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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37화 (637/1,000)
  • 637화 하해(下海)의 왕 (5)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백경(白鯨)』 에이햅의 대사 中-

    *       *       *

    나는 불완전변태 모드를 가동한 것도 모자라 피카레스크 마스크와 마몬의 대망치 건틀릿까지 착용했다.

    여기에 유다희가 걸어 준 버프까지 실리자 나의 근력 스탯은 끝없이 폭증한다.

    [오-오오오오오!]

    눈앞으로 레비아탄의 거대한 아가리가 쇄도해 온다.

    검은 장어의 몸에 흰 고래의 머리를 가진 거대 심해괴수와의 대격돌!

    “이건 마몬의 복수다.”

    나는 망치와도 같은 주먹을 높게 들었다가 내리찍었다.

    레비아탄의 머리통을 향해서.

    콰-쾅!

    내 주먹이 떨어져 내려 레비아탄의 머리와 부딪치는 순간, 바닷물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빈 진공의 공간이 생겨났다.

    …쩍!

    레비아탄의 외뿔이 한 번 더, 이번에는 세로로 쪼개졌다.

    애초에 마몬에게 맞아 반으로 부러졌었던 뿔이다.

    그리고 이내, 밀려나갔던 바닷물이 다시금 빈 공간에 차오른다.

    그 억겁(億劫)과도 같은 찰나(刹那)가 지나간 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레비아탄의 거대한 머리통이 럭비공처럼 튕겨나갔다.

    놈의 머리는 절벽의 중앙에 부딪친 뒤 다시 반대편 절벽으로 튕겨 나와 한 번 더 부딪치고서야 해저의 협곡 아래로 가라앉는다.

    무너져 내리는 양쪽 절벽의 붕괴물이 가라앉은 레비아탄의 몸 위로 수북하게 쌓이고 있었다.

    슈르르륵…

    나는 여벌의 심장과 혈액포식 능력으로 HP를 채웠다.

    거리가 멀어 레비아탄의 피는 빼앗을 수 없었지만 대신 절벽 곳곳에 숨어 있는 여러 몬스터들로부터 체력을 빼앗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과부하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오른 오른팔이 맞닿은 바닷물들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었다.

    그때.

    한창 체력을 채우고 있는 내 옆으로 유다희가 헤엄쳐 왔다.

    그녀는 아무래도 내가 착용하고 있는 마몬의 건틀릿을 알아본 모양이다.

    “…너, 너 그 힘 뭐야? 그 건틀릿 어디서 났어?”

    유다희는 내 팔을 잡고 경악한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리자 더더욱 놀란다.

    내 얼굴에는 마동왕을 상징하는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덮여 있기 때문이다.

    오추멜로프의 무한코스튬 반지로 얼굴을 덮어 보았지만 이미 유다희는 그 밑의 내면을 본 모양.

    “…….”

    내가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유다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마왕님한테 아이템 빌려 온 거야?”

    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건가?

    내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콰쾅!

    협곡 아래의 레비아탄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한가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유다희를 밀쳐내고 깎단을 잡았다.

    그때.

    내 볼을 세게 잡아당기는 존재가 있었다.

    [호에엥!]

    쥬딜로페. 녀석이 갑자기 내 시야를 가로막은 채 건너편의 절벽을 가리킨다.

    “쥬딜로페 씨, 잠시 들어가 있으세용.”

    나는 잠수복 안으로 손을 넣어 쥬딜로페를 밀어내고는 다시 깎단을 잡았다.

    [그오-오오오오오!]

    레비아탄이 나를 향해 불타는 갈기와 이빨을 들이미는 순간.

    …콰쾅!

    나는 앙버팀 특성을 발동해 레비아탄의 공격을 받아냈고 바로 오즈의 죽음비늘을 세워 데미지를 반사했다.

    우지지직!

    나를 씹었던 레비아탄의 이빨들이 몽땅 깨져나간다.

    갈가리 찢어진 잇몸으로 핏물이 배어나오는 동시에, 나는 혈액포식으로 그것들을 모조리 흡수해 버렸다.

    [그륵…!?]

    레비아탄이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튼다.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

    나는 킬 체인 특성을 발동해 레비아탄의 머리통을 한 바퀴 길게 휘감았다.

    그리고 바로 거리를 좁힌 뒤.

    뿌뿍!

    두 발의 깎단을 놈의 볼에 쏴 주었다.

    츠츠츠츠츠…

    ‘근묵자흑’, ‘능지처참’, ‘극독’ 특성에 의한 도트 데미지가 레비아탄의 크고 단단한 몸뚱이를 조금씩 좀먹어 간다.

    거기에.

    우드드득!

    불완전변태 특성으로 인해 열 배로 강화된 마몬의 오른손이 레비아탄의 부러진 뿔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게 깡공 20만의 힘이다.”

    나는 레비아탄의 거대한 머리를 그대로 절벽에 갖다 박았다.

    콰쾅!

    암벽을 부수고 틀어박히는 머리통.

    나는 킬 체인을 반대편 절벽에 걸고는 레비아탄의 머리를 그대로 옆으로 북- 그어 버렸다.

    …우지지지지직!

    절벽에 긴 흉터가 패인다.

    레비아탄의 머리가 암벽을 부수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어어어억!?]

    머리를 절벽의 흉터에 묻은 채 몸부림치는 레비아탄.

    놈이 고통스러워 몸을 휘저을 때마다 기묘한 향기가 나는 기름들이 바닷물로 스멀스멀 번져나왔고 이에 따라 흰 화마(火魔)도 기세를 불려나간다.

    온 세상 바닷물에 기름과 불이 번져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정말로 레비아탄 공략이 코앞이다.

    나는 조바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숨을 골랐다.

    이제 바로 연계기를 먹일 차례…….

    [뽀앵!]

    그런 내 집중력은 또다시 튀어나온 쥬딜로페에 의해 어그러진다.

    쥬딜로페는 또다시 건너편 절벽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

    “이 녀석,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들어가 있으렴.”

    나는 쥬딜로페를 살며시 눌러준 뒤 다시 레비아탄을 향해 시선을 옮겨놓았다.

    그때.

    부우우웅!

    수류가 폭력적으로 요동친다.

    고개를 돌리니 레비아탄의 꼬리가 휘둘러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 먼 공격이라서 나에게 맞을 걱정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 방향에 유다희가 있다는 것.

    이 시점에서 같은 파티원인 유다희가 죽는다면 나에게는 디버프가 걸리게 된다.

    그리고 지금 걸려 있는 버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유다희는 꼭 생존해야 했다.

    …타악!

    나는 유다희의 산소줄을 잡아당겼다.

    유다희는 반대편 절벽으로 가려다가 막혀서 다시 나에게 끌려온다.

    “우왓!? 무슨 짓이야! 혼자서도 피할 수 있다고!”

    “바보야. 그쪽에는…….”

    내가 뭔가 말할 시간도 없었다.

    콰쾅!

    진흙구름을 찢어발기고 나온 것은 레비아탄의 아가리였다.

    쿠르르륵!

    놈은 막대한 크기의 불길을 입 안에 머금은 채로 나를 향해 짓쳐들었다.

    “물러나 있어.”

    나는 유다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돌진해 오는 레비아탄의 머리를 두 손으로 막아 세웠다.

    …콰쾅!

    몸을 터트릴 듯 밀려들어오는 반동 데미지!

    나는 여벌의 심장이 포션을 한계까지 빨아들였다는 것을 느꼈다.

    포션을 넉넉하게 준비해 놨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바닥을 드러내는 모양이다.

    우득! 우드득!

    조금씩 뒤로 밀려날 때마다 몸 전체가 비명을 지른다.

    마동왕의 힘으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만큼 레비아탄의 광기는 폭발적인 것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러자 내 뒤에 있던 유다희의 두 눈이 흔들린다.

    “…등.”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내 등을 가리켰다.

    내 등이 뭐 어떻다는 거야?

    “그때 호텔에서…….”

    유다희는 계속해서 더듬더듬 중얼거린다.

    “빨리 절벽 위로 가!”

    내가 외치자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약간 우물쭈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빽 소리쳤다.

    “…너 레이드 끝나면 마왕님한테 아이템 제대로 반납해!”

    유다희는 재빨리 절벽 위로 헤엄쳐 간다.

    그 순간.

    콰쾅!

    나는 레비아탄에게 밀려 그대로 건너편 절벽에 처박혔다.

    우지지지직!

    단단한 암반지대를 뚫고 점점 깊숙이 파묻힌다.

    레비아탄은 거대한 아가리로 나를 깨물어 부수려 했지만 나는 힘과 반사데미지로 그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일단 버티기만 하면 내 승리지.”

    지금 이 순간에도 도트 데미지는 착실히 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무난하게 레이드를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변수만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변수라는 것은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벌어지는 것.

    쿠르르르르륵!

    나를 밀어붙이던 레비아탄이 입을 다시 쩍 벌린다.

    놈의 아가리 안으로 엄청난 양의 수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헉!? 브레스? 아직 쿨 타임이 안 돌아왔을 텐데!?’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내뿜는 극저온의 고드름 브레스를 이런 좁은 공간에서 맞았다간 앙버팀이고 뭐고 그 즉시 사망이다.

    놈이 브레스를 펑펑 뿜어내지 않고 신중하게 쏘는 것으로 보아 쿨타임이 긴 스킬이라 예상했거늘… 그것이 내 생각보다는 훨씬 짧았던 모양이다.

    ‘젠장!’

    나는 황급히 절벽의 구멍에서 탈출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깊게 들어왔다.

    내가 처박힌 해저동굴은 방금 막 레비아탄의 박치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지반도 불안정하다.

    자칫하면 레비아탄의 브레스를 맞기 전에 지형 데미지로 먼저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바로 그때.

    [오-오오오오오!?]

    레비아탄이 돌연 입을 다물더니 구멍 밖으로 머리를 쑥 빼냈다.

    무언가에 의해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나는 뭔가 싶어 바로 해저동굴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이내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에이햅! 이 불굴의 작살잡이가 또다시 레비아탄의 뒷덜미에 작살을 박아 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핏물과 진흙먼지가 걷히자 이내 그 모습이 조금 더 똑똑히 보였다.

    지금 레비아탄의 목에 작살을 꽂고 있는 이는 에이햅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었다.

    […관짝! 기름!]

    이스마엘은 죽은 에이햅 못지않은 광기로 레비아탄의 목에 작살을 꽂아 넣고 있었다.

    마치 관뚜껑에 못을 박듯, 후회와 슬픔, 광기로 점철된 얼굴로.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작살이 꽂힌 곳에서 하얀 기름이 미친 듯이 배어나온다.

    주변으로 퍼지는 기묘한 향기.

    […퀴퀘그! 오오! 퀴퀘그!]

    이스마엘은 그 와중에도 기름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대체 이 흰 기름의 무엇이 그를, 아니 이 수많은 마도로스들을 매혹시키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이 향기로운 기름을 탐닉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콰쾅!

    이윽고, 레비아탄은 뒷목을 절벽에 세게 부딪쳤다.

    또다시 짙은 핏물이 바닷물에 스멀스멀 번져 나온다.

    […뿌!]

    쥬딜로페가 또다시 건너편 절벽을 가리킨다.

    이스마엘의 핏물이 흐르고 있는 ‘하해의 저변’을.

    “젠장.”

    눈앞에서 이스마엘이 피떡이 되었다.

    아무리 NPC라지만 지금껏 함께해온 동료가 목숨을 잃었을 때는 그 씁쓸함을 이루어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디에 있느냐, 벌레 놈!]

    레비아탄은 화상으로 인해 감겨진 눈과 작살로 인해 멀어버린 눈을 들어 나를 찾는다.

    입에는 또다시 극저온의 수류가 응집해 들고 있다.

    ‘지금이다. 지금이 타이밍이야!’

    놈이 나를 놓친 지금이 바로 적기다.

    나는 숨겨 놓은 패를 꺼내들 생각으로 절벽을 박찼다.

    [뿌애앵!]

    내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쥬딜로페만 아니었더라면 말이지.

    “너 이 녀석!? 아까부터 자꾸 왜 그래?”

    나는 쥬딜로페를 야단쳤다.

    아까부터 자꾸 중요한 타이밍마다 방해를 해대니 이거 원.

    나에게 꾸중을 들은 쥬딜로페는 심통 난 표정으로 두 팔을 허리에 붙인다.

    오즈가 나와 쥬딜로페 사이에서 슬슬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절벽 위에서 유다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변태! 큰일났어! 들켰다고! 빨리 도망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레비아탄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감긴 눈에서 핏물을 뿜어내며, 입을 쩍 벌린 모습으로.

    […거기냐, 벌레 녀석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 몸에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X됐다.’

    이거 아무래도 레이드를 실패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상태창의 미묘한 수치들을 확인하며 이를 악물었다.

    도박수, 확률은 아마도 20%… 아니, 10% 정도일까?

    ‘뭔가… 뭔가가 아주 조금만 시간을 끌어 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레비아탄의 브레스나 버스트 다이브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전부 다 꺼내든 지금, 믿을 것이라곤 운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일을 꾸미는 것은 인간이나 그것을 성사시키는 것은 과연 하늘인 것이다.

    ‘…좋아. 해 보자. 끝까지 가 봐야지.’

    유다희가 평소 즐겨 하는 대사가 내게도 옮았나 보다.

    레비아탄을 향해 자세를 낮춘다.

    지금껏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를 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절벽을 박찼다.

    …아니, 박차려 했다.

    “으억!?”

    하지만, 나는 중심을 잃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내가 막 지면에서 발을 떼는 순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진원(震源)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굉음과 지진이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뿌애앵!]

    쥬딜로페가 건너편 절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동시에.

    […그놈! 그놈이 나타났다!]

    공포에 질린 이스마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레비아탄의 공격으로 거의 다 부서진 관짝 안에서 머리를 내밀어 외치고 있었다.

    등에 짊어지고 다니던 퀴퀘그의 관이 위기의 순간 그를 구한 것이다.

    ‘…그놈이라고?’

    이스마엘을 향한 반가움도 잠시,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에이햅 선장의 다리를 앗아간 ‘그놈’의 정체는 레비아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절벽을 무너트리고 모습을 드러낸 ‘그놈’의 정체는 상당히 뜻밖의 것이었다.

    [그-오오오오오!]

    레비아탄에게 뒤지지 않는 몸집의 몬스터.

    지금 하해대왕을 가로막고 포효를 내뿜는 이 거대괴수는 나와도 구면이다.

    그렇기에 이 말이 튀어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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