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34화 (634/1,000)
  • 634화 하해(下海)의 왕 (2)

    -띠링!

    <히든 던전 ‘네 자매 사육장’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알림음이 들리는 동시에, 우리의 눈앞에 몬스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게다.”

    유다희가 탄성을 질렀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소라껍데기를 짊어지고 다니는 소라게였다.

    <함무라비 소라게> -등급: A / 특성: 얼음, 땅, 물 뺑소니, 나약한 갑각, 지진, 고생물, 백전노장

    -서식지: 가혹한 설산 ‘금지된 구역’, 상해(上海) 블루홀, 하해(下海) ‘네 자매 사육장’

    -크기: 14m

    -언뜻 보기에는 가재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게의 한 종류이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소라는 상당히 약해서 강한 충격을 받으면 금세 깨져 버린다.

    상당히 집요한 성격이어서 자기를 공격한 적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똑같이 되갚아주는 듯.

    깊은 심해에 주로 서식하는 종이지만 어째서인지 눈이 잔뜩 내리는 고산지대에서도 종종 발견된다고 한다.

    북방의 설산에서 필드보스로 종종 등장하는 녀석이다.

    물론 북방에서 만났던 개체보다는 훨씬 더 크고 육중했지만.

    이 소라게는 절벽의 가파른 벽을 천천히 타오른다.

    보랏빛 해파리들을 향해 엉금엉금 집게발을 휘두르는 것이 아무래도 먹이 활동을 하려는 모양.

    하지만.

    간만에 낯익은 몬스터를 발견했다는 반가움도 잠시였다.

    …콰쾅!

    이내 소라게의 갑각이 산산조각 난다.

    건너편 절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머리’가 소라게를 한 입에 집어삼킨 뒤 그대로 으깨 버렸던 것이다.

    “세상에! 이게 뭐야!”

    유다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절벽의 구멍에서 튀어나와 소라게를 잡아먹은 것은 길쭉한 외형을 가진 거대 몬스터였다.

    커다란 입, 부리부리한 눈알, 돛과 같은 지느러미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이 몬스터는 마치 곰치를 연상케 하는 모습을 가졌다.

    목에 차고 있는 커다란 개목걸이에는 ‘헬렌(Helen)’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하해(下海)의 곰치 ‘헬렌’> -등급: S / 특성: 심해, 물, 풍랑, 맹수, 싸움광, 뺑소니, 1:1, 자매결연

    -서식지: 하해(下海) ‘네 자매 사육장’

    -크기: 55m

    -상해(上海)의 곰치들은 으레 작고 나약하지만 하해(下海)의 수압과 고독을 견뎌내고 생존한 일부 곰치들은 종의 한계를 초월한 덩치와 힘을 가지게 되었다.

    ‘헬렌’이라는 이름의 이 괴물 곰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소라게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먹고는 절벽에 난 동굴로 슬며시 되돌아갔다.

    엄청난 양의 물거품만을 남겨놓은 채로.

    유다희가 곰치의 크기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진짜 엄청 크네. 그리고 시력이 되게 나쁜 모양이다. 그 가까이서 우리를 못 본 것을 보면.”

    그녀는 헬렌을 무사히 피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콰쾅!

    그 안도는 발밑의 구멍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괴물에 의해 바로 깨졌다.

    “꺄아…… 으읍!”

    유다희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자기 주먹을 입에 틀어막음으로서 겨우 참았다.

    쿠구구구구……

    무너져 내리는 반대편 절벽, 그곳에 대가리를 처박고 해파리를 우물거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괴물 곰치였다!

    <하해(下海)의 곰치 ‘린다’> -등급: S / 특성: 심해, 물, 풍랑, 맹수, 싸움광, 뺑소니, 1:1, 자매결연

    -서식지: 하해(下海) ‘네 자매 사육장’

    -크기: 55m

    -상해(上海)의 곰치들은 으레 작고 나약하지만 하해(下海)의 수압과 고독을 견뎌내고 생존한 일부 곰치들은 종의 한계를 초월한 덩치와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곰치의 목에 채워져 있는 가시 목걸이에는 ‘린다(Linda)’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에이햅은 유다희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자매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조심해. 아직 두 마리 더 남았다.]

    그제야 유다희는 이 구역에 붙은 이름을 떠올렸다.

    ‘네 자매 사육장’

    그렇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보스 몬스터는 총 네 마리.

    “……헬렌(Helen), 린다(Linda), 그리고 제니(Jenny)와 바비(Barbie)겠지?”

    내 중얼거림을 들은 유다희는 멍한 표정을 짓는다.

    “야 변태, 너 여기 전에 와 봤어?”

    “아니.”

    “근데 보스 몬스터들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전 명작인 메X슬러그 3에 나오는 보스 몬스터들로부터 오마쥬한 게 딱 봐도 티가 나잖아.”

    말 그대로다.

    메X슬러그 3에 나오는 심해 루트를 타게 되면 주인공을 습격해 오는 거대한 괴물 곰치 네 마리를 피해 제한 시간 안에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스테이지가 나온다.

    이 곰치들 역시 목에 구속구가 채워져 있으며 우리에 갇혀 있다가 일정 시간마다 문이 열리면 맞은편의 큰 구멍을 향해 머리를 내밀어 거대한 해파리를 잡아먹는다.

    이때 곰치가 나오는 출입구를 조금만 주의 깊게 살피면 각각 헬렌, 린다, 제니, 바비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내려가는 길에 또 한 마리의 거대한 곰치를 마주해야 했다.

    녀석의 이름은 예상했던 대로 ‘제니(Jenny)’였다.

    “……이제 바비만 남았다.”

    나는 휘몰아치는 물거품에 몸을 숨긴 채 아래를 살폈다.

    이내 절벽을 기어 다니던 거대 새우 한 마리가 제니의 입에 물린 채 구멍 안으로 끌려들어간다.

    우리는 조심조심 절벽을 기어 밑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마지막 구멍이 보인다.

    커다랗게 뚫려 있는 저 해저동굴은 ‘바비(Barbie)’의 은신처이리라.

    하지만 주변에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생명체가 없었기에 동굴은 조용하기만 했다.

    바비는 아마 저 속의 진득한 어둠 속에 숨어 먹잇감을 노리고 있겠지.

    그때.

    [……!]

    멍한 표정으로 가라앉던 이스마엘이 깜짝 놀란 기색으로 몸을 움츠렸다.

    절벽가에 튀어나온 따개비 뭉치에 쓸려 잠수복 끝부분이 약간 찢어진 모양이다.

    스스스스……

    이스마엘의 허벅지에서 새어나온 핏물이 바닷물에 번진다.

    그러자.

    콰콰콰쾅!

    전에 없던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바비가 종래의 공격 패턴을 버리고 갑자기 동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갸-아아아아악!]

    심지어 놈은 머리만 내미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몸 전체를 끄집어내 우리가 있는 쪽을 올려다본다.

    핏발 선 눈을 보니 흥분을 넘어서 거의 돌아버린 듯한 모양새.

    “으아!? 뭐야!?”

    유다희는 기겁했다.

    나 역시도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샌드웜 때도 그렇고, 좀 길쭉하게 생겼다 싶은 몬스터들은 다 낙타의 피를 좋아하나?’

    이스마엘은 황급히 잠수복을 여며 피의 방출을 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르르르르……]

    [오-오오……]

    [캬아악!]

    바비가 날뛰자 위의 해저동굴에 숨어있던 헬렌, 린다, 제니까지 머리를 내밀었다.

    슈르르르르륵……

    이내 네 자매 전원이 한자리로 모여든다.

    거대한 곰치 네 마리가 격자모양으로 얽힌 채 빙글빙글 몸을 꼬며 아래로 내려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에잇!”

    유다희가 재빨리 도끼를 꺼내들었다.

    차라라라락!

    그녀는 닻줄을 도끼자루 끝에 묶고는 빙글빙글 돌리다가 그대로 집어던졌다.

    …뻐억!

    유다희가 집어던진 커다란 도끼는 원을 그리며 날아가 헬렌의 머리통에 박혔다.

    하지만 헬렌은 S급 몬스터답게 유다희의 도끼를 머리에 박은 채로 우격다짐 돌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나는 유다희를 잡아채 절벽에서 멀어졌다.

    콰콰쾅! 우지지직!

    헬렌이 들이받은 절벽이 와르르 붕괴해 내린다.

    나는 멍한 표정의 유다희에게 속삭였다.

    “소용없어. 저놈들은 방어력하고 HP가 어마어마하게 높을 거야.”

    “그, 그걸 어떻게 알아?”

    “메X슬러그 3에서 오마쥬했을게 분명하니까. 거기 나오는 곰치들도 죽이는 게 불가능하거든. HP는 뜨지만 깎을 수가 없고 점수도 잘 안 줘. 그냥 피하라고 만든 몬스터야.”

    다행스럽게도 놈들의 이동속도는 느렸고 움직일 때의 딜레이도 긴 편이라서 서둘러 내려가면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중에 앞길을 가로막는 보라색 해파리들만 주의한다면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장애물은 깔아 놔야겠지?”

    나는 깎단을 들고 바비의 동굴로 향했다.

    빡!

    거꾸로 휘둘러진 깎단이 곰치가 튀어나왔던 동굴 입구를 때렸다.

    유다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튀고!”

    “기다려 봐. 메X슬러그에서는 곰치가 나오는 동굴 입구를 때리다 보면 보물상자 아이템을 먹을 수 있단 말야. 혹시 아냐고, 뭐라도 줄지.”

    그리고 역시나, 내 예상은 적중했다.

    …빠각!

    바비의 동굴 입구가 약간 무너지자 그 안쪽에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은 한 마리의 작은 게였다.

    <쌍검독집게 게> -등급: B+ / 특성: 물, 심해, 맹독, 실명, 백전노장, 무리 떼, 뺑소니

    -서식지: 하해(下海) ‘네 자매 사육장’

    -크기: 4cm

    -양 집게에 말미잘을 얹고 다니는 게.

    덩치는 작지만 집게발에 얹은 말미잘의 독은 제법 매콤해서 눈을 찔리기라도 하면 위험할지도……?

    흰색, 빨간색으로 알록달록한 몸에 울긋불긋한 말미잘을 양 집게에 얹고 있어서 마치 치어리더 같다.

    이 작은 게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우아한 자태로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이어진>

    LV: 93

    호칭: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친구(기다림)

    HP: 930/930

    아마도 내가 가진 이 호칭 때문에 친숙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쌍검독집게 게는 나와 닮은 구석이 많다.

    작고 민첩하며 두 개의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바로 그렇다.

    나 역시도 쌍수 깎단을 들어 이 작은 게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이내 녀석의 입에서 뻗어나온 가느다란 촉수가 나의 촉수(?)가 교감을 시도했다.

    “아오 더러워! 뭐하냐고 진짜!”

    “어허, 내 머리카락이 어때서? 갑각류들의 무고한 교감 행위를 매도하지 마!”

    나는 빽빽거리는 유다희를 무시하고 쌍검독집게 게와 계속 교신을 시도했다.

    [……뿌?]

    쥬딜로페는 요 쌍검독집게 게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은 벌레가 아니라 가신으로 삼을 수는 없다.

    이윽고.

    끄덕-

    쌍검독집게 게는 동굴을 박차고 나와 이쪽을 향해 쇄도해 오는 네 자매 곰치를 막아섰다.

    그리고 녀석을 따라 각 동굴들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쌍검독집게 게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눈을 멀게 만드는 독을 가진 말미잘을 앞세워 네 자매 곰치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

    이내 네 마리의 괴물 곰치와 수많은 게들 사이에 대결이 펼쳐졌다.

    나는 멍한 표정의 유다희를 툭 쳤다.

    “뭐 해? 끝까지 가자며?”

    “어? 어어, 어. 가야지! 끝까지 가야지!”

    유다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닻줄을 당겨 도끼를 회수하고는 재빨리 나를 따라온다.

    이제 정말로 끝까지 가는 일만 남았다.

    *       *       *

    이윽고 우리는 네 자매의 영역을 벗어나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내려왔다.

    네 자매 곰치는 게들과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더 이상 우리를 따라오지 않는 기색.

    나는 에이햅과 함께 제일 앞에 서서 심해의 어둠을 천천히 더듬어 나간다.

    하해의 저변(底邊).

    이 세상에서 제일 깊은 바다가 우리에게 그 깊고 어두운 내면을 공개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곧 세상의 끝 ‘하해의 저변’에 도달합니다>

    <‘진(眞) 보스’가 눈을 떴습니다!>

    요란한 알림음이 내 고막을 두들긴다.

    이윽고.

    …쿠르륵!

    심해에 불빛 하나가 피어올랐다.

    시뻘건 광기로 불타오르는 태양.

    ‘깊은 물웅덩이를 솥처럼 끓게 하고 바닷물을 기름가마처럼 부글거리게 하는구나!’

    ‘하해의 왕’

    놈이 하나 남은 눈을 들어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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