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39화 (639/1,000)
  • 639화 하해(下海)의 왕 (7)

    나는 몇 달 전의 상황을 반추했다.

    ‘으음? 어진. 여기 이런 게 떨어져 있군.’

    그것은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이 쓰러진 이후 전장을 꼼꼼하게 살피던 드레이크에 의해 발견되었다.

    ‘나약한 자의 나팔고둥’이라는 이름의 C급 아이템.

    옵션으로는 ‘나약한 갑각’이라는 하급 특성이 붙어 있다.

    과거 그레이 시티의 살인자들인 랠프, 피기, 잭, 로저, 사이먼 등이 발언권을 행사하기 위해 나팔처럼 불던 소라고둥이다.

    겉보기에는 예쁘지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용자의 방어력을 깎아먹는 옵션만 가지고 있기에 사실상 쓰레기 취급받는 아이템.

    그래서인지 히든 피스부터 똥템, 잡템, 장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이 죄다 흘러들어오는 경매장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쓰레기 아이템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고!

    유다희가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아니, 그런 소라껍데기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능력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방어력만 깎아 먹잖아.”

    “나는 더 깎일 방어력도 없어. 알몸이라서.”

    “아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딴 쬐깐한 걸로 뭘 할 수 있는데!”

    “자꾸 쬐깐하다고 하지 마라. 왠지 기분 나쁘니까.”

    뭐, 하지만 유다희의 항의는 합당한 것이다.

    방어력을 약간 깎아먹는 것이 유일한 옵션인 이 조그만 소라껍데기로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악마성좌 레비아탄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

    하지만 나는 이 아이템의 단 한 가지 특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 ‘나약한 갑각’이라는 특성이 의외로 또 골치 아픈 함정 특성이거든.”

    그렇다.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하지만 천하의 하해대왕 레비아탄의 목숨조차 끊어 놓을 수 있는 비장의 특성이 바로 이것이다.

    ‘나약한 갑각’

    ↳직접 공격을 받았을 시 상대방의 체력을 일시적으로 나와 같게 만듭니다.

    ※필드가 ‘심해’일 경우에만 그 효과가 발동됩니다.

    참고로 이 작은 소라고둥의 HP는 단 1이다.

    더도 덜도 말고 1.

    진짜 1/1이라는 소리.

    약해도 이렇게 약해빠졌을 수가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방어 특성(이라기보다는 같이 X되는 특성) ‘나약한 갑각’ 덕분에 이렇게 방어력도 체력도 약한 소라임에도 불구하고 적들에게 공격받지 않고 나름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소라를 눈앞으로 내밀었다.

    “보이냐? 이 소라를 공격하는 순간부터 최대 체력이 1로 변하지.”

    그러자 비로소 유다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오! 함정 특성이 있었나? 마침 여기가 심해잖아! 그럼 레비아탄이 이 소라를 부수는 순간 HP가 1로 변한다는 소리네? 대박이다!”

    레비아탄의 천문학적인 체력이 1이 되는 순간, 놈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소용돌이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와류의 중심으로 빨려들 것이고 내가 걸어 놓은 수많은 디버프들에 의해 자멸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뜻대로 아름답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후후후후… ‘나약한 갑각’인가. 이름을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미물(微物) 소라게가 드물게 남기곤 하는 껍데기로군.]

    레비아탄은 한 눈에 내 손에 들린 아이템의 정체를 간파했다.

    놈은 끓어오르는 기름가마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다에 사는 생물들은 모두 나의 관할 하에 있는 것들이다. 내가 그것들의 능력을 모를 줄 아는가?]

    레비아탄이 뀌는 콧방귀가 바닷물을 부글부글 끓인다.

    눈이 멀 듯한 백열의 화마와 어마어마한 물거품 무리들이 레비아탄의 분노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것은 건드리는 자로 하여금 체력이 극단적으로 떨어지게끔 만드는 물건이지. 나를 비롯한 강한 바다 생물들에게 있어서는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잗다란 것이다만… 하찮은 것은 하찮을 뿐, 결코 무서운 것이 될 수 없다.]

    한 마디로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는 것이다.

    레비아탄은 시뻘건 아가리를 벌려 칼날 같은 이빨들을 드러냈다.

    이내 놈의 혓바닥에 난 출수공으로 수류가 모여든다.

    꼬리의 입수공을 타고 올라온 극저온의 바닷물들이 한 곳에 압축되며 푸른 구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직접 손대지 않고도 그 잡스러운 갑각을 부숴 버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네놈의 나약한 몸뚱아리와 함께 말이야.]

    레비아탄은 또다시 브레스를 뿜어내 소라껍데기를 한 번에 처리할 심산인 것 같았다.

    유다희의 표정이 절망으로 변했다.

    “아아, 다 틀렸어! 레비아탄이 이 아이템의 함정을 간파하고 있을 줄은… 지형 데미지로 인해 간접적으로 부서진다면 아이템 특성이 발동되지 않잖아! 직접 공격을 받아야만 발동하는 카운터 특성이니까!”

    어떻게든 레비아탄이 직접 몸을 움직여 이 소라껍데기를 부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이미 이 소라껍데기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더 이쪽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엄청난 이동속도로 내 주위를 배회하며, 그저 먼 거리를 유지할 뿐.

    물속에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레비아탄을 따라잡아 소라껍데기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알기에 유다희는 체념한 것이다.

    …하지만.

    “뭔 소리야? 누가 이걸 쟤한테 쓴대?”

    나는 소라껍데기를 든 채 피식 웃는다.

    유다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엥? 그럼 그걸 어디에 쓰려고?”

    HP를 1로 만들어 버리는 저주, 그것을 레비아탄이 아니면 누구에게 건단 말인가?

    레비아탄 역시도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멀어 버린 눈 밑의 살을 찌푸린다.

    [벌레 놈! 의뭉 떠는 것도 여기까지다!]

    레비아탄은 이내 나를 향해 극저온의 바닷물을 뿜어냈다.

    말스트룀과 브리니클이 뒤섞여 날아든다.

    그때.

    나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 소라껍데기는 말이야. 남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야.”

    그리고, 이내 내 주먹은 소라껍데기를 향해 세차게 떨어져 내린다.

    “바로 나를 위한 거지.”

    동시에.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뽀각!

    안 그래도 나약하던 갑각이 내 손안에서 가루가 되었다.

    동시에.

    츠츠츠츠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한 함무라비 소라게가 자신의 발악기를 발동시킨다.

    ‘나약한 갑각’ 특성이 발동되며, 내 온몸에서 체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유다희가 기겁해 외쳤다.

    “야 변태!? 너 뭐 하는…!?”

    그녀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어진>

    LV: 93

    HP: 1/1

    예상대로의 결과였다.

    나는 소라껍데기를 직접 공격해 부순 결과 일정 시간 동안 최대 체력이 1로 줄어드는 디버프에 걸려 버렸다.

    [그하하하하하! 더욱 더 별 볼일 없어졌구나! 이제 그만 죽어라!]

    레비아탄이 혼신의 힘을 다해 쏘아 보낸 브레스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나는 그것에 정면으로 피격당했다.

    콰콰콰쾅!

    지형이 통째로 뒤틀린다.

    주변이 꽁꽁 얼어붙었다.

    초토화되다 못해 이제 거의 평지가 되어 버린 협곡지대 위로 자욱한 진흙구름이 피어올랐다.

    [큭큭큭큭… 이번에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레비아탄은 진흙먼지를 바라보며 음침하게 웃었다.

    하지만.

    “쨔잔. 절대라는 것은 없군요.”

    진흙구름을 걷고 나온 것은 바로 나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

    내 기척을 감지한 레비아탄은 기겁했다.

    두 눈이 멀어 있지만 않았어도 분명 안와가 찢어질 정도로 눈을 크게 떴겠지.

    [그, 그럴 리가 없다! 이번에야말로!]

    브레스 쿨타임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레비아탄은 돛과도 같은 지느러미를 꿈틀거려 거대한 해저폭풍을 만들어 냈다.

    무시무시한 수류가 나를 덮친다.

    …철썩!

    드넓은 광역지대를 일격에 초토화시키는 쓰나미!

    […해, 해치웠나?]

    레비아탄은 초조한 듯 중얼거린다.

    하지만.

    “부활 주문 감사요.”

    나는 이번에도 진흙구름을 헤치며 나온다.

    여전히 상처 하나 없는 얄미운 기색으로!

    [마, 말도 안 돼!]

    레비아탄은 경악하여 외친다.

    그리고 그것은 반대편 암초 뒤에 피신해 있던 유다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진짜 미쳤는데?”

    그녀는 어찌나 놀랐는지 잠수복 밖으로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도 모른 채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고정 S+급 몬스터의 공격은 한 방 한 방이 하나의 큰 도시, 혹은 작은 국가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맨몸뚱이로 상처 하나 없이 받아낸단 말인가!

    “그야 뭐. 내 특성 탓이지.”

    나는 내 알몸을 덮고 있는 검은 망토를 들어 보였다.

    -<데스나이트 사자심왕(獅子心王)의 갈기> / 망토 / S

    목을 둘러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갈기.

    그 풍성한 망토를 걸친 자는 모든 이들로부터 거룩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민첩 +5,000

    -이동속도 +50%

    -파괴불가 (특수)

    -특성 ‘앙버팀’ 사용 가능 (특수)

    절대 죽지 않는 언데드, 망자(亡者)의 유품.

    이 망토에 붙어 있는 ‘앙버팀’ 특성은 어떤 엄청난 공격을 당해도 절대 한 방에 죽지 않게끔 1의 체력을 남기게 해 주는 패시브 스킬이다.

    이 스킬이 발동되기 위해서는 첫째, 들어오는 데미지가 무조건 최대 체력 이상이어야 하며 둘째, 피격 시 최대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여야만 한다.

    지금 현재 나의 최대 HP는 1.

    지금 현재 내가 유지하고 있는 HP는 1.

    앙버팀 특성으로 인해 어떠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HP도 1.

    그렇다.

    이로 인해 나는 그 어떠한 공격에도 HP 1, 최대 체력의 100%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심지어 포션 같은 것도 전혀 필요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스테미너는 최대 체력에 비례하여 퍼센테이지(%)로 결정되는 것이기에 기력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지.”

    ‘앙버팀’과 ‘나약한 갑각’의 환상적인 콜라보로 인해 나는 HP 1로도 절대 죽지 않고 온 세상을 마음대로 활보, 활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사실 이는 밸런스 붕괴 행위로 지적되어 아마도 곧 패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앙버팀’ 특성도 ‘나약한 갑각’ 특성도 구하기 어려운 특성들이니만큼 현 시점에서는 나 외에 딱히 이용자가 없겠지만… 내가 여기서 레비아탄을 잡는다면 아마도 더욱 더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겠지.

    …우두둑! …뚜둑!

    나는 마몬과 데스웜의 건틀릿을 착용한 뒤 손을 한번 풀었다.

    -<이어진>

    LV: 93

    HP: 1/1

    호칭: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발록의 뿔을 꺾은 자(특전: 야수)’

    ‘그 무서운 데모고르곤(특전: 싸움광)’

    ‘데스나이트 ‘킹 아서(King Arthur)’의 후예(특전: 백전노장)’

    싸우고 싶어 안달 난 몬스터들의 의지가 혈관 속에 녹아들어 부글부글 끓는다.

    좋았어, 이제 출격 준비 완료.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레비아탄을 향해 외쳤다.

    놈의 고유 대사를 그대로 돌려줄 시간이다.

    “바다의 그 누가 나와 겨루랴!”

    보아라.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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