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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62화 (662/1,000)
  • 662화 무투대회 (3)

    나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유다희를 바라보았다.

    반달 모양의 짙은 눈썹과 큰 눈. 긴 흑발.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름은 유다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다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다희와 똑같은 외모를 가진 존재.

    <이름 없는 여왕> -등급: B / 특성: 이심전심, 반전, 백전노장, 언데드.

    -크기: 3m.

    -아주 먼 옛날 존재했던 고대국가의 마지막 여왕.

    그녀가 다스리던 국가는 전 대륙을 호령할 정도로 크게 번창했었지만, 어느 날 단 하루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망국(亡國), 그녀의 한은 앞으로 천 년은 더 푸르리라.

    그렇다.

    과거 내가 유다희와 처음 레이드를 같이(?) 뛰었을 때 사냥했던 몬스터가 이곳에 있었다.

    ‘이름 없는 여왕’은 세계관 설정 상 지금은 멸망하고 없는 고대왕국 로디지아를 다스리던 존재로 ‘이름을 되찾은 여왕’이라는 두 번째 모습을 가지고 있는 보스 몬스터이다.

    주특기는 좌우, 상하를 반전시켜 공격하는 ‘반전’ 특성과 창끝에서 뻗어 나오는 복잡한 번개 패턴.

    그리고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역시 근처에 있던 여성 유저의 몸을 숙주로 삼아 전생하여 두 번째 목숨을 손에 넣는다는 것 정도일까.

    “…….”

    나는 눈앞에 있는 유다희, 아니 이름 없는 여왕의 몸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이 여왕의 위험등급은 기껏해야 B등급, 하지만 A+급 이상의 몬스터가 즐비한 이 싸움 나락에서 한 번도 죽지 않은 채 이곳까지 진출했다.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는 이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험난한 수라의 길을 걸어왔을지는 갑옷과 창에 난 흉터와 핏자국들을 보면 얼추 짐작이 간다.

    ‘왠지 마음이 아프네.’

    게임 속 캐릭터에 과몰입하지 말자고 늘 생각하지만… 그게 생각대로 잘 안 된다.

    어쩌면 여왕이 유다희의 얼굴을 똑같이 가지고 있어서 더욱 그럴지도.

    한편.

    유다희의 얼굴을 한 여왕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결코 용서 못한다.]

    뜨끔.

    나는 하해(下海)에서 헤어진 유다희를 떠올리며 괜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여왕이 하는 대사는 마치 유다희가 나를 향해 하는 원망처럼 들린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불현듯 내가 뭐 하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세상에는 게임보다 중요한 일이 많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

    지금은 게임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야 할 때.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유다희를 만나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로그아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자리한 곳이니만큼 여러 가지 제약들이 많다.

    ‘…게임에서 나가면 제일 먼저 유다희를 찾아야겠어.’

    그때, 여왕이 추가로 말한 대사가 나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절대 용서 못한다! 용 놈들! 그리고 카르마!]

    아참, 중요한 설정 하나를 까먹고 있었다.

    로디지아는 오로지 여성들로만 이루어져 있던 신화 속의 고대국가이자 용에 의해 멸망한 나라, 따라서 여왕은 용에 대해 맹렬한 분노를 가지고 있다.

    (그녀가 드랍하는 청동제 아이템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로디지아를 용에게 팔아넘긴 간신이 바로 살인자들의 탑 6층의 보스였던 리치 ‘카르마’였다.

    (물론 내가 처지한 바 있는 몬스터이다)

    [나는 용과 악마의 전쟁에 휘말려 멸망한 고대국가 로디지아의 마지막 여왕.]

    “아, 오랜만에 듣네 그 대사.”

    아무래도 먼 과거, 로디지아의 멸망에 개입했던 용이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가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뭐, 아무튼. 카르마를 처치했던 것에 대한 연계 퀘스트일까?

    여왕은 나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괜찮다면 나 대신 네가 출전해 보아라. 내가 인정한 자라면 나를 대신할 자격이 있으니.]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왕의 몸은 이미 상처와 맹독으로 만신창이, 전 경기에서 A급 몬스터인 교활한 베놈피온을 상대하느라 모든 힘을 다 소진해 버린 듯하다.

    나는 오래 전 ‘잊혀진 고대문명의 유적’을 올 클리어한 뒤 들었던 알림음을 떠올렸다.

    -띠링!

    <세계 최초로 ‘이름을 되찾은 여왕’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여왕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최초 클리어 특전을 이렇게 받게 되네.

    먼 옛날, 이름 없는 여왕을 잡고 그녀의 인정을 받았던 덕택에 나는 싸움 나락의 배틀로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띠링!

    <‘이름 없는 여왕’이 대회 출전권을 양도하고자 합니다!>

    <‘이름 없는 여왕’과의 친밀도가 일정 수치 이상입니다>

    <출전권을 양도받으시겠습니까?>

    <출전권 양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플레이어 진영 최초로 싸움 나락의 배틀로얄에 참가합니다>

    <참가번호: 6시 조 B612 ‘히폴리테(Hippolyte)’>

    <이름을 새로이 남기시겠습니까?>

    .

    .

    수많은 알림들이 뜬다.

    나는 [SKIP] 버튼을 누르지 않고 설정들을 끝까지 읽었고 그제야 이름 없는 여왕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이름 없는 여왕이 유다희의 이름을 빼앗아 이름을 되찾은 여왕이 되기 전, 원래 가지고 있었던 진명(眞名)을 말이다.

    “히폴리테였군. 좋아, 네 출전권은 내가 잘 쓰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왕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끝에 고개를 돌렸다.

    […부디. 흰 용을.]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푸스스스스…

    이내 그녀는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변해 풀썩 내려앉아 버렸다.

    그리고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저 멀리 나락 바깥으로 날아간다.

    “…….”

    나는 여왕이 떠나는 것을 보고는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조디악의 기억을 통해 게임 속의 부조화들을 인지하게 된 이후 더욱 더 나와 이 세계가 조화롭게 된 느낌이 든다.

    이윽고, 나는 ‘출전권’이라는 글자가 적힌 낡은 종이를 찢었다.

    -<싸움 나락 무투대회 출전권> / 주문서 / ?

    싸움 나락의 생존자에겐 어마어마한 영예가 기다리고 있다.

    (참가)하지 않겠는가?

    -특성 ‘싸움 나락’ 사용 가능 (특수)

    주문서를 찢자 내 몸이 저절로 6시 방향에 있는 상위 리그 경기장으로 둥실 떠올랐다.

    -키이이이잉!

    귀를 찢는 듯 날카로운 이명.

    이윽고, 피가 말라붙어 굳은 듯한 필드 바닥이 눈앞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곳 중앙에는 방금 전 경기를 마치고 올라온 듯한 나의 상대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오호?”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필드 중앙을 장악하고 있는 몬스터는 당연히 나와도 구면인 몬스터.

    [오…오오오오…]

    경기장을 떠받치는 돌기둥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굵고 거대한 여덟 개의 다리를 사방의 팔방으로 길게 뻗은 존재.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 -등급: S / 특성: 맹독, 벌레, 즉사, 킬 체인, 변온, 내성(耐性), 점성(粘性), 살금살금, 백전노장, 불완전변태

    -서식지: 부유섬 심장부

    -크기: 42m.

    -먼 옛날, 용과 악마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죄 없는 수많은 짐승들이 죽어 가던 시절.

    한 거미가 고뇌했다.

    ‘나는 홀로도 완전한 존재인지라 위험과 두려움을 모른다지만, 시류(時流)에 휘말려 죽어 가는 저 작고 가여운 생명들은 어이 할 것인가?’

    거미는 오랜 생각을 마친 뒤 여덟 개나 되는 다리를 넓게 펼쳤다.

    끝없이 몰아치던 폭풍우도 거미의 단단한 몸뚱이를 뚫을 수는 없었고 이로 인해 모든 다리 여덟 개 달린 것들이 그 품 안에서 근근하게나마 명맥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여덟다리 대왕 큘레키움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내려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놈의 가운데 다리에는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반지처럼 꿰여 죽어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다른 다리들 역시 각기 다른 고위 몬스터들의 피와 살점들로 범벅되어 있었다.

    무수한 흉터와 핏자국으로 범벅된 여덟다리 대왕은 S급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급의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답게 전혀 사그라들지 않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깎단을 역수로 고쳐 쥐었다.

    “그래, 내가 예전에 너를 잡을 때 꼼수를 좀 많이 쓰긴 했지.”

    몬스터를 잡기 힘들어서 섬 하나를 통째로 불태워 버렸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잡은 것은 아니리라.

    더군다나 몇 가지 행운들이 터진 것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 레벨과 아이템 수준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잡을 수 없는 넘사벽의 존재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녀석과의 1:1 정면승부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자, 그래.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나는 자세를 낮추고 눈앞의 거대 거미를 향해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기대하던 여덟다리 대왕과의 승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오오…]

    놈은 어딘가 힘이 없는 모습으로 기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목구멍을 긁으며 비틀리는 그 음성은 분명한 신음소리, 그것도 고통과 절망이 듬뿍 배인 그것이었다.

    “……?”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여덟다리 대왕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

    나는 느꼈다.

    눈앞의 이 녀석은 여덟다리 대왕이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뻥!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여덟다리 대왕의 머리통이 터져 버렸다.

    마치 수박 깨지듯 박살나는 거미의 두개골.

    그리고 그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하얀 살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구더기 유충들이었다.

    웽웽웽웽웽웽-

    동시에, 내 귀를 핥아오는 불쾌한 소리.

    표정이 절로 핼쑥해진다.

    얼굴에서 피가 싹 빠져 감과 동시에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타올랐다.

    큘레키움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그 안에서 뛰쳐나온 것.

    역겹게 살찐 통통한 몸뚱이와 더러운 날개,

    시뻘건 안와 속에 수억 개의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그것!

    <벨제붑>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44m.

    -이 세상의 모든 악마를 지배하는 일곱 성좌 중 하나.

    질병과 부패를 지배하는 위대한 마왕.

    “너. 네가 올라가 누운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벨제붑- <구약, 역왕기(疫王記) 하권,

    역왕 1,3-4>

    바로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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