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화 무투대회 (6)
“…우승이라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번 싸우지도 않았는데 우승이라니, 아무래도 이름 없는 여왕이 넘겨줬던 출전권 덕분인 것 같다. 그녀가 이미 상당히 많은 적들을 쓰러트려둔 덕택인지 나는 바로 결승전으로 올라왔던 것이다.
“지름길을 잘 탔나 보네.”
이름 없는 여왕과의 인연이 여기서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과거의 일은 현재를 향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모두 똑같다.
…반짝!
인벤토리가 깜빡거리는 것을 보니 뭔가 변화도 일어난 듯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상태창을 열어 본 뒤 깜짝 놀라야만 했다.
<이어진>
LV: 94
HP: 940/940
호칭: 싸움 나락의 생존자(특전: 스탯의 정수) /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그리고 호칭에 따른 특전은 자연적으로 따라온다.
<싸움 나락 프로듀스 101의 우승 상품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 스탯의 정수 10,000개.
생각하지도 못했던 보상이 주어졌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상을 수령했다.
-띠링!
<스탯의 정수 10,000개를 수령할 예정입니다>
<수령하고자 할 스탯을 골라 주십시오>
<‘민첩’ 스탯을 선택하셨습니다>
<민첩의 돌 10,000개가 ‘고인물’ 님의 인벤토리로 이동했습니다>
민첩의 돌 1만 개.
그렇다면 일반적인 성인 남성이 낼 수 있는 속도의 백 배에 해당하는 민첩성이 내 몸에 추가적으로 깃들었다는 말이 된다.
“우왓!?”
나는 살짝만 움직였는데도 앞으로 확 튀어나가는 몸 때문에 당황했다.
민첩성을 올려주는 신발이나 망토 아이템을 벗었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력이었다.
마치 그 전까지의 내 몸이 소형차였다면 지금의 내 몸은 최신형 스포츠카와 같다.
살짝만 밟아도 팍팍 나가는 속도 때문에 평범하게 걸을 때는 힘을 조절해 살살 걷는 연습을 해야 했다.
나는 바닥에서 작은 조약돌을 집어 들어 앞으로 힘껏 집어던졌다.
그리고.
-스팟!
날아가는 조약돌을 반대편 정면에서 잡아낼 수 있었다.
나는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는 조약돌을 내려다보며 입을 딱 벌렸다.
“이 정도 되면 정말 어지간한 공격쯤은 죄다 회피할 수 있겠는데.”
아이템 보상도 없고 경험치도 호칭도 안 줘서 참 거지같은 스테이지라고 생각했는데 약간 반성해 본다.
그때.
MC를 보고 있던 흰 용 프란츠가 나를 향해 마이크를 내밀었다.
[네! 제 610,522회 싸움 나락에서 우승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더불어 생존하신 것도 함께 축하 드려요!]
“아, 네. 같은 말 아닌가요?”
[우승한 거랑 생존한 거랑은 다르죠! 따로따로 하신 분들도 계신걸요. 하하하핫! 우승했는데 생존하지 못한 경우는 있었고 우승하지 못했는데 생존한 경우는 없었지만.]
과장된 포즈로 잘난 척을 하는 프란츠를 보자 어딘가 한 대 패 주고 싶었다.
‘재수 없게 으쓱거리네. 이 자식이 설마 중간 보스 같은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현재 스테이지를 이끌어 나가는 존재이기에 함부로 도발을 할 수는 없다.
거기에 이 자식은 날개나 비늘의 완성도로 보아 분명한 순혈, 그것도 ‘바실리스크’나 ‘리자드맨 용사’, ‘용옥의 고문기술자’보다도 훨씬 더 고위에 있는 개체이다.
고유 이름까지 부여된 네임드 몬스터인 만큼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용족의 S급 몬스터들보다도 훨씬 더 강할 것이 분명해 보였고 심지어 자폭 특성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역으로 큰코다칠 우려도 있었다.
괜히 들쑤셔 봤자 계획에 차질만 생길 것 같았기에 나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차피 내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겨우 이깟 녀석을 잡고자 함이 아니니까.
한편. 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츠는 유쾌한 어조로 마이크를 더욱 더 가깝게 들이민다.
[네! 싸움 나락의 생존자께서는 이제부터 두 가지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전에 들은 알림음들을 떠올렸다.
<플레이어 진영 최초로 결승전에서 승리를 거머쥡니다>
<싸움 나락의 배틀로얄에서 우승했습니다!>
<최후의 도전자 [참가번호: 6시 조 B612 ‘고인물’]>
<싸움 나락의 챔피언에게 도전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연히 무투룡 카프카타렉트에게 도전할 자격을 뜻할 것이다.
프란츠는 마치 나를 시험이라도 하듯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안락한 일상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혹은 더욱 더 험난하고 고된 가시밭길로 몸을 내던질 수도 있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말을 던지는 그의 등 뒤에는 두 개의 포탈이 열려 있다.
붉은 포탈은 더 상위로의 도전을, 푸른 포탈은 원래 몸담고 있었던 평화로운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포탈이다.
“…….”
나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조건 푸른 포탈을 고를 것이다.
이 나락의 저변으로 굴러 떨어진 이들은 무투룡 카프카타렉트에게 강제로 잡혀 온 입장일 것이 일반적일 테니까.
더군다나 강제로 잡혀온 것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까지 겪어야 했겠지.
‘……마치 조디악처럼 말이야.’
나는 이곳에 오기 전 벨페골의 영역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래, 만약 내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이쯤에서 일상으로의 귀환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챔피언에게 도전이다.”
내 목적은 다르다.
나는 이곳 나락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존재.
이곳의 챔피언인 무투룡 카프카타렉트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벼리는 고인물이 아니던가.
또한.
…깜빡! …깜빡! …깜빡!
아까부터 자꾸만 ‘도전’ 버튼을 향해 빛나는 작은 실선, 그것은 분명 불사조의 ‘선택’ 특성이 발현된 결과이다.
50%의 상황, 양자택일의 순간 항상 내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특성.
나는 불사조의 의지를 이어 ‘도전’을 골랐다.
그리고 붉은 포탈을 향해 미련 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내 선택을 지켜보던 프란츠가 선글라스 너머로 눈웃음을 친다.
[네! 일상으로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더 강한 자를 갈망하는 그 투지! 실로 놀랍습니다! 610,522회 만에 처음으로 챔피언을 향한 도전자가 나타났군요!]
동시에.
…쿠르륵!
푸른 포탈이 한번 크게 일렁인다.
“……!”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루트인 붉은 포탈 앞에 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푸른 포탈에 연결된 곳.
그곳은 저 깊숙한 무저갱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시체와 불길만이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연옥(煉獄)이었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본 프란츠가 낄낄 웃어댔다.
[네! 계속되는 도전을 택하신 용기 있는 투사님에게는 알려드릴 것도 없는 하찮은 정보이다만… 사실 방금 탈출구라고 소개해드린 파란 문은 불지옥으로 직통하는 코스랍니다!]
그러니까 기실 이 나락에는 빠져나갈 탈출구 따위는 없다는 뜻이다.
싸움을 관두고 평화롭던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모든 이들은 저 밑에서 비참하게 뒹굴고 있었다.
뼛조각까지 바싹 그을린 해골만 남아.
[핫하하! 무려 챔피언을 영접할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도망갈 구멍이나 찾는 겁쟁이 비겁자들은 죽어도 싸지요!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저기서 죽어 이 경기장을 뜨겁게 달굴 장작이나 되는 게 저것들이 그나마 유일하게 쓸모 있는 삶을 살 기회인 거예요.]
프란츠는 잠시 마이크에서 입을 뗀 뒤 파란 포탈 아래 불지옥을 향해 침을 퉤 뱉었다.
이내 선글라스 뒤로 그의 번들거리는 눈알이 나를 향해 희번뜩거린다.
검은자위라고는 전혀 없이 흰자위만 남은 시선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곧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가 온다고.
“좋아. 준비됐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프란츠의 입가에 희열과 광기가 머금어진다.
[610,522회의 생존자가 챔피언에게 도전합니다! 그동안 보아 왔던 썩은 근성의 패배자들과는 뭔가 다릅니다!]
이윽고.
붉은 포탈이 더욱 더 넓어진다.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싸움 나락의 경기장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었다.
프란츠가 마이크에 대고 쩌렁쩌렁 외쳤다.
[챔피언은 이상한 존재입니다! 리그의 우승자, 랭킹 1위면 제일 강해야 하는데 그 위에 있는 것이 바로 챔피언이거든요! 말 그대로 규격 외! 랭킹으로조차 가둘 수 없는 괴물을 뜻하죠!]
동시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축이 뒤흔들린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주변에서 싸우던 다른, 새로운 리그의 몬스터들이 모두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이쪽을 우러러보며 괴성을 질러댄다.
미칠 듯이 끓어오르는 광기!
수라처럼 날뛰던 몬스터들이 보름달을 바라보는 늑대처럼 한 곳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찢어 펄떡이는 심장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S급 몬스터의 정점에 올라 있는 프란츠조차도 흥분에 겨워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두 눈 크게 뜨고 보십쇼! 만나기도 전에 기절하면 안 됩니다!]
그의 말대로 몬스터들 중 상당수가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A+급 이하의 몬스터들은 이 숨 막히는 집단광기를 버텨낼 수 있을 만한 정신력이 없었기에 그렇다.
나는 크툴루 크라켄의 고생물 특성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정신줄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참고로 여기서 정신력이 부족하면 바로 로그아웃 되어 튕긴다)
“……엄청나네.”
이 정도 물량, 이 정도 급이나 되는 몬스터들을 단지 피어만으로 혼수상태에 빠트린 존재는 회귀 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여러분! 버티세요! 지금 보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상대입니다! 핫하! 좋습니다! 진정한 ‘괴물’ 앞에서 여러분은 한낱 흥분한 잡짐승에 불과하거든요!]
프란츠는 온몸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자, 그럼! 진짜로 모셔 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우리 나약한 존재들이 있는 이 땅에! 진정한 챔피언이! 호기심 가득한 전쟁광이! 모든 삶의 전장을 돌아다니는 위대한 백색의 용군주가!]
뜨거운 숨결들이 모여 안개를 일으키는 대지.
방금 전까지 살벌하게 이루어졌던 모든 투쟁들을 비웃듯, 정말로 새빨갛고 불길해 보이는 포탈이 전장 한가운데 열렸다.
…콰쾅!
이윽고, 흰 벼락 한 줄기가 바닥에 날카롭게 때려 꽂힌다.
검붉은 지면이 쩍 갈라지며 바싹 메마른 흙먼지가 구름처럼 뿌옇게 피어올랐다.
프란츠는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가 펑 터져 버린 것도 모른 채 고함쳤다.
[나락의 생존자가 우승의 영예를 제물삼아 챔피언을 청합니다! 도저-어어어어언!]
동시에.
…파직!
흰 불기둥을 찢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걸어 나온다.
만날 수 있는 확률이,
0.00001227738%인 로또 1등 당첨 확률보다 100배가량 희박한 존재.
<카프카타렉트>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4m.
-이 세상의 모든 용을 다스리는 일곱 군주 중 하나.
전장, 무투장, 삶을 지배하는 위대한 흰 용.
“세계는 위협으로 가득하고 모든 삶은 곧 투쟁이다.”
-카프키타렉트- <신약, 백내장기(白內障記), 『 어느 투쟁의 기록 』>
백색의 용군주,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가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