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화 무투대회 (4)
나는 시야를 꽉 채우는 그림자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뭐야? 벨제붑? 얘도 여기 나올 수 있는 거야?”
언뜻 싸움 나락 참가자들의 면면들을 훑어보면 대부분 그 한계는 A+~S랭크 선이다.
하지만 파리 대왕 벨제붑은 흰 용 카프카타렉트와도 맞먹는 고정 S+급 몬스터, 이런 곳에 출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규격 외였다.
“아니, 그러면 레비아탄이나 마몬, 버뮤다, 오즈 같은 것들도 나와야지? 왜 벨제붑만?”
[인간, 왜 가만히 있는 나를 걸고 넘어지는가?]
어깨 위에서 오즈가 항의해 왔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S랭크 이상은 출전에 자격 제한 같은 걸 둬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인간적으로다가.
그때.
“…어?”
나는 눈앞에 있는 벨제붑의 크기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파리 대왕 벨제붑은 여전히 크고 흉악했고 여덟다리 대왕을 죽이고 상위 리그로 올라왔을 정도로 강했지만… 과거 나와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몸집이 약간은 작고 왜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벨제붑>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40m.
-이 세상의 모든 악마를 지배하는 일곱 성좌 중 하나.
질병과 부패를 지배하는 위대한 마왕.
“너. 네가 올라가 누운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벨제붑- <구약, 역왕기(疫王記) 하권,
역왕 1,3-4>
“아하, 깜짝 놀랐네. 어쩐지 미묘하게 작다 싶었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벨제붑의 위험 등급은 S랭크.
S랭크 벨제붑이라면 내가 벨제붑 레이드를 돌 때 분명히 한번 잡았었다.
혈족전생 특성으로 자기 아들 중 하나의 몸을 빌어 환생한 벨제붑이 분명 S등급이었다.
“흐음, S급 벨제붑이라.”
몸집이 미묘하게 작아지고 각 스탯들이 꽤나 큰 폭으로 저하되었다.
전신에서 풍겨 오는 고기 썩은 악취도 약간 옅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교활한 공격 패턴과 역겨운 외형은 그대로였다.
웨에에에엥-
벨제붑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놈은 수없이 비벼 날카롭게 갈아진 앞다리를 이용해 내 몸을 절삭하려 들었다.
흡혈파리 특유의 잽싼 움직임!
“오, 시도는 좋아 친구. 하지만 쉽진 않을걸?”
나는 그간 스탯의 정수들을 주워 먹으며 신체능력이 상당히 증폭되었다.
스탯들이 워낙에 자잘자잘하게 늘어나서 그동안 체감을 못 하고 있었는데 과거에 한번 싸워 봤던 상대와 마주하게 되니 그때와 비교해 강해진 것이 확 체감된다.
스핏-
고스핏으로 움직이는 벨제붑의 앞다리가 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허공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몇 가닥.
나는 자리에서 펄쩍 점프했고 허공에서 눕듯 빙글 돌아 벨제붑의 통통한 아랫배에 긴 깎단 스크래치를 내 주었다.
쩌저저적- 퍼퍽!
파리의 시커먼 배때지가 갈라지며 역겨운 핏물과 내장 조각들이 흘러내린다.
그것들이 내 몸을 흠뻑 적셨고 막대한 부패 데미지와 역병 데미지를 전달해 왔지만.
“하하하! 나는 이미 썩어 있고 이미 역겨워서 상관없지롱!”
이미 이보다 더한 상태의 벨제붑(S+)을 잡고 놈의 특성을 흡수한 내게 있어 전신을 흠뻑 적신 썩은 피는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즉 나는 이 세상 모든 독에 면역이란 말씀!
“너는 이거나 먹어라.”
나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뒤 재빨리 아이템을 스위치했다.
어깨까지를 감싸는 거대한 건틀릿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스팀을 뿜어낸다.
쉬이이이이익-
나는 마몬의 오른팔을 수직으로 뻗어 벨제붑의 하복부를 세차게 가격했다.
뻐-억!
내 주먹이 통통하게 살찐 아랫배를 파고든다.
퍼퍼퍼퍼펑!
두터운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 그리고 그 안쪽의 보드라운 것들이 왕창 뭉개지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웨에에에에에엥!
벨제붑은 터진 배에서 검은 피와 내장을 질질 흘리며 도망친다.
…쿠르르르르륵!
이미 익숙한 극독 웅덩이들이 녹색 물결을 일으키며 내 주위를 감쌌다.
하지만 예전에 상대했을 때보다 지름도 짧고 깊이도 얕은 웅덩이들이었다.
나는 웅덩이 위를 펄쩍펄쩍 뛰어넘어 벨제붑을 추격했다.
놈이 폭식 특성을 발동하기 전에 폭딜을 꽂아 넣어 잡아 버릴 요량이었다.
‘…어디 보자, 내가 저 파리 놈을 어떻게 잡았었지?’
내가 기억하기로 벨제붑의 공격 패턴은 다음과 같다.
1페이즈: ‘식욕(食慾)’ + ‘팀킬’
2페이즈: ‘부자유친(父子有親)’ + ‘입구막기’
3페이즈: ‘극독(劇毒)’ + ‘오델로’
4페이즈: ‘폭식(暴食)’ + ‘역류성 식도염’
5페이즈: ‘혈족전생(血族轉生)’
하지만 이번 맵은 벨제붑의 고유 영역이 아니기에 상당수의 페이즈는 스킵되거나 무효화 되었다.
지금은 아마 3페이즈의 특성인 극독 오델로만이 유효하게 펼쳐지고 있는 모양새.
…풍덩! …첨벙!
독 웅덩이에 몇 번인가 빠졌지만 이미 면역이 있었기에 딱히 상관없다.
그마저 제대로 작동하는 3페이즈의 공격패턴 역시도 완벽하게 견제 완료다.
“솔직히 독 데미지만 아니면 뭐.”
천하의 파리 대왕도 독이 없다면 그 공략 난이도가 크게 하락한다.
그만큼 벨제붑의 독은 무섭고 골치 아픈 것!
심지어 지금은 파티원이 없기에 1페이즈의 핵심 특성들도 전부 봉인된 상태다.
구더기들이 죄다 멸종한 상태기에 2페이즈 역시 봉인, 자연스럽게 5페이즈 역시 봉인이다.
스탯의 대다수가 억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교활한 패턴들까지 모조리 봉쇄된 벨제붑, 거기에 랭크까지 한 단계 떨어졌다.
내가 놈을 한 번 더 잡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까꿍.”
나는 도망치는 벨제붑의 앞을 가로막았다.
붉은 눈두덩이 속, 수억 개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하지만 그 수많은 눈동자들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공포’
그리고 나는 놈의 감정에 화답한다.
“죽어라.”
나는 놈의 머리통 정중앙에 마몬의 주먹을 때려 박았다.
콰쾅!
벨제붑은 고통스러워하는 벌레 특유의 동작을 취한다.
웨에에에에엥-
놈은 바닥에 배를 까 뒤집은 채로 여섯 개의 다리를 마구 버둥거리며 몸을 뱅글뱅글 돌리는 모양새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역한 바람이 일어 주위의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나는 날아가지 않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잡고 버텼다.
“…확실히 다른 S급 몬스터보다는 훨씬 세네.”
예전에 이 녀석을 잡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눈앞에 있는 벨제붑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만나왔던 그 어떤 S급 몬스터들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나는 분명 그 이상의 경지로 올라섰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강자들을 상대하는 동안 강력해진 육체와 정신력이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푸욱!
나는 두 자루의 깎단을 파리 대왕의 가슴팍 깊숙이 찔러 넣었다.
웽… 웨엥… 파즈즈즈- …….
결국 벨제붑은 누운 그대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방팔방으로 바동거리던 다리들이 중앙을 향해 곱게 오므려지는 것을 보니 확실히 죽은 모양.
이것저것 상성의 우위가 뒷받침된 덕택에 이룬 쾌거였다.
“…다시 살아나진 않겠지?”
나는 혹시나 놈이 예전처럼 혈족전생 특성을 발동해 A+등급으로 되살아나지는 않을까 싶어 경계했지만 주위에 구더기가 한 마리도 없어서 그런가 우려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이이잉…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진다.
어떤 격투기 선수가 그랬었다.
링 위에서 승리하는 순간, 오로지 나만이 하늘로 붕 뜨고 모두가 그런 나를 우러러보는 느낌이 든다고.
나는 벨제붑의 피로 범벅된 채 보다 높은 곳으로 떠오른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 이거 꽤 좋은 고양감이다.
“벨제붑도 다시 만나 보고. 추억 돋는구만.”
비록 경험치나 아이템 보상 따위는 일절 없지만… 그동안 내가 잡아 왔던 몬스터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꽤나 뜻깊은 자리였다.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저 녀석들이 존재했었던 덕분이니까.
나를 상징하는 것은 레벨, 그리고 레벨은 곧 내가 이 세계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경험했는지의 총량.
경험치를 이루는 것은 곧 지금껏 잡아 왔던 몬스터이고 그 모든 것들이 이곳 싸움 나락에서 추억의 오르골이 보여 주는 주마등처럼 재현된다.
(물론 생각만큼 낭만적이고 포근한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어찌 보면 그동안 참 많은 적들을 만났고 많이도 강해졌네.”
나는 과거를 회고했다.
이 게임을 시작한 순간, 튜토리얼의 탑을 졸업한 순간부터 어마어마하게 많은 적들을 이겨 왔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내가 현재 서 있는 경기장 아래를 쳐다보자 아직도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이리로 올라오기 위해 서로 맞붙어 싸우는 것이 보인다.
그 드글드글한 괴물 구덩이를 내려다보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그때.
키이이잉-
날카로운 이명과 함께, 내 앞으로 다음 상대를 소환할 게이트가 나타난다.
‘다음은 누굴까?’
올라오며 언뜻 본 바에 의하면 데모고르곤? 혹은 데스나이트 킹 아서가 유력하다.
아마도 대진표 상 유력한 우승후보자들이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누가 나오든 상관없지.”
어차피 내가 한 번은 잡았던 놈들이다.
나는 두 개의 깎단을 역으로 쥐고 정면의 포탈을 향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들을 이기고 살아남은 나다.
과거,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강해졌단 말이다.
…하지만.
곧이어, 포탈을 찢고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존재를 보자 그간의 자신감과 뿌듯함은 그대로 내 목을 조른다.
“…너는?”
나는 눈앞에 보이는 그리운 얼굴을 향해 입을 딱 벌렸다.
제일 먼저 이곳 ‘싸움 나락’에 떨어진 이래 그동안 무수한 사선을 넘어왔을 생존자.
나 못지않게 많은 적과 도전자들을 상대해 왔음이 분명한 관록(貫祿).
온몸을 뒤덮은, 아물고 새겨지고 아물고 터지고 아물고 찢기고 아물고 그어지고 아물고 또 다시 새겨진 흉터 자국들.
나에게 깎단을 준 첫 S급 몬스터이자 첫 보스 몬스터.
나를 여기에 있게 만들어 준 몬스터.
가장 오래된 자.
싸움 나락 최초의 입장객.
지금껏 고이고 고인 고인물.
나는 눈앞에 있는 또 다른 고인물의 업적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지금까지 나만큼이나 성장해 왔구나.”
두 개의 쌍검을 쥐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상대.
그것은 바로, ‘용옥의 고문기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