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불사조 (5)
레비아탄이 시커먼 몸뚱아리를 꿈틀거리며 돌격해 온다.
희게 물든 대가리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들이받아 부숴 버릴 듯 흉포한 기세.
그리고 화이트 드래곤,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가 눈동자 없이 희뿌연 눈알을 번들거리며 날아든다.
온몸에 꽉꽉 들어찬 씨알 굵은 근육과 날카로운 손톱은 그야말로 광전사 그 자체다.
나는 눈앞으로 쇄도해 오는 레비아탄과 카프카타렉트의 모습에서 기묘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색깔이었다.
‘둘 다 하얗네.’
설정 상 레비아탄과 카프카타렉트는 동일한 적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
둘 다 과거, 색욕(色慾)의 악마성좌 아스모데우스에게 패해 원래의 색깔을 빼앗기고 흰 색으로 물들어 버렸다는 히스토리가 있다.
아스모데우스가 가진 ‘침어낙안(沈魚落雁)’ 특성은 레비아탄을 심해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혔고 카프카타렉트를 무저갱 속에 떨궈 버렸다.
둘 다 그 이후부터 원래의 몸 색깔을 잃고 하얗게 새어 버린 것은 덤이다.
그래서일까?
질투의 악마성좌 레비아탄과 무투룡 카프카타렉트는 공통의 적을 가진 만큼 나름대로 유대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 둘이 함께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쿠르르르륵!
레비아탄의 몸에서 배어나온 기름에 흰 용이 발산하는 하얀 불꽃이 옮겨 붙어 타오른다.
이내 거대한 불꽃의 소용돌이가 이쪽을 덮쳤다.
…퍼펑!
하지만 불사조의 힘 역시 그 둘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오른쪽 날개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화염이 흰 용의 하얀 불꽃과 팽팽하게 맞섰다.
동시에, 레비아탄이 입으로 뿜어내는 극저온의 수류 역시 불사조의 왼쪽 날개에서 뻗어 나오는 서리폭풍에 가로막혔다.
[힘 좀 써 봐라, 장어 놈아. 저깟 올빼미 하나를 못 잡아서야…….]
[남 말 하지 마라, 도마뱀아.]
카프카타렉트와 레비아탄은 서로를 힐난하면서도 힘을 합쳐 불사조를 공격하고 있었다.
쩌적! 쩌저저저적!
아무리 불사조의 힘이 막강하고 또 이 공간이 불사조의 영역이라고는 하나 고정 S+급 몬스터 둘의 연합공격을 버텨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나, 1:1 싸움에 최적화되어있는 무투룡 카프카타렉트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트르! 트르! 트르! 강자와의 싸움은 늘 흥분되는 것이지! 좀 더 나를 뜨겁게 해 봐라, 올빼미야!]
카프카타렉트는 불사조가 만들어내는 화염폭풍과 얼음가시들에 온몸이 찢기면서도 들뜬 목소리로 외친다.
흰 비늘이 터져나가고 붉은 피가 뿌려지는 것을 오히려 즐기는 듯한 모습.
놈은 오히려 자기 몸이 더욱 더 너덜거리게끔 불사조에게 바싹 붙는다.
퍼억! 와드득! 뿌득!
그리고는 억센 손아귀로 불사조의 목을 조르고는 이빨로 마구 물어뜯었다.
과연 전대의 고인물들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순위 1위로 꼽은 존재답게, 카프카타렉트는 엄청난 물리공격력과 속성공격력을 보이며 불사조를 압박하고 있었다.
[…….]
불사조는 평온한 태도를 고수하며 침착하게 다리를 들어 카프카타렉트를 밀어냈다.
그 때문에 목덜미의 살점이 조금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는다.
우지지직!
불사조의 가느다란 다리는 겉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뻥!
카프카타렉트는 그것에 한 대 걷어차이자마자 켁 소리를 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빨과 손톱이 와르르 부러져나간 것은 덤이다.
그리고, 카프카타렉트가 떨어지는 방향에는 내가 있었다.
“너는 나랑 붙자.”
나는 피카레스크 마스크와 마몬의 망치 건틀릿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한 방의 통렬한 데미지를 퍼붓기 위해 땅거죽을 밀어내며 하늘로 주먹을 내뻗었다.
뻐엉!
묵직한 쇠망치가 흰 용의 골통을 가로세로로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끄아악!?]
제아무리 고정 S+급 몬스터라고 한들 마몬의 힘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깡공 3만이 넘어가는 무시무시한 딜이 카프카타렉트의 HP를 뭉텅이로 깎아 놓았다.
“자, 다음은 깎단이다!”
원래대로라면 깎단으로 도트 뎀을 먼저 입혀 놔야 했지만 상황이 급박한지라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막 쌍수 깎단을 집어드는 순간.
쩌저저저저적!
두터운 얼음벽이 솟아나 나와 카프카타렉트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레비아탄이 또다시 내 싸움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저런 성가신 놈.”
나는 눈앞을 가로막은 얼음장벽과 그 너머로 지나가는 시커먼 장어의 몸뚱이를 보며 이를 갈았다.
보아하니 이걸 타 넘으려면 시간이 제법 잡아먹히겠다.
…꾸르르륵! 쿵! 우드드득!
그동안 레비아탄은 똬리를 틀어 불사조를 휘감아 조인다.
불사조는 얼음과 불의 방어벽을 쳐 그것을 막아 냈지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카프카타렉트가 두 손에서 만들어 낸 새하얀 불꽃이 온 필드를 태워 버릴 기세로 휘몰아쳤다.
치지지지직! 쿠르륵!
레비아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름과 거기에 옮겨 붙은 카프카타렉트의 흰 불꽃은 한층 더 가열찬 데미지로 불사조의 몸을 갉아먹는다.
콰콰콰콰콰쾅!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뜨겁고 밝은 열폭풍이 얼음장벽 너머까지 몰아닥친다.
드레이크가 쇠뇌를 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젠장! 저 자식들…… 기름과 불이라서 시너지 효과가!?”
그 말대로, 레비아탄과 카프카타렉트의 합공은 확실히 1+1 이상의 결과를 산출해 내고 있었다.
[그흐흐흐흐흐흐……]
[트르! 트르! 트르!]
기름에 옮겨 붙은 불은 레비아탄에게도 데미지를 입혔지만…… 레비아탄은 애초에 화염 저항력이 높을 뿐 아니라 용연향 특성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데미지는 되돌려 버린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불사조에게 가중되고 있었다.
…퍼펑!
결국 불과 얼음의 노래는 필연적으로 잦아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와지직! 뚜둑! 뿌드득!
레비아탄은 그 거대한 대가리를 들이밀어 장검의 날과도 같은 이빨로 불사조의 왼쪽 날개를 물어뜯었다.
카프카타렉트는 흰 불꽃을 머금고 있는 뜨거운 손아귀로 불사조의 오른쪽 날개를 꺾고 비틀었다.
레비아탄이 만들어 낸 서리지옥에 갇힌 나는 지금 창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이 싸움이 이렇게 격해질 리가 없는데!?”
용과 악마 사이를 제외하면 17개의 서브스트림끼리는 서로를 해치지 않게 되어 있다.
아니, 용과 악마 사이라도 그렇다.
용암룡 모르그마르와 폭식성좌 벨제붑의 싸움이 그랬고 죽음룡 오즈와 탐욕성좌 마몬의 싸움이 그랬다.
어지간하면 서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레비아탄과 카프카타렉트는 불사조를 완전히 죽일 기세로 덤벼든다.
빠드드득!
불사조의 두 날개가 처참하게 뽑혀나갔다.
울상이 된 불똥정령들과 얼음똥정령들이 사방팔방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음은 네놈들 차례다.]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가 나와 윤솔, 드레이크를 향해 선고하듯 말했다.
동시에, 레비아탄이 뿜어내는 수류와 무투룡의 화염폭풍이 이쪽을 향해 날아든다.
콰콰콰콰콰쾅!
경작해 놓았던 밭과 논이 쑥밭이 되었다.
풍차와 집들은 모조리 무너져 토사에 뒤덮였다.
고정 S+급 몬스터 두 마리가 뿜어내는 화력.
세상에 이 힘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 것인가!
이대로 가다가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이 공간이 월드맵의 지도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음은 네놈들이다.]
레비아탄이 붉게 타오르는 외눈을 들어 이쪽을 내려다본다.
카프카타렉트 역시 허옇게 돌아버린 백안시(白眼視)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정 S+급 몬스터에게 기습을 받은 것도 모자라 합공을 당하고 있다.
회귀자고 뭐고 이런 상황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인간은 단언컨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때.
…번쩍!
내 앞을 막아서는 존재가 있었다.
불사조!
불사조는 날개를 잃은 몸으로도 나에게 떨어지는 레비아탄과 흰 용의 공격을 막아내 주었다.
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
불사조의 시선, 그것은 일반적으로 기계를 바라보는 인간, 인간을 바라보는 기계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그것은 마치 순수한 대자연 그 자체를 마주했을 때의 감정.
바다 한복판에 표류한 다이버를 구해준 혹등고래의 눈빛이 이러할까?
나는 불사조의 시선에서 인공지능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경외감과 숭고함이 느껴지는 저 눈동자 앞에 그 누가 게임 속 AI 따위라며 코웃음칠 수 있으랴.
“…….”
이윽고, 내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옆에 있는 윤솔과 드레이크는 그런 내 모습에 깜짝 놀라워한다.
하긴, 나 자신도 뜬금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갑작스러운 현상이니 뭐…….
[꼭 전할 말이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불사조는 나에게 말했다.
아무런 고저가 없는 억양과 어조였지만 그것은 퍽 따듯하게 들렸다.
위이잉-
이윽고, 불사조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우리를 감싼다.
그것은 배리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소규모 차원이동 마법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챘다.
불사조는 공간을 다루는 고유 능력을 사용하여 마지막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아닌 나를, 우리를 대상으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다시 언제!?”
나는 다급히 물었다.
이렇게 이별하기에는 물어볼 것이 너무 많단 말이다.
[…….]
불사조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파아앗!
이 공간에 있던 모든 NPC들이 모두 환한 빛으로 변했다.
그 빛무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많은 불똥정령들과 얼음똥정령들이었다.
그들은 이내 불사조의 몸으로 모여들어 밝게 빛난다.
그리고.
…핏!
불사조는 빛나는 구체로 변해 간다.
동시에 우리의 시야도 일그러진다.
불사조가 발현한 공간전이 특성이 완전하게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빛의 구체로 변한 불사조의 몸에 박혀드는 레비아탄의 이빨과 카프카타렉트의 손톱이었다.
…쿠르릉!
하늘 위에서 굉음이 들린다.
우르르 붕괴하는 세상.
그 위로 아득한 심해의 물결이 보인다.
뻥 뚫린 구멍으로 미친 듯이 쏟아지는 바닷물!
불사조가 조각조각으로 부서지는 것과 같이.
불과 얼음의 섬 역시도 소용돌이에 삼켜져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이 공간을 떠나는 순간.
귓가에 요란한 알림음들이 메아리쳤다.
-띠링!
<‘불사조’가 눈을 감았습니다>
<108번뇌 불똥정령들이 이 사실에 슬퍼합니다>
<108번뇌 얼음똥정령들이 이 사실에 슬퍼합니다>
<이 세상 모든 불꽃들의 기세가 죽습니다>
<이 세상 모든 얼음들의 기세가 죽습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불안정해졌습니다>
<맵이 복구되는 시간이 48시간으로 늦어집니다>
<우측 상단에 기록되던 게임 플레이 시간 표시가 본인 제외, 블라인드 처리됩니다>
<2차 대격변의 ‘두 전쟁군주’들이 고인물 님을 주목합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통틀어 ‘1초’의 오차가 발생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공간을 통틀어 ‘1cm’의 오차가 발생했습니다>
<로그인 시 나타나는 환영 메시지가 7일 동안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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