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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53화 (653/1,000)
  • 653화 클로즈 베타 테스터 (4)

    시간이 꽤 흘렀다.

    병원 복도에는 핏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시체의 언덕을 넘어 굽이굽이 흐르는 핏물의 강.

    서로 지친 생존자들이 벽에 붙어 서로를 노려본다.

    십 수 명의 생존자들은 널브러진 시체들과 집기들을 넘어 구석에 붙어 서로를 경계했다.

    [Shit! 저 할망구, 아까 의사랑 간호사 몇 명 죽여서 돌 먹더니 엄청 강해졌네. 자기 간호해 준 사람 죽여서 살아남으니 좋수? 다 늙어서 웬 욕심이래?]

    [저저 말버릇 좀 봐! 젊은 놈이 노인을 공경할 일이지! 그리고 늙었다고 왜 죽어야 해!? 이 나라를 누가 세우고 이끌었는데!]

    [젠장! 비서관! 왜 전화를 안 받아! 오늘 국회에 출석하는 날인데! 빌어먹을 개돼지들이랑 이렇게 치고받을 때가……]

    선량하거나 심약한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들은 남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이들뿐이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스탯의 정수로 인해 다들 강해져 있기에 싸우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졸졸졸-

    복도 중앙에 흐르던 핏물은 어느덧 맑은 물로 바뀌어 있었다.

    정수기가 터졌는지 저 위에서부터 흘러내린 맑은 물이 핏물을 밀어내고 복도 바닥을 흐른다.

    눈치를 보던 생존자들은 그제야 갈증을 느끼고 바닥을 흐르는 물을 손으로 떠 마셨다.

    구석에 숨어 있던 사람들 역시 눈치를 보며 나와 하나둘씩 물을 마신다.

    호로롭-

    다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갈증을 푸는 동안만큼은 유혈사태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지독한 가뭄 속에서는 사바나의 짐승들도 물가에서 서로 싸우지 않듯.

    그때.

    -띠링!

    생존자들의 눈앞에 상태창 하나가 떠올랐다.

    <두 번째 미션: 가장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끼친 자>

    ※보상: 스탯의 정수 100개(랜덤).

    ……순위 집계를 시작합니다……

    모든 생존자들이 기이한 열망을 담아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1등을 하면 일반인의 10배 정도 되는 전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머지 이들의 공격에 당할 염려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역습을 가해 돌을 빼앗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두 번째 미션; 가장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끼친 자>

    ※보상: 스탯의 정수 100개(랜덤).

    순위 집계가 완료되었습니다!

    1위(보상 대상자): <고인물> - 누적 피해인원 72명.

    1위를 한 사람은 복도에 살아남은 이들 중 그 누구도 아니었다.

    [뭐야!? 고인물이 누구야!]

    [말도 안 돼! 72명이면 여기 살아남은 사람들 전원인데!?]

    [나는 단 한 대도 맞은 적이 없는데 나한테 어떻게 피해를 줬다는 거야!]

    생존자들이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밑에 2위를 한 사람의 기록이 21명, 그 밑에 3위를 한 사람은 7명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흥분하고 예민한 상태라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것은 곧 생사결을 의미한다.

    그냥 상대방을 한 대 쥐어박고 끝낼 수는 없는 상황인지라 사실 한두 명의 기록만 세워도 많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7명이라는 기록을 세운 사람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21명이라는 숫자도 굉장하다.

    …하지만, 72명이라는 숫자는 아예 믿겨지지가 않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72라는 숫자는 여기 살아남은 사람 전원에 필적할 만한 레코드.

    그러니 생존자들이 집계에 반발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야! 이 중에 72명이나 죽인 놈은 없다고!]

    [장난해? 해명하란 말야!]

    [짜고 치는 거 아냐!?]

    복도에 불만 여론이 들끓는다.

    하지만 도깨비 가면을 쓴 사람들은 그들의 불만에 눈곱만큼도 반응하지 않았다.

    [호호호, 뭔가 오류가 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72라는 수치는 너무 과한데?]

    다만 그들 역시도 의아해할 뿐이다.

    그러나 도깨비 가면을 쓴 이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약속대로 보상을 지급했다.

    …파앗!

    이윽고 허공에 100개의 돌이 생성되었다.

    -<스탯의 정수-민첩의 돌> / 재료 / ?

    쥐고 있으면 몸이 날렵해지는 신비한 돌.

    100개나 되는 민첩의 돌이 허공을 움직여 날아간다.

    그 방향은 바로.

    졸졸졸-

    물이 흘러내려오고 있는 복도 상층부, 터진 정수기가 있는 곳이었다.

    *       *       *

    “오, 민첩. 웰컴.”

    나는 내 쪽을 향해 날아오는 민첩의 돌 100개를 감사한 마음으로 집어삼켰다.

    이제는 아무런 아이템을 걸치지 않아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겠다.

    아이템을 걸친다면야 뭐, 더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민첩의 돌을 빠르게 주워 먹은 뒤 고개를 들어 상태창을 보았다.

    1위(보상 대상자): <고인물> - 누적 피해인원 72명.

    내가 1등을 먹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피해라는 것은 단순히 신체에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만이 아니거든.’

    두 번째 미션의 내용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는가이다.

    다들 예민한 상태이기에 조금만 스쳐도 칼부림이 나는 상황에서 피해를 입힌다는 것은 곧 죽인다는 말이나 다름없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게임 속의 피해라는 개념에는 단순히 데미지 말고도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가령 ‘상태이상’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나는 미션이 시작되는 즉시 정수기 파이프를 터트렸다.

    그 다음으로 한 행동은 정수기 물에 대고 오줌을 싸는 일이었다.

    맹독을 머금고 있는 내 깎단을 물에 접촉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잔인하니까.

    ‘경미한 피해라도 상관없다. 최대한 많은 불특정다수에게 피해만 입힐 수 있다면.’

    내가 소변을 본 물은 병원 복도의 중앙을 가로질러 물줄기를 형성했고 오랜 싸움에 지친 병원 사람들은 다들 한 번쯤은 그 물을 마셨던 것이다.

    ‘이거 맛이 왜 이래?’라고 투덜거리면서.

    “미안해요 다들. 하지만 어차피 허상이니까 상관없지?”

    많은 사람들이 식수로 음용하는 물에 소변을 본 것은 배덕감 넘치는 일이지만… 어쩌랴? 지난 세상의 룰은 다 잊어버리라는데.

    한편. 내 행동을 본 도깨비 가면들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이거 우리가 한 수 배워야겠는데.]

    [다 같이 먹는 물에 오줌을 싸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네.]

    [호호호, 뭐 아무튼. 오늘 치 누미노제는 다 추출했으니 이만 할까?]

    [내일은 조금 더 많이 추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이번 달 할당량 맞추려면 빠듯해.]

    그러던 끝에, 한 도깨비 가면 여자가 입을 열었다.

    [클로즈 베타 1일차, 성공적으로 마무리. 2일차부터 미션 3으로 재개하겠음.]

    누구에게 보고하는 것일까?

    이윽고 도깨비 가면들은 나타났을 때처럼 갑자기 포탈을 열고는 그 자리에서 종적을 감춰 버렸다.

    “…호오?”

    나는 도깨비 가면들의 대사에서 꽤나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누군가의 하수인이고 통칭 ‘클로즈 베타’라는 이 일련의 시험장에서 무언가를 실험하고 있다는 것을.

    ‘근데 누미노제가 뭐지? 이 사람들은 누구고.’

    그것이 문제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게임 속 세상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것일까?

    애초에 진짜 사람이긴 한 걸까?

    나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시체들을 피해 조심조심 병원 복도 벽에 붙어 걸었다.

    그때.

    [흐엉, 헝, 흐아아앙. 엄마! 엄마! 나 좀 살려 줘! 엄마아아!]

    커다란 덩치의 한 남자가 병원 창문을 마구 내리치며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근력의 돌을 많이 섭취한 탓인지 육체는 매우 크고 우람하게 부풀어 있었지만 싸움 도중 머리를 잘못 맞았나 정신연령이 애기가 되어 버렸다.

    그가 내리치고 있는 병원의 창문은 강철벽이라도 된 듯 단단하다.

    자세히 보면 얇고 투명한 벽이 이 층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가 주먹을 한번 내리칠 때마다 아크릴 필름이 떨리듯 옅은 파문이 대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으아아앙! 엄마아!]

    남자가 투명한 벽을 계속 내리치고 있을 때.

    츠츠츠츠…

    갑자기 그 벽이 사라져 버렸다.

    -띠링!

    <일일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장벽’이 뒤로 밀려납니다>

    <활동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병원 4층을 감싸고 있던 벽이 사라졌다.

    [만세! 살았다! 엄마아아!]

    덩치 큰 남자는 반색을 하며 비상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그가 투명한 벽이 있던 곳을 넘어 4층을 벗어나려는 순간.

    …푹!

    시체더미 속에서 튀어나온 은색의 무언가가 남자의 목에 박혀들었다.

    […어?]

    남자는 목에 박힌 쇳조각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수술용 메스였다.

    [어어? 어? 엄마?]

    남자는 자기 목을 감싸며 허우적거렸지만 이미 분수처럼 뿜어지고 있는 피를 막을 도리가 없다.

    …땅그랑! …땅그랑! …땅그랑!

    결국 그는 병원 복도 바닥을 뒹굴었고 차디찬 핏물과 함께 붉은 돌 서른 개 남짓을 떨궜다.

    […푸스스스스.]

    이윽고, 비상구 옆 시체더미 밑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덩치 큰 남자가 떨어트린 붉은 돌 수십 개를 남김없이 쓸어가는 남자.

    그는 검은 머리, 흰 피부에 눈 밑으로 짙은 다크서클을 드리우고 있다.

    나는 놈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이번 종합평가에서 2등을 한 녀석.

    2위: - 누적 피해인원 21명.

    조디악 번디베일.

    피로 물든 흰 가운에 메스를 든 그가 나를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어? 너 왜 여기 있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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