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40화 (640/1,000)
  • 640화 하해(下海)의 왕 (8)

    너는 알몸으로 레이드를 돌 수 있느냐?

    중요 부위를 끈으로만 가릴 수 있느냐?

    코에 코뚜레를 하고 턱수염을 핑크로 물들일 수 있느냐?

    팬들로 하여금 덕질을 하게 하고 악플러들이 악플을 달게 할 수 있느냐?

    그 살가죽에 마사지 젤을 바르고, 머리에 꽃을 꽂을 수 있느냐?

    뉴비라면 손바닥으로 만져만 보아라.

    버스를 태워 보스방 끝까지 데려가 주리라.

    무시무시하고 덜렁덜렁한 가랑이 이야기를 어찌 빼놓으랴!

    당당하고 뻔뻔한 저 태도를 어찌 공연음란죄로 신고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겹으로 입은 그 겉옷은 누가 벗기기도 전에 알아서 벗겨졌다.

    누가 그에게 19금 딱지를 붙이겠느냐, 29금도 모자라리라.

    줄지어 선 저 고른 치열.

    안 입은 옷 때문에 훤히 보이는 등가죽에 적당히 말랑말랑한 군살.

    재채기 소리에 덜렁덜렁, 아 물론 코에서 늘어진 콧물 이야기이다.

    레이드를 앞두고 벌름거리는 저 콧구멍은 자신이 있다는 증거로구나.

    두 손에 쥐어진 변태 단도, 오로지 도트 데미지만으로 먹고 사는 이 고인물을 보아라.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거북목, 그 앞에서 보스들은 절망에 흐느적거릴 뿐.

    뗄 수 없이 마구 얽혀 피둥피둥한 저 게임 플레이 시간을 보아라.

    바위같이 단단하게 뭉친 승모근, 맷돌 아래짝처럼 튼튼한 엉덩이 굳은살.

    칼은 물론이요, 창이나 표창, 화살 따위도 주 무기처럼 다룬다.

    배달음식을 집밥인 양 시켜먹고 마일리지를 현금인 양 쌓아 버린다.

    피시방, 캡슐방을 제집처럼 여기며 셧다운제 따위에는 코웃음 친다.

    뱃가죽은 아재의 상징과도 같아 타작기에 얻어맞은 밀가루 반죽마냥 늘어졌다.

    번쩍 하고 게임에서 탈주하는 저 모습, 혼자 죽기 싫다고 아군까지 물귀신처럼 끌어들인다.

    오랫동안 켜진 게임기를 솥처럼 끓게 하고 어머니 마음을 기름가마처럼 부글거리게 하는구나.

    게임 속의 그 누가 그와 겨루랴.

    계정을 생성할 때부터 도무지 두려움을 모르는구나.

    모든 랭커들과 GM들이 그 앞에서 쩔쩔매니.

    …보아라!

    모든 변태 고인물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

    -『엽기』 41:6~19-

    *       *       *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레비아탄을 바라보았다.

    불타고 있는 몸, 멀어 버린 두 눈, 군데군데 찢어지고 구멍난 지느러미, 깨지고 부서진 비늘,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살점, 훤히 드러난 뼈와 내장.

    이것이 고정 S+급 몬스터, 질투의 악마성좌, 하해의 왕 레비아탄의 현 주소이다.

    그동안 놈은 곰치 네 자매에게 습격당했고 에이햅과 이스마엘의 작살 공격을 받았으며 데스웜에게 몸의 일부를 찢겼다.

    나는 마몬의 힘으로 놈의 뿔을 쪼개 버렸으며 깎단과 벨제붑의 역병, 오즈의 죽음비늘에서 기인하는 막대한 양의 도트 데미지까지 먹여 주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레비아탄이 과거 마몬과 불사조에게 입은 피해로 인해 최대 체력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이제 엔드 게임(End game)이다.”

    눈앞에 있는 질투의 악마성좌 ‘하해대왕(下海大王) 레비아탄’을 향해, 나는 선고를 내렸다.

    사형(死刑).

    나는 불완전변태 모드를 가동시키는 것도 모자라 몸속에 흐르는 야수와 싸움광의 피도 깨워 냈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발록과 데모고르곤 특유의 흉폭성이 내 오른팔에 깃든다.

    마동왕 메타와 고인물 메타의 콜라보, 핵융합의 산출값과도 같은 폭발력, 거기에 유다희가 걸어준 버프까지!

    상황은 완벽하다.

    “어디 한번 죽여 봐라!”

    나는 HP 1의 몸으로 전진했다.

    레비아탄은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맹렬히 돌격해 왔다.

    [그아아아아아!]

    이윽고, 레비아탄의 거대한 아가리가 나를 향해 짓쳐든다.

    수없이 많은 칼침들이 나를 분쇄하려 들고 있었다.

    그러나.

    …퍼퍼퍼퍼퍽!

    나는 레비아탄의 이빨 세례에도 죽지 않는다.

    ‘앙버팀’과 ‘나약한 갑각’의 조화.

    데미지가 들어와도 앙버팀 특성에 의해 HP가 1 남은 상태로 살아남는다.

    애초에 최대 체력이 1이니만큼 앙버팀은 무한히, 영원히 발동된다.

    레비아탄의 막강한 데미지도, 하해의 자잘한 지형데미지도.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모든 데미지 자체에 면역인 몸!

    이른바, 죽여도 죽지 않은 망자(亡者)다!

    ‘패치되어서 사라지기 전까지 알차게 써먹어 주지!’

    나는 죽음룡 오즈의 비늘을 빳빳하게 세웠다.

    먹었으니 이제 토해 낼 차례다.

    우-지지지지직!

    반투명한 반사 데미지들이 벼락처럼 줄기줄기 뿜어져 나간다.

    어떤 것은 이빨의 모양으로, 어떤 것은 물을 밀어 파동의 모양을 그리며.

    하지만 하나같이 육중한 무게를 실어 레비아탄의 몸을 두드리는 것은 똑같다.

    퍼퍼퍼퍼펑!

    레비아탄은 부러진 이빨과 살점, 핏덩이를 토해 내며 몸부림쳤다.

    나는 뒤로 나가 떨어지는 레비아탄의 뿔 절단면의 끝에 킬 체인을 걸어 다시 내 쪽으로 오게끔 잡아당겼다.

    그리고.

    …쾅!

    대지진의 힘이 깃들어 있는 마몬의 망치 주먹이 레비아탄의 머리통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쿠르르릉!

    레비아탄의 머리를 부서질 듯 휘었다가 그대로 뚝 떨어져 해저의 단단한 암반을 들이박았다.

    천천히 침몰하는 레비아탄의 몸뚱이.

    “이제 끝을 보자. 아몬틸라도 같은 놈아.”

    나는 온 힘을 마몬의 건틀릿에 집중했다.

    거대한 지진을 일으켜 이곳의 지형을 한 번 더 뒤집어 엎을 생각이었다.

    하해대왕(下海大王)은 이로서 완전히 수장(水葬)되리라.

    ……바로 그때!

    [큭큭큭큭.]

    자욱한 진흙구름 아래,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레비아탄!

    놈은 지면 위에 배를 드러내고 널브러졌다.

    물고기가 죽어 갈 때가 되면 수면 위로 배를 까뒤집듯, 검은 등가죽과 대조되는 허연 뱃가죽을 위로 띄운 채, 이 하해의 대왕은 음울하게 웃어대고 있는 것이다.

    “뭐가 웃기지?”

    나는 레비아탄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할 줄만 알았던 이 괴물 고래는 이제 한낱 피식자가 되어 내 발밑에 배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놈은 끝났다. 나에게 패한 이상 이 세계의 정점에 군림할 자격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아탄은 나를 향한 적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듯한, 포식자 특유의 어떠한 여유, 타고난 자신감 같은 것이 아직 놈에게는 남아있다.

    그 자신감의 근거가 궁금했기에, 나는 녀석에게 한 번 더 물었다.

    “뭐가 웃기냐고.”

    그러자, 비로소 레비아탄이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자욱한 진흙구름 속, 놈의 피부에서 배어나오는 기름의 향기 한층 더 짙어진다.

    작살이 틀어박힌 외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가 바다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인간이여.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기보다는 그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는 것으로 반응했다.

    레비아탄의 몸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기세가 사그라든다.

    부글거리며 끓던 바닷물도 숨을 죽이고 레비아탄의 마지막 유언을 경청하는 듯하다.

    [나를 죽이는 대가는 실로 막대하도다. 실로 막대하고도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동시에, 작살이 꽂혀 있던 레비아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시뻘건 빛을 뿜어내는 외눈이 진흙구름을 뚫고 그 너머의 나를 정확히 꿰뚫어본다.

    [인간 주제에 감히 나에게 맞서 작살을 꽂을 정도라면…… 필시 네놈은 네 종족 가운데에서는 대단한 존재로 추앙받고 있겠지.]

    레비아탄이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 속, 무의식의 저변이었다.

    [너는 영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 너를 찬양하는 이들의 저 너머에는 너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음해하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디 인간이란 영웅의 탄생보다는 영웅의 몰락에 열광하는 법.]

    부글거리는 물거품들이 점점 잦아든다.

    레비아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름이 점점 말라붙음에 따라 하얀 불길도 꺼져 가고 있었다.

    놈의 생명이 다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레비아탄의 목소리는 작아질지언정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너를 ‘질투(嫉妬)’하는 모든 이들에게 ‘밀고(密告)’될 것이다. 너의 행동들이, 너의 생각들이, 너의 행적들이, 너의 영광되고 명예로우며 음흉하고 속물적인 동시에 추악한 그 모든 면면들이!]

    그렇다.

    레비아탄은 질투와 밀고를 관장하는 악마성좌.

    그 지독스러운 악의는 하해의 심층부보다도 더욱 더 깊은, 마음의 저변(底邊)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저게 대체 뭔 소리야?”

    가만 들어보면 뭔가 심상치 않기는 하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들을 수 없지만 ‘나를 죽이면 너는 X된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나는 내 어깨 위에 앉아 코를 후비적거리는 오즈를 돌아보았다.

    “야, 너는 저게 무슨 말인지 알겠냐?”

    [흥! 원래 악마는 개소리를 짖어대는 것이 주특기지. 괜히 ‘악마의 혓바닥’이라는 표현이 있겠나?]

    이것도 일리가 있는 소리다.

    악마 NPC들이나 몬스터들 중에 궤변이나 거짓말로 플레이어들을 낚는 것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쉽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레비아탄을 조심해.’

    오래 전, 뎀 유니버스의 본사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윌슨의 경고가 아직도 내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저(躊躇)는 저주(呪詛)처럼 내 몸을 굳게 만든다.

    그때.

    “……머뭇거리지 마! 끝까지 가!”

    저 멀리, 유다희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 세계 모든 게이머들이 꿈에 그리는 경지야! 나 같은 범재들을 감히 상상도 못 해왔던……! 오직 너만이 자격이 있는데 뭘 망설여!?”

    유다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마치 꿈에서 깬 듯한 감각을 느꼈다.

    순간 얼굴에 확 와 닿는 차가움. 하해의 물결.

    나는 비로소 눈을 뜨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다 죽어 가는 레비아탄이 저기에 있다.

    그래, 더 이상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여기까지 와서 새삼 무서울 것도 없다. 이제 손을 뻗어 과실을 딸 순간이었다.

    나는 유다희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무서워서 발이 안 떨어지는데. 등 좀 밀어 줄 수 있냐?”

    “……내가 무슨 세신사인 줄 아냐.”

    유다희는 피식 웃으며 중지를 세워 보인다.

    이윽고.

    …콰악!

    나는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그리고 레비아탄을 향해 활강해 내렸다.

    아득한 심해, 하해의 저변.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의 저점으로.

    [오오! 결국 이 하찮은 철장이 놈이……!]

    레비아탄의 멀어 버린 눈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마몬의 주먹이 아로새겨진다.

    그리고.

    …콰쾅!

    하해대왕의 사망을 확인하는 불도장이 찍혔다.

    <레비아탄> -등급: S+ / 특성: ?

    -HP: 0/1,273,062,190

    사망확인서와도 같은 딜 미터기.

    12억에 이르던 레비아탄의 체력이 결국 바닥을 쳤다.

    동시에, 귓가에 요란한 알림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띠링!

    <세계 최초로 ‘레비아탄’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고인물>

    <보상이 지급됩니다!>

    <‘하해대왕(下海大王)’이 쓰러졌습니다>

    <심해의 기름층이 사라졌습니다>

    <‘상해(上海)’와 ‘하해(下海)’의 수위가 낮아집니다>

    <바다의 잔물결들이 모두 잡힙니다>

    <해풍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모든 해변가엔 밀물과 썰물이 사라집니다>

    <해저 화산지대의 화산들이 불을 삼키고 깊은 잠에 빠집니다>

    <전 바다와 호수의 수온이 3도 떨어집니다>

    <※위의 지형 변화들은 앞으로 720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바다 생물들이 ‘고인물’ 님의 업적에 경의를 표합니다>

    .

    .

    레비아탄을 쓰러트렸다.

    동시에 아르파공과 벨럿의 퀘스트 역시도 클리어했다.

    레벨이 올랐고 아이템도 주어졌다.

    “……드디어 끝났군.”

    전신의 힘이 탁 풀린다.

    드디어 길고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또다시 고정 S+급 몬스터 사냥에 성공한 것이다.

    그동안의 피로가 눈 녹듯 풀린다. 아니, 풀린다기보다는 몸 전체가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상태에 빠진다고 해야 하나?

    나는 침전물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띠링!

    귓가에 울려퍼지는 알림음은 아직 이 상황의 종료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해대왕(下海大王) 레비아탄’이 죽었습니다>

    <레비아탄의 사후(死後) 효력에 의거한 특성들이 해금되었습니다>

    <…숨겨진 특성을 찾는 중입니다…>

    <…검색 결과 1건…>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이 세상에는 살아생전엔 아무런 효과가 없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몇몇 희귀한 특성들이 존재한다.

    ……아무래도 레비아탄은 자신의 질긴 목숨줄 뒤에 무언가를 숨겨놓고 있었던가 보다.

    <특성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발동합니다>

    질투와 밀고의 악마성좌 레비아탄.

    놈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발동하는 함정 특성.

    순간, 내 뇌리를 스쳐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레비아탄을 조심해.’

    ……아뿔싸, 이것을 말함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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