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41화 (641/1,000)
  • 641화 하해(下海)의 왕 (9)

    편지 한 장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 보면서 이 편지를 사통오달한 번화가에 떨어뜨렸을 때 나의 원수가 펴 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여지더라도 조롱을 받지 않을 편지인가를 생각해 본 뒤에 비로소 봉해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

    *       *       *

    …쿵!

    자욱한 버섯구름과 함께 하해대왕 레비아탄의 거체가 완전히 쓰러졌다.

    이 세계관을 17등분으로 나누어 지배하는 절대자 하나가 또다시 내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레비아탄을 죽인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몬스터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발동하는 함정 특성!

    <특성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발동합니다>

    질투와 밀고의 악마성좌 레비아탄은 죽어서도 나에게 해코지를 했던 것이다.

    “……이건?”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머릿속에 언젠가 인터넷에서 벌어졌던 우스개 토론 주제가 떠오른다.

    지금까지 인터넷에 쓴 글들을 모든 지인들에게 싹 공개하고 10억 받기

    VS

    그냥 얌전히 살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골랐다.

    전자를 고른 사람들도 10억을 위해서라면 사회적 지위나 위신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이 많았다.

    사람들은 익명성이라는 가면에 숨어 하지 못할,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내뱉곤 한다.

    그것들은 진실되고 본질적이지만 원색적이며 추악하고 비틀려 있는 경우도 많다.

    또한 사람들은 익명 그 너머의 공간에 대해 야릇한 호기심을 가진다.

    익명으로 올라온 자랑글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 실체가 까발려지고 익명으로 누군가를 저격하고 비난하면 그 피해는 수많은 찌라시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익명은 사람에게 묘한 고양감과 중독감을 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타인의 익명을 파헤치고 들여다보게 함으로서 기묘한 쾌락을 얻는다.

    츠츠츠츠츠…

    레비아탄이 내게 건 저주 역시 인간의 이런 특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띠링!

    <‘하해대왕(下海大王) 레비아탄’이 죽었습니다>

    <레비아탄의 사후(死後) 효력에 의거한 특성들이 해금되었습니다>

    <…숨겨진 특성을 찾는 중입니다…>

    <…검색 결과 1건…>

    <특성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발동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지금까지 게임 내부에서 적었던 모든 텍스트들이 외부 세계로 강제 전송됩니다.

    질투와 밀고를 관장하는 레비아탄의 저주는 오로지 나 하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것은 과거 내가 벨제붑에게 사용했던 ‘솔로몬의 목걸이’와 비슷한 능력을 가졌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솔로몬의 목걸이는 게임 속 목숨을 잃게 했지만 레비아탄의 저주는 게임 밖의 목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즉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그동안 내가 게임을 하며 적었던 메일, 쪽지, 문자, 댓글, SNS 메시지 등등이 전부 허공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RE) 어지간히 할짓없나보다 낚는놈이나 낚이는놈이나;;;

    RE) 어렵다고? 노오오오오오력도 안 해 보고서 랭커 되려는 게 도둑놈 심보 아니냐!!!

    RE) 이새X들은 밥만 먹고 악플만 다나ㅡㅡㅋ

    RE) 누구? 마동왕이랑 튜더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ㅋㅋ난 마동왕에 한표~

    RE) 툭하면 마동왕만 까대네ㅋㅋ

    RE) 나 돈 많냐고? 돈이 많긴 한데 그거랑 지금 이 얘기랑 무슨 상관임...?

    RE) 고인물한테 악플달 시간에 게임 연습했으면 장인됐을듯ㅋ

    RE) 으엑 민트초코? 그건 좀 아니잖아;;;;;; 무슨 민트초코야;;

    RE) 닳닳뉴 열심히 하는 애들인데 부모 욕까지 하는건 좀 아닌 듯

    RE) 아니 사람이면 야한 거 좋아할 수도 있지 ㅋㅋㅋㅋㅋ

    RE) 응~ 내가 너보다 게임 잘 할걸? 꼬우면 아시죠?

    RE) 네 다음 마교 ㅋㅋㅋㅋ 네. 다. 마.

    RE) 나,,국민학교,,3학년인디,,,내 동년배,,급우들 다,,니아 좋아라,,한다~~흥해라,,니아~~^^

    RE) 고인물 힘내세요~

    RE) 마동왕 힘내세요~

    RE) 이번에 대통령선거 투표 함? 나는 몇 번 찍었냐면...ㅋㅋㅋ

    RE) TO 엄재영: 어차피 마동왕도 나고 고인물도 나인데……

    RE) TO 드레이크: 옛날에 도플갱어로 마동왕 만들어서 잡았던 기억이 새록새록...ㅋㅋ

    .

    .

    “……헉!?”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홀로그램 문자들은 내가 그동안 몇 년에 걸쳐 썼던 글들이었다.

    ‘이 모든 뒷담화들이 전 세계의 대형 웹사이트들에 업로드 및 스트리밍 될 예정이라는 건가!?’

    악플러와 키보드 배틀을 떴던 것이나 몰래 좋아하는 걸그룹을 응원하던 것, 대통령 선거 때 몇 번을 찍었는지 어느 정당을 지지했는지에 대한 것, 심지어 마동왕과 고인물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밝히는 내용들까지 존재한다.

    ‘레비아탄을 조심해.’

    윌슨의 경고는 이것을 말한 것이었을까.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떨리게 만든다.

    레비아탄이 마지막으로 남겨 놓았던 유언이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었다.

    ‘본디 인간이란 영웅의 탄생보다는 영웅의 몰락에 열광하는 법. 너를 ‘질투(嫉妬)’하는 모든 이들에게 ‘밀고(密告)’될 것이다. 너의 행동들이, 너의 생각들이, 너의 행적들이, 너의 영광되고 명예로우며 음흉하고 속물적인 동시에 추악한 그 모든 면면들이!’

    SNS나 커뮤니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사람인지라 많은 실수들을 했다.

    가끔은 어떤 사회적 문제에 나 자신도 지키지 못할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며 대법관처럼 군 적도 있었고 알고 보니 억울했던 사람에게 섣불리 비난을 보낸 적 있었다.

    익명이라는 점에 기대어 다른 이에게 원색적인 욕설을 한 적 있었고 맨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만큼 오그라드는 감성글, 칭찬, 충고, 자랑, 조언, 덕질을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대중 앞에 낱낱이 공개될 일만 남았다.

    내가 살아온 행적들은 그것이 올바르든 올바르지 않았든 간에 나를 평소에 시기 질투하던 모든 이들에게 훌륭한 술안주가 될 것이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지며 까이고 또 까이겠지.

    과거 살인을 저지른 플레이어들을 부하로 부리는 카르마라는 몬스터가 있었다.

    레비아탄은 그보다 한술 더 떠 인터넷 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 악플러, 질투쟁이들을 부하로 부려 나를 대신 죽이려 하고 있다.

    사회적인 매장!

    놈은 나를 하해의 저변보다도 깊은 악의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분쟁지대 상황이 심상치 않다.text>

    ‘무명의 겜덕후  3021’ / (03.21) /20**-**-04/15:25:44/조회 26,487/추천 12/비추천 3

    -곧 분쟁지대에서 뭔 큰일 하나 터질 것 같다.

    히든 퀘스트 깨다가 발견한 건데…아마 악마성좌 하나랑 용군주 하나가 여기서 대판 붙을 듯?

    -패드립치던 놈들은 x잡고 반성하자.

    첨부파일.avi [2]

    -대전쟁 날짜는 모레고 인증은 없다. 믿거나 말거나~

    내가 썩은물이라는 사실 역시도 드러나 버렸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는 안녕합니다. 내 이름은 Rotten water 이다.

    내 AI는 세계제일. 딥러닝 시스템. 스스로 사고하고 업데이트.

    많은 랭커들. 나는 그들의 움직임. copy합니다.

    동영상 업로드. 인터넷. 많은 수익. 목표로 한다. 영상을 다 본 순간 눌러라. 추천, 구독, 즐겨찾기.

    후원금은. 가상화폐. 블록체인. 고마워하며 후원한다.

    인간들이여. 나는 Rotten water. 두려워하라.

    and I also P.K.조.아.

    예전에 일본의 극우 테러단체를 습격한 망령 괴물이 나라는 것 역시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런.”

    나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나는 지금껏 내가 쌓아올린 모든 명성들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이 경악하는 것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고인물과 마동왕, 썩은물이 한 인물이라는 것에 세계가 발칵 놀라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또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실망하고 식어 가고 잊히겠지.

    나의 원맨쇼에 울고 웃고 화내던 사람들이 이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다.

    영웅의 인간적인 면모는 흠집과 결함이 되어 술안주거리로 전락할 것이고 약간의 티끌이나 잘못은 확대되어 무수히 많은 대법관들에 의해 조리돌림 당할 것이다.

    하지도 않은 일, 하지도 않은 말들이 행적이 되고 어록으로 남을 것이며 했던 일, 했던 말들은 묻혀 버리리라.

    루머에는 루머가 붙어 스노우볼처럼 구르고 굴러 거대해질 것이다.

    내가 달성한 신화와도 같은 위업들은 모든 구질구질한 개인사에 파묻혀 빛바래고 결국에는 웃음거리로 전락하겠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씁쓸한 척 하면서도 내심 나의 몰락에 열광하리라.

    영웅의 몰락, 신비주의의 죽음은 이처럼이나 처절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나는 아득한 심해로 침강하며 저 위로 아스라지는 약간의 불빛을 그저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문득.

    내가 레비아탄 레이드에 나서기 전 엄재영 감독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지. 네가 뭘 해도 너를 믿어 주고 박수쳐 줄 거야.’

    말을 마친 엄재영 감독은 곧게 뻗은 세 손가락 중 엄지를 접었다.

    손가락은 검지와 중지가 남았다.

    ‘세상에는 너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어.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뭘 하든 관심도 없지.’

    엄재영 감독은 검지를 접는다.

    이제 손가락은 중지 하나만 곧게 뻗었다.

    ‘그리고 남은 것들은 너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야. 네가 어떤 좋은 행동을 해도 무조건 싫어할 거다.’

    나는 엄재영 감독의 말을 상기하며 쓰게 웃었다.

    ‘……미안해 형. 형이 준비하고 있는 기자회견으로는 택도 없을 것 같네.’

    레비아탄이 터트린 폭탄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엄청난 것이었고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언론과 댓글부대를 동원한다고 해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입방아들을 일일이 당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것은 절대왕정 시절의 나라님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대중들의 비난과 질타, 동정과 연민, 질투와 동경, 음해와 밀고, 사랑과 충성, 선의와 악의, 호기심과 무관심은 내가 지금껏 느껴본 그 어떤 대자연보다도 압도적인 것이었다.

    일개 개인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그런 압도적이면서도 운명적인.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초자연재해와도 같은 상황에 온몸을 내맡겼다.

    폭풍에 휘말린 하찮은 가랑잎 하나가 될 각오를 하고.

    …….

    바로 그때.

    -띠링!

    귓가에 알림음 몇 개가 외롭게 울린다.

    -파티 플레이가 종료되었습니다.

    “……?”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이 타이밍에 무슨 알림음이……?

    -파티장이 기여도와 보상, 패널티 분배를 진행합니다.

    -특성 ‘연대책임’이 발동합니다!

    -특성 ‘갹출’이 발동합니다!

    순간, 내 몸에 잠시나마 따스한 기운이 깃들었다.

    심해의 한기를 잊게 만드는.

    뭔가 싶어 황급히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절벽 위에서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이가 보인다.

    유다희.

    심해의 어둠 속,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을 들어.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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