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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38화 (638/1,000)
  • 638화 하해(下海)의 왕 (6)

    내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는 레비아탄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상반신을 반쯤 내놓은 것만으로도 협곡에 무저갱 같은 밤을 드리우는 덩치.

    <무저갱 데스웜> -등급: S+ / 특성: 벌레, 땅, 가뭄, 앙버팀, 착굴(鑿掘), 지진, 예지, 무저갱, 와류

    -서식지: ?

    -크기: 100m.

    -육체는 웜 형 몬스터의 궁극(窮極)에 이르렀으나 정신은 육체의 진화를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무너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전 세계의 지하를 꿰뚫어 달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전 세계의 땅 밑을 돌아다니는 지저 괴물.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쉬지 않고 굴을 팔 수 있는 힘과 맨틀 층에서도 문제없이 버텨내는 육체.

    감히 모든 지하종의 왕을 자처할 만한 존재가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든 힘을 100% 개화한 무저갱 데스웜은 대심해 크라켄과도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과거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크라켄의 ‘대심해’ 특성과 같이, 데스웜에게는 ‘무저갱’ 특성이 있다.

    현재 자신이 위치한 곳이 땅속일 경우 전체 스탯이 증가하는 것이다. 깊이가 깊을수록 더더욱.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해(下海), 데스웜은 바다보다도 더욱 낮은 곳까지 파고들어 이곳까지 왔다.

    아마도 내가 놈의 뱃속에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었기 때문에 물을 마시기 위해 바다 근처의 땅을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위치가 이 근처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러다가 낙타의 피에 반응해서 모습을 드러낸 건가?’

    나는 허공에 번지고 있을 미약한 피 냄새를 맡기 위해 킁킁거렸다.

    당연히 나에게 느껴질 리가 없었지만… 데스웜의 예민한 후각에는 느껴졌나 보다.

    에이햅 선장이 남기고 간, 혈관 속까지 녹아 흐를 정도로 짙은 증오가.

    [오-오오오오!]

    해저의 절벽을 뚫고 나온 데스웜은 주변의 바닷물을 온통 날려버리며 강하게 포효했다.

    [나, 나타났어! ‘그놈’이 나타난 거야! 에이햅 선장을 잡으러!]

    이스마엘이 덜덜 떨며 주저앉는다.

    유다희 역시 멍한 표정으로 데스웜의 거대한 몸을 올려다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현 사태를 냉정히 파악하고 있었다.

    현재 데스웜의 위험 등급은 거의 S+에 준한다. 그 말인즉슨…?

    “창해룡 때와 비슷하다 이거지.”

    나는 버뮤다를 잡을 때도 대심해 특성으로 인해 S+등급이 된 크툴루 크라켄을 이용했었던 바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뿌!]

    내 어깨 위에 있던 쥬딜로페가 손가락을 뻗어 데스웜을 가리켰다.

    …움찔!

    데스웜은 이번에도 쥬딜로페의 작디작은 몸짓에 반응했다.

    무엇 때문에 저 거대한 벌레형 몬스터가 쥬딜로페같은 작은 녀석에게 위축되는 것일까?

    혹시나 놈의 특성 중 하나인 ‘예지’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젠장, 엄청 궁금하네 이거.’

    대체 데스웜은 쥬딜로페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 것일지, 겜덕후로서는 너무너무 궁금한 일이다.

    나는 시간을 들여 이 사실을 조금 더 심도 깊이 연구해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별로 여의치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 이후로 이렇게 화를 내 본 적은 처음이로군. 이 지긋지긋한 벌레 놈들.]

    레비아탄의 벌레에 대한 혐오가 극을 향해 치달았다.

    [그냥 한꺼번에 싹 다 뒈져 버려라!]

    레비아탄의 꼬리가 빳빳하게 서는가 싶더니 비늘 밑으로 수많은 구멍들이 뚫린다.

    출수공(出水孔)이 확 커지며 소용돌이가 요란하게 이는 것으로 봐서는 엄청난 양의 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콰-콰콰콰쾅!

    말스트룀!

    바다의 배꼽이라 불리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레비아탄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쩌저적! …쩌적!

    동시에, 날카로운 얼음파편들이 깨지고 얼어붙기를 반복하며 몸집을 불려 나간다.

    주변 바닷물들까지 통째로 얼어붙는 부가효과가 있어 더더욱 무시무시한 자연재해였다.

    하지만.

    [그오오오오!]

    무저갱 데스웜 역시도 만만치 않다.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해(災害)와 같은 거대한 몸이 한번 움직이자 해저의 절벽들이 통째로 붕괴되었다.

    …우르르릉! 콰콰콰쾅!

    묵직한 해진에 의한 산사태와 그로 인해 발생한 격렬한 수류가 레비아탄의 브레스에 맞선다.

    온통 뒤집어지는 대지.

    집채만 한 바위와 얼음덩어리들이 거센 수류에 떠밀려 콩알처럼 날아다닌다.

    …콰악!

    이런 상황 속에서, 먼저 상대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은 것은 놀랍게도 데스웜 쪽이었다!

    우지지지직!

    데스웜의 칼날 같은 이빨들은 레비아탄의 목에 박힌 뒤 고속으로 회전한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순식간에 쥬스처럼 으깨 버리는 초강력 믹서기였다.

    한편, 데스웜은 레비아탄의 목을 물고 땅굴 속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듯 맹렬하게 잡아당긴다.

    물소 수만 마리에 필적하는 강력한 힘이 질기고 쫀득한 근육섬유를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기고 조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하해의 대왕은 이 상황에 격분했다.

    [오오!? 이 작다란 벌레 놈이 감히!]

    레비아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범선의 돛보다도 훨씬 더 크고 넓은 지느러미들을 한꺼번에 쫙 펼쳐 젓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명이 동시에 휘젓는 노처럼 강력한 힘!

    동시에 데스웜의 목을 뚫고 닻처럼 내린 이빨들이 강력한 장력(張力)을 발휘한다.

    데스웜은 레비아탄을 땅속으로 끌어당기려 하고 레비아탄은 데스웜을 물속으로 끌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좀 원패턴이기는 하지만… 괴수 대 괴수 싸움은 언제 봐도 즐겁단 말야.”

    나는 팝콘을 뜯을까 하다가 관두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금방 눅눅해질 것 같아서이다.

    한편.

    [그오-오오오오!]

    레비아탄은 곰치 네 자매를 찢어죽일 때와는 달리 매우 힘겨운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에이햅에게 꽤나 호되게 당한데다가 도트 데미지의 피해도 차곡차곡 누적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무저갱 특성이 100% 발동되고 있는 데스웜은 동 등급 대에서는 당할 자가 없는 희대의 괴물!

    제아무리 고정 S+급 몬스터라고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임에 분명하다.

    …우드득! …으득!

    서로의 목을 물고 늘어지는 레비아탄과 데스웜, 그들은 긴 몸뚱이를 매듭처럼 꼬며 뒤엉켜 싸운다.

    하해의 저변이 통째로 움푹 주저앉을 정도로 맹렬한 싸움이 끝없이 이어졌다.

    바위들은 전부 무너져 내리고 진흙이 몇 겹이나 되는 구름을 이루며 치솟아 오른다.

    인간은 먼지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암흑이 장대한 규모로 회오리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아.”

    유다희가 넋을 놓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현실을 깨닫게 해 준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고, 또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을.

    …탁!

    나는 바위를 박차고 위로 헤엄쳤다.

    두 거대 괴수가 만들어내는 대혼돈을 벗어나 진열을 재정비하려면 이 수류를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인생을 살다 보면 최선부터 최악까지 몇 가지 선택지를 만나기 마련이고 내가 그 선택지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할 경우, 그래서 일의 흐름을 운에 맡겨야 할 경우, 대다수는 높은 확률로 최악을 향해 흘러가기 마련이다.

    ‘아마 데스웜이 지겠지.’

    데스웜이 레비아탄을 죽여 준다면 그림이 참 좋겠지만…….

    (몬스터끼리 넣은 데미지와 딜량은 기여도로 잡히지 않기 때문)

    …뚝!

    지금 저 자욱한 진흙구름 속에서 들려온 목뼈 부러지는 소리는 아마도 레비아탄의 것이 아닐 공산이 컸다.

    이윽고.

    [그-워어어어억!]

    모든 진흙을 날려버린 레비아탄이 협곡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긴 몸통으로 조르고 있는 데스웜의 몸뚱이는 축 늘어져 있었고 머리 부분은 뜯겨져 나가고 없었다.

    군데군데 내장과 뼈가 튀어나와 흩날리는 것을 보니 죽은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우적! …으득! …뿌드득!

    레비아탄이 드러낸 이빨과 잇몸 사이로 데스웜의 머리가 산산조각 나 으깨져가는 것이 보인다.

    이것이 하해대왕(下海大王)!

    이것이 고정 S+급 몬스터!

    …그러나 놈의 몸도 성치만은 않았다.

    두 눈은 멀었으며 전신에는 에이햅의 작살들이 박혔고 데스웜의 칼날 같은 이빨에 찢겨나간 부분들은 걸레처럼 너덜거린다.

    넝마가 된 레비아탄.

    오로지 변함없는 것은 그의 몸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로운 기름과 그것을 살라먹고 불타고 있는 백빛의 겁화(劫火)였다.

    “…이제부터는 도트 뎀이 꽤나 아프게 느껴질 거야.”

    나는 깎단을 회수해 허리춤에 갈무리했다.

    벨제붑 특유의 녹색 기운을 뿜어내는 두 자루의 송곳은 이제 제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인벤토리로 돌아왔다.

    동시에.

    내 인벤토리 안에서 이 극(劇)의 마무리를 지을 장치가 등장한다.

    지금껏 아껴 왔던 비장의 무기!

    드디어 이것을 쓸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에게? 이게 뭐야?”

    그것을 보는 유다희의 눈살이 와락 찌푸려진다.

    내가 꺼낸 물건을 본 그녀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쬐깐한 건?”

    “쬐깐하다니! 쬐깐하지 않아!”

    나는 발끈하여 유다희의 말을 잘랐다.

    그렇다.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꽤나 하찮고 잡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나약한 자의 나팔고둥> / 재료 / C

    힘껏 불면 트럼펫 소리가 나는 커다란 소라껍데기.

    보기보다 물러서 힘껏 누르면 부서질 것 같다.

    -방어력 -50

    -특성 ‘나약한 갑각’ 사용 가능

    짙은 크림색에 엷은 핑크색이 감돌고 있는, 약 8인치 가량의 작은 소라껍데기.

    그것은 과거 ‘폭식’의 악마성좌, 파리 대왕 벨제붑을 잡고 얻은 히든 피스였다!

    나는 유다희를 향해 씩 웃었다.

    “잘 봐, 지금부터 진짜 악몽 같은 변태 플레이를 보여 줄 테니까.”

    이제 고인물을 넘어, 망자(亡者)의 영역으로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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