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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61화 (661/1,000)

661화 무투대회 (2)

싸움 나락.

그곳에는 지금까지 내가 잡아 왔던 모든 몬스터들이 한데 모여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D급 몬스터인 살육 벌부터 시작해서 S급 몬스터인 크라켄까지.

내 경험치의 총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몬스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이, 이게 다 흰 용 카프카타렉트가 잡아 온 것들인가?”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설정 상, 카프카타락트는 싸워 이긴 몬스터의 영혼을 복사해 이곳에 구현해 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곳에 진입한 플레이어는 그동안 자기가 죽였던 모든 것들에 대한 업보(業報)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푸스스스- 어차피 여기 있는 몬스터들은 다 가짜야, 복사본이지. 이곳은 삭제된 데이터가 임시 보관되는 휴지통 같은 곳이라고.”

조디악은 아는 게 이게 전부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과연, 놈의 말대로 여기에 있는 몬스터들은 원본과 거의 똑같았지만 색깔이나 복장 등이 미묘하게 조금씩 다르다.

그것들은 실시간으로 서로 치열하게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콰쾅!

어둠 대왕이 식인 황제의 목을 쥐고 피를 빨아들인다.

식인 황제는 어둠 대왕의 몸에 백빛의 불길을 끼얹고 있었다.

이히히히가 바실리스크의 몸을 두터운 서릿발 속에 가두었고 바실리스크는 거대한 중장갑에 뒤덮인 몸을 움직여 그것들을 부순다.

씨아블로는 하린마루의 전신을 촉수로 휘감아 조였고 하린마루는 터질 듯한 근육으로 그 촉수들을 팽팽히 잡아당겨 끊으려 하고 있었다.

배드엔딩과 데스나이트가 요란하게 맞붙었고 크라켄이 발록의 전신을 짓누른다.

샌드웜이 이빨로 쟈쿰의 뿌리를 끊으려 들었고 미노타우로스는 도끼를 들어 리치 왕의 도끼에 맞서고 있었다.

일대 일 매치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위로 올라온 몬스터는 또 다시 다음 상대와 맞붙는다.

이 과정에서 저급한 몬스터들은 대부분 떨어져 나갔고 고위 등급의 몬스터들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간혹, 엄청난 경험치를 축적해 레벨업한 저등급 몬스터가 고위 몬스터를 죽이고 위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 아비규환의 난투장 중심에는 선그라스를 낀 흰 도마뱀 하나가 마이크를 쥔 채 흥겨운 EDM에 맞추어 MC를 보고 있었다.

<흰 용 ‘프란츠’> -등급: S / 특성: 용, 싸움광, 자폭, 싸움 나락, 회고록(回顧錄), 야수, 뺑소니, 1:1

-서식지: 싸움 나락

-크기: 2m

-흰 용들은 타고나길 전쟁광, 싸움광으로 태어난다.

그들의 삶은 곧 투쟁 그 자체이며 그것은 알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곧바로 시작되는 것이다.

흰 비늘, 흰 날개, 흰 꼬리, 흰 뿔.

한 눈에 봐도 화이트 드래곤으로 보인다.

놈은 등에 맨 커다란 기타를 고쳐 메며 유쾌한 어조로 마이크를 잡았다.

[네! 오늘도 싸움광 프로듀스 101은 평화롭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행운의 몬스터가 최후 생존이라는 영예를 거머쥘 수 있을까요?]

MC는 저 아래 6시 방향의 경기장을 들여다보며 웃어젖힌다.

[오오! 역경을 딛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이름없는 여왕’이 ‘교활한 베놈피온’을 죽이고 상위 리그로 도전합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저등급 몬스터라도 경험과 실력을 갈고닦아 원래라면 이기지 못했을 적을 죽여 명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흐리멍텅한 평화로 점철된 바깥과 달리 이곳에는 도전과 싸움의 기회가 계속 주어지니까요!]

MC는 긴 창에 꽂혀 죽은 거대 전갈을 바라보며 잔뜩 흥분한 어조로 날개를 쫙 펼쳤다.

[이 죽음의 토너먼트에서 최후까지 생존한 1인은 싸움 나락의 ‘챔피언’에게 도전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혹은 그냥 바깥세상으로 되돌아가도 상관없어요!]

생각보다 이 던전의 클리어는 간단하다.

이 무작위 생존경쟁에서 승리해 최후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바깥으로 나가거나 챔피언에게 도전할 수 있단다.

‘……그 챔피언이란 건 아마도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겠지?’

나는 이 거대한 혼돈 속 몬스터들을 쭉 돌아보았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랜덤으로 정해지는 대진표에 따라 1:1 승부를 펼치고 상대를 죽인 뒤 위로 올라간다.

그 끝에는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문,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 도전할 수 있는 문이 존재했다.

“마치 고독(蠱毒) 그 자체네.”

수많은 독물들을 폐쇄된 공간에 가두어 가장 독기가 강한 괴물을 선별하는 작업.

아마도 무투룡 카프카타렉트는 자신을 만족시켜 줄 정도로 강한 파이터를 길러 내어 직접 부숴 버리는 것이 취미인 모양이다.

과연 미친 싸움광다운 취미.

“…이래서 그때 형 누나들이 무투룡이 제일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했었구나.”

머릿속에 선배들의 조언이 떠오른다.

‘자, 사실 어떤 존재가 제일 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할 것 같네. 하지만… 어떤 존재가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의견 통일이 명확하게 가능할 것이라고 봐.’

‘음, 하긴. 답이 정해져 있긴 하지. 사실 뭐니뭐니해도 제일 싸우기 싫은 건 ‘그 녀석’이잖아?’

‘다들 불가살(不可殺)이네 난공불락(難攻不落)이네 괴력난신(怪力亂神)이네 해도… 그것만한 사기 몬스터가 또 없지.’

화이트 드래곤, 무투룡(武鬪龍) 카프카타렉트.

이놈은 지금껏 플레이어가 잡아왔던 모든 몬스터들을 죄다 소환하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고유의 패턴인 1:1 격투대전액션 시스템스러운 상황이 계속 조성되니만큼 아주 터무니없는 난이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극악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충분하다.

“젠장, 지금까지 잡았던 몬스터들을 다 다시 상대해야 하는 건가?”

누군가는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다 한 번씩 잡았던 몬스터인데 뭐가 문제냐고.

하지만 지금까지 잡아 왔던 몬스터들 중에는 분명 파티 사냥으로 쓰러트린 놈도, 우연한 행운으로 인해 잡았던 놈도, 꼼수와 버그를 이용해 잡았던 놈도 있다.

심지어 나는 워낙에 저렙일 때부터 말도 안 되게 강한 몬스터들만을 골라 잡아 왔기 때문에 그 난이도가 더더욱 극악으로 조정되고 있었다.

[그-워어어어억!]

[크-크크크크큭!]

해저왕 플라튠의 얼굴을 한 ‘심해 스토커 씨아블로’가 강력한 촉수를 뻗어 ‘배드엔딩 강철뱀’을 휘감아 조인다.

위험등급 A급 정도인 강철뱀은 그동안 수많은 저렙 몬스터들을 죽여 오는 과정에서 많이 레벨업했는지 S급 몬스터인 씨아블로의 공격에도 버텨 내고 있었다.

MC가 외쳤다.

[히-하하하! 세계는 위협으로 가득하고 타인들의 시선은 끝나지 않는 소송처럼 나를 괴롭힌다!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삶이란 곧 투쟁! 세상은 곧 전장이죠! 싸우십쇼! 죽이십쇼! 위로 올라가십쇼! 그것이 곧 인생입니다! 그리고 제일 높은 자리에서 선택하십쇼! 원래 세상으로 금의환향할 것인지! 아니면 무(武)의 극의에 올라 있는 챔피언과 일전을 겨뤄 볼 것인지!]

광기 어린 EDM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흰 용 프란츠가 연주하는 일렉기타의 헤드 부분에서 흰 불길이 뿜어져 나온다.

지징징징징… 화르륵!

그럴수록 싸움 나락의 수많은 경기장 속 전투들은 더욱 더 뜨거워져 가고 있었다.

9시 방향에서 A+급 몬스터인 어둠 대왕이 막 하린마루의 목을 양손에 쥐었다.

…뿌지직!

S급 몬스터인 하린마루의 모가지가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간다.

아주 일찍이 이곳 싸움 나락에 떨어져 그동안 수많은 적들을 죽여 온 어둠 대왕.

그는 하린마루의 머리통을 한 손에 들어 보이며 오연하게 섰다.

[나는 어둠 대왕, 왕 중의 왕. 너희 용자들아, 고개를 들어 나를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하지만 어둠 대왕의 대사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푸푹!

시뻘겋게 달아오른 쌍검이 뒤에서 날아들어 어둠 대왕의 심장과 뒤통수를 뚫고 박힌 것이다.

[그르르륵…]

데모고르곤! 그 무서운 데모고르곤!

마몬의 부관으로서 만마전 서열 2위를 차지하고 있던 이 고대의 악마가 어둠 대왕을 죽이고 순식간에 상위 리그로의 도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너머의 경기장에서는 칠흑의 중장갑을 두르고 있는 데스나이트 ‘킹 아서’가 크라켄의 거대한 몸을 토막 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대의 악마 데모고르곤과 데스나이트 킹 아서가 상위 경기장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그-아아아아악!]

[캬오오오오오!]

[크르륵! 끄륵!]

수많은 경기장 곳곳에서 광기 어린 단말마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두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고 독기도 그만큼씩 짙어진다.

*       *       *

“흐음, 저 대회에 어찌 출전하지?”

나는 무저갱 바닥에서 위의 경기장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기에 참가하고 싶으면 아무래도 ‘출전권’이라는 것이 필요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리그가 시작되어 버렸기에 뒤늦은 참가는 요원해 보인다.

내가 중간에 난입하게 되면 형평성에 어긋나게 되기 때문인 듯했다.

그때.

“푸스스스- 이봐 너 저기에 뛰어들 생각이야?”

조디악이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디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눈에는 어떤 몬스터들이 저기 위에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만 빠지는 게 좋을 것 같군.”

아마 나와 조디악의 눈에는 서로 다른 몬스터들이 보이고 있는 듯하다.

“푸스스… 여기서 이만 갈라지자구 친구. 나는 따로 목표로 하고 있는 게 있어서 이만.”

조디악은 리그 불참을 선언한 뒤 무저갱의 어둠 저 너머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어차피 출전권이 없는 이상 별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나는 이제 어떡한담?”

여기서 죽치고 있다가 다음 리그가 시작될 때 껴?

하지만 언제 시작될지 알고?

나는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바로 그때.

내가 조디악이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눈앞에 의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 대회에 나가고 싶다면 내 출전권을 양보해 주지.”

낯익은 목소리.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내 앞에 선 이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정체를 내 눈앞으로 훤히 드러내 보인다.

구면임은 물론이요 내가 아주 잘 아는 얼굴.

“뭘 그리 놀라?”

바로 유다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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