째로 요동친다.

    검붉은 흙먼지가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는 기류를 따라 용이 승천하듯 회오리를 그렸고 주변의 모든 기암괴석들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그때쯤 해서 3페이즈가 끝났다.

    츠츠츠츠츠…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뛰던 네 마리의 고정 S+급 몬스터들이 천천히 사라진다.

    마몬은 망치를 든 상태 그대로 재로 변해 버렸다.

    벨제붑은 몇 마리인가의 파리로 화해 흩어졌다.

    레비아탄은 기름으로 변해 녹아내렸다.

    창해룡 버뮤다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아아, 안 돼. 좋았었는데……]

    오즈의 몸 역시도 다시 작아져 원래의 앙증맞은 사이즈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동시에 오즈가 부리던 수많은 언데드들도 뼛가루로 변해 폭삭 주저앉기 시작했다.

    파사사사사삭-

    오즈가 발산하던 강력한 어둠의 마나가 끊기자 고정 S+급 몬스터를 상대로도 맨 앞에서 용맹하게 싸우던 용옥의 고문기술자를 필두로 싸움 나락 전장의 에이스 몬스터들이 서서히 주저앉는다.

    식인황제, 여덟다리 대왕, 크라켄, 데스나이트, 발록, 거대 곰치, 데모고르곤, 미노타우로스, 기간틱 게코, 하린마루, 씨아블로, 어둠 대왕…….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던 보스 몬스터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생전의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천천히 골분으로 변해 바람에 스러졌다.

    나는 그 모습을 흘끗 보면서도 계속 흰 용을 도발했다.

    “저기 있는 몬스터들도 죽을 위기를 무릅쓰고 1:1을 고집했었는데… 너는 불리해졌다 싶으면 다구리나 하려고 하고. 하여간~ 흰 용군주라는 이름이 아까워. 근성은 저기 맨 하위 리그에 있는 D급 살육 벌만도 못한데.”

    [하하! 그러게나 말이다! 검은 용족과 다르게 흰 용족이 원래 그렇게 좀 졸렬한 부분이 있지. 어흠어흠~]

    어깨 위로 쪼르르 날아와 붙은 오즈가 말을 거든다.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은근슬쩍 비위를 맞추는 것이 좀 전에 반란을 꿈꾸던 것을 만회해 보려는 의도가 빤히 엿보였다.

    한편, 나와 오즈에게 조롱을 들은 흰 용의 낯빛이 분노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자 그럼 도발도 어느 정도 걸렸으니 이제 다시 또 전투를 시작해 볼까?”

    내가 자세를 잡자 오즈가 슬쩍 물었다.

    [인간, 내가 한 마디만 더 추가해도 되겠나? 딱 한 마디다! 금방 끝내겠다! 진짜 딱 한 마디!]

    오즈의 입이 마구 달싹거리고 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녀석도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게다가 딱 한 마디라면 못 들을 것도 없다.

    “……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즈가 카프카타렉트를 조롱했다.

    [핫하하하하! 저 꼴을 보니 붉은 용족의 꼬맹이 모르그마르도 저것보다는 덜 빨갛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자네 아버지가 적룡인가? 설마 혼혈? 아 왜 그래, 내가 뭐 이상한 말 했나? 혼혈이 죄는 아니잖아! 아니아니! 표정이 왜 그런 거야? 우나? 이봐, 카프카타렉트! 설마 우냐? 야, 우냐고! 어 지금 눈물 떨어지는 것 같은데? 어어어어, 운다! 동네룡들! 이리 와 보소! 얘 운다! 엘렐레~ 엘렐레~ 카프카는~ 용이 아니라~ 지렁이래요~ 지렁이래요~ 이노오오옴! 앞으로 데스웜을 형님으로 모시거라. 너는 용 가문 파문이다. 넌 이제 카프카웜이다! 따라해 봐! 카! 프! 카! 웜! 그리고 참 맞다맞다, 아까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 네녀석 겨우 이 정도로 지금까지 최강의 전사인 척을 하고 다닌 거냐? 좀 전에 뭐라 했지? 1:1의…… 큭큭! …원칙을 깨는 것은…… 크그극! ……아쉽다만…푸흣! ……별 수 없게 되었군? 크하하하핫! 네녀석 정신연령이 헤츨링에서 멈춘 거냐! 아니 요즘 헤츨링들도 그런 소리는 안 한다! 정말 내 얼마 없는 비늘마저 소름이 돋아 곤두서게 만드는군! 진짜 그런 말을 하면서 한 번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나?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연기의 재능! 아니면 네 녀석…… 진심이었던 거냐? 으아악! 표정 보니 진짜인가 본데! 흰지렁이야! 진심이었으면 나가 죽어라! 네놈은 용족의 수치다! 앞으로 밖에 나가지 마! 나가면 세상 사람들이 다 용들은 허세에 가득 찬 몹쓸 종족이라 생각할 것 아니냐! 집 안에서 흰 쌀죽이나 퍼먹으면서 고독하게 평생 살아라! 그리고 죽으면 꼭 내가 비석에 아까의 대사를 새겨 주마. 다시 봐도 정말 명문이구만! 1:1의 원칙……진짜 구역질이 날 정도군! 어우! 이봐, 한 가지 충고해 줄까? 사회생활을 안 하고 계속 외톨이로 지내니 아직도 그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뱉는 것이야. 친구 좀 사귀어! 아, 못 사귀는 건가? 참 아까 내가 밖에 나가지 말라 하였지? 어후 그럼 내가 사과하겠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자네처럼 말의 앞뒤가 안 맞아서 미안해!]

    “…이제 됐어. 그만 해. 그리고 한 마디도 아니구만.”

    [웅! 알겠다 인간!]

    한 마디만 한다던 오즈는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 그래 봤자 이따가 반란을 꿈꿨던 것에 대해서는 엄하게 체벌할 텐데.

    그때.

    퍼퍼퍼펑! 쿠르륵!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가 전신에서 흰 불꽃을 폭발적으로 피워 올린다.

    하얗고 거대한 겁화가 주변을 살라먹고 있었다.

    불타 버린 공기가 사라진 빈 공간으로 바람이 빨려 들어와 폭풍이 일어난다.

    불길 가는 대로 불어 번지는 바람은 방향을 예측할 수도 없을뿐더러 지독하게도 뜨겁고 날카로웠다.

    너무나도 눈부신 백빛에 젤리들이 발하는 무지개빛도 일순간 힘을 잃고 흩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흰 용 카프카타렉트 레이드가 드디어 최후의 페이즈에 이르렀다는 것을.

    …우드득! …우득!

    이윽고, 카프카타렉트의 두 뿔이 세 배는 됨 직하게 굵고 길어졌다.

    전신의 근육량이 폭증했고 그 괴량감 넘치는 근육 사이로 한층 더 두꺼워진 흰 비늘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통나무처럼 굵고 긴 꼬리 끝 비늘들이 칼날처럼 꼿꼿이 섰다.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패이고 뼈가 부러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흰 용의 목구멍 속에서 증오가 배어나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살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정 못 한다. 적어도 같은 용족에게 당하는 것 아니면 인정 못 해!]

    놈은 천하의 용족, 그것도 군주 급인 자신이 이런 코너에까지 몰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응 그럼 인정하게 해 줄게~”

    나는 이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야.

    ‘이쯤에서 예전 일을 잠시 언급하자면….’

    사실 전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흰 용 동영상을 제보했던 피반창이 흰 용을 만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이코 특유의 그 호전성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카프카타렉트는 어째서인지 같은 리자드맨에게 약하지.’

    물론 그 약하다는 게 정말 힘이 약하다는 게 아니다. 마음이 약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용, 더 나아가 파충류 종족 전체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자부심과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

    자신의 종족과 힘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한 놈이니까.

    리자드맨의 모습으로 덤벼드는 피반창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끼고 살려 보내 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래서 준비했다.”

    나는 지금껏 비장의 무기, 최후의 승부수로 점찍고 있던 아이템을 꺼냈다.

    “이봐, 오즈.”

    내 말에 오즈가 빠르게 튀어나온다.

    “그거 꺼내와. 그거.”

    보통의 녀석이라면 ‘그거…가 뭡니까?’하고 되물을 테지만, 이 순간 오즈의 비굴함은 세계 최고의 수준!

    게다가 나의 ‘그거 찾기 놀이’에 녀석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몸이다.

    [그거! 알겠다, 인간!]

    오즈는 습관적으로 대답함과 동시에 곧바로 내 품을 헤집었다.

    “3…2…1…….”

    [자, 잠깐! …찾았다! 인간! 아니 원래 시간제한은 없었…잠깐만! 간다 간다!]

    그냥 숫자를 천천히 거꾸로 셌을 뿐인데 오즈는 숨을 헐떡이며 빠르게 내 몸을 훑었다.

    오즈는 마침내 ‘그걸’ 찾았는지 번개 같이 내 손 앞으로 등장했다.

    [여, 여기 있다!]

    …달그락!

    조막만 한 두 손으로 아이템 하나를 꼭 끌어안은 채 말이다.

    -<용의 돌> / 재료 / S

    너무나도 아름답게 생긴 보석.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홀려 버린다.

    -어둠 속성 저항력 -50%

    -?

    그것은 시커멓게 반들거리는 신비로운 돌, 과거 죽음룡 오즈에게서 얻었던 물건.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을 쓰러트리고 얻은 ‘악마의 돌’과 같은 부류의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아이템이 하나 더 있다.

    -<살아 있는 화석> / 재료 / ?

    오래 전부터 모습이 일절 변하지 않은 채 전해져 내려온 고대의 존재.

    쥐고 있는 자의 모습을 변하지 않게 고정시켜 주는 아이템.

    일명 ‘변함없는 돌’이라 불리는 보석.

    ‘용의 돌’은 바로 이 ‘살아 있는 화석’의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아이템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바로 이런 것.”

    말을 마친 나는 용의 돌을 꽉 움켜쥔다.

    동시에.

    …우드득!

    내 육체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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