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25화 (625/1,000)
  • 625화 불사조 (4)

    “카프카가 말했지. ‘세계는 위협으로 가득하고 타인들의 시선은 끝나지 않는 소송처럼 나를 괴롭힌다’라고. 결국 모든 삶은 투쟁일 수밖에 없는 거야.”

    테이블 위의 한 사람이 말한다.

    그의 게임 닉네임은 ‘zㅣ존광전사123’이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마법사 ‘T없이맑은아E’가 깔깔 웃으며 ‘zㅣ존광전사123’의 어깨를 팡팡 친다.

    “야! 갑자기 뭔 허세야!”

    “음… 그냥 한번 분위기 잡아 봤다. 껄껄껄.”

    그 외에 몇 명인가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오늘 이들은 레이드를 뛰기 위해 뭉친 것이다.

    레이드를 돌기 전, 그들은 한데 모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때.

    위이잉-

    로그인을 알리는 환한 빛무리와 함께 접속하는 존재가 있었다.

    뎀 플레이 타임 7만 시간의 위엄!

    바로 나 고인물……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청정수 왔는가?”

    “거 막내가 빠져가지고, 마! 빨리빨리 안 다녀?”

    “어허! 우리 파릇파릇하고 귀여운 뉴비한테 뭣들 하는 거야! 저러다가 쟤 겁먹고 게임 접으면 책임 질 거야?”

    “응~ 너 하나 없다고 게임 망해~ 접지 마~ 어진아~”

    게임 선배들은 플레이 타임 7만 시간이 넘는 나를 대놓고 어린이 취급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휴, 어제 패륜아의 둥지 끝나고 바로 칼침의 탑 가야 했는데… 레이드가 늦어지는 바람에 그만 2분 차이로 다음 던전 입장을 못 했지 뭐야. 나도 많이 해이해졌어. 역시 빤스 한 장에 면봉 한 개비만 들고 던전 클리어는 무리인가?”

    “동감이야. 나이가 드니까 아무래도 피지컬이 딸려. 오늘 자기 전에 용옥의 고문기술자 10번만 죽이고 자야지.”

    “그래? 아 그럼 나는 오랜만에 얼부(얼어붙은 부패) 가서 하린마루나 잡아 볼까?”

    “너는 하린마루가 불쌍하지도 않냐?”

    “눈썹으로만 잡는데 뭐가 불쌍해.”

    여기 있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플레이 타임이 10만 시간 [email protected]인 사람들.

    고인물을 아득히 넘어서 썩은물, 망령, 적폐, 석유, 화석, 아스팔트, 암흑물질, 엑토플라즘 등으로 불렸던 게임폐인들이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나를 옆에 앉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고정 S+급 몬스터 잡혔다는 말은 아직 없죠?”

    “저번에 영국의 튜더가 로열레이드를 이끌고 벨제붑 레이드 뛰던데…… 잡았는지는 모르겠네.”

    “만약 성공했다면 유튭에 동영상 올렸겠지. 실패했으니까 잠잠한 거잖아.”

    “예전에 동부 용암지대에서 오즈랑 싸워 봤었는데 개발렸죠. 뭐, 잡으라고 만든 몬스터가 아니드만?”

    나는 착한 어린이처럼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문득 손을 들고 질문했다.

    “벨제붑이랑 오즈 중에 누가 더 센가요?”

    그러자 선배들은 ‘엄마랑 아빠랑 누가 더 좋니?’ 라는 질문을 들은 어른들처럼 껄껄 웃었다.

    “에이, 그건 비교 못 하지. 용이랑 악마의 설정이 다른데.”

    “맞아.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계산된 파워 밸런스라서. 애초에 세계관 때문에 작위적으로 양분화 된 세력 중 누가 더 강할 거나 할 리가 없잖아.”

    “지형, 기후, 습도, 중력, 대기 중 마나의 밀도, 수많은 요소에 간섭을 받겠지. 계산할 수는 있으나 계산했을 때 이미 결과는 달라져 있을 거야.”

    나름대로 자기들의 식견을 이야기하는 선배들이다.

    그때.

    한 선배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지금 누구 기다리는 거예요?”

    “아 레이드 뛸 때 탱커 없으면 어떡해! 우리 ‘몸빵낭낭3021’님 기다려야지! 그나저나 왜 안 들어오시지? 접속하실 시간 지났는데?”

    그러자 몇몇 선배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곽춘배 형님… 아니 몸빵낭낭 님 이제 게임 접으신댔어요.”

    “뭐어? 왜!?”

    “얼마 전에 부인한테 이혼당하셨대요. 게임만 너무 한다고…….”

    “뭐어!? 아니 그분이 게임으로 달에 벌어 가시는 돈이 천만 원이 넘는데 무슨!”

    “가족들이 그걸 몰라 줬나 봐요. 저번에는 딸이 무슨 예능 프로그램 나가서 아빠가 가정에 소홀하다고 공개 고발했다던데. 그래서 이번에 이혼당하시고 충격이 크셨나 봐요.”

    “……저런.”

    공격대에 잠시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훌륭하신 분이 나가셔서 안타깝네요. 정작 게임 접어야 할 사람은 저인데…….”

    “뭐어? 아니 어진아! 너는 이제 게임 시작했는데 왜 접어!”

    “……저 나름 7만 시간 넘겼어요.”

    “그러니까! 원래 뎀은 7만 시간부터 시작인 거야!”

    내가 게임을 접는다니 다들 아우성이다.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가족도 없고…… 겜창 폐인에 있는 거라고는 사채빚뿐인데요. 희망이 없는 인생이죠.”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선배들은 호호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난 또 뭐라고. 이봐 뉴비 친구! 그래도 너는 인마! 콩팥 두 쪽 아직 잘 붙어 있잖아!”

    “어머 얘 좀 봐. 애기야, 너 집에 천장 있지? 그럼 잘 살고 있는 거야!”

    “그래도 어진이 넌 아직 게임 때문에 생긴 전과는 없지 않냐? 그럼 상팔자인 거지~”

    게임 플레이 시간이 10만 시간이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나누는 대화가 다들 범상치 않다.

    뭐 아무튼.

    결국 오늘 레이드는 탱커의 갑작스러운 꼬접으로 인해 취소되고 말았다.

    “아~ 큰일났네. 오늘 던전 공략하고 전리품 챙겨야 나중에 고정 S+급 몬스터한테도 도전할 수 있는데.”

    “고정 S+급 몬스터 있는 곳은 알고?”

    “이거 왜 이래?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몇몇 고정 S+급 몬스터의 위치 정도는 이미 밝혀진 지 오래잖아.”

    “근데 위치 안다고 해서 잡을 수는 있겠나 싶다. 난다긴다하는 대형길드들도 다 공략 실패했는데.”

    “최초 클리어 보상을 가진 사람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그렇지 뭐. 게임 접은 사람들 때문에 공략법의 맥이 끊겨 실전된 경우도 많고.”

    “……혹시 모르지. 그 최초 클리어 특전들과 실전된 공략법들을 한 사람이 다 독식한다면 고정 S+급 몬스터를 혼자 잡을 수 있을지도.”

    “근데 그게 말이 되냐? 크크크. 그런 식이면 나는 회귀해서 구플이랑 애글 주식 사고, 바트코인 했을 거다 인마. ……카카우 주식도 좀 미리 사고. 게임을 왜 해, 바보야!”

    “그건 그래. 웬만한 겜창 아니면 과거로 돌아가면 다시 겜 안 하지. 다시 처음부터 키운다고? 그게 사람이냐? 사이버 망령이지.”

    선배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담소를 나눈다.

    그 대화 내용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동경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형님, 누님들. 고정 S+급 몬스터 중에 제일 까다로운 게 누군가요?”

    그러자 내 말을 들은 모두가 갑론을박을 펼치기 시작했다.

    “글쎄, 엄청난 수의 언데드 병사들을 부리는 ‘흑룡 오즈’?”

    “아니면 근력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탐욕의 마몬’일까나?”

    “부유섬에서 ‘적룡 모르그마르’를 만났을 때 진짜 죽는구나 싶었지.”

    “역병으로 대륙의 절반 가까이를 몰살시킨 ‘폭식의 벨제붑’은 또 어떻고?”

    “너네 배 타고 바다 위 가다가 ‘질투의 레비아탄’ 만나봤냐?”

    “나는 개인적으로 그레이 시티의 화산이 폭발했을 때 만났던 ‘잿빛 용’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더라. 타임어택이 아주…….”

    “에이~ 그레이 시티에서 제일 끔찍한 건 잿빛 용이 아니라 ‘나태의 벨페골’이지.”

    “용자의 무덤 꼭대기에 ‘색욕의 아스모데우스’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렇게 말도 안 되게 강할 수가 없다더라고.”

    “거인국에 있는 ‘분노의 사탄’은 또 어떻고.”

    “에이, 그렇게 따지면 그린헬에 잠들어 있는 ‘녹색 용’이 더 무섭지!”

    “너희들 설마 용과 악마만 논하는 거야? 2차 대격변 때 ‘두 전쟁군주’들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벌써 잊었어? 그때 용도 악마도 숨도 못 쉬고 숨어 있던 거 기억 안 나?”

    다들 자기가 쫓고 있는 존재들의 무서움과 대단함을 토로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때.

    한 명이 손뼉을 쳐 사람들의 이목을 한데 모았다.

    “자, 사실 어떤 존재가 제일 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할 것 같네. 하지만…… 어떤 존재가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의견 통일이 명확하게 가능할 것이라고 봐.”

    그러자 모든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긴. 답이 정해져 있긴 하지.”

    “맞아. 사실 뭐니뭐니해도 제일 싸우기 싫은 건 ‘그 녀석’이잖아?”

    “다들 불가살(不可殺)이네 난공불락(難攻不落)이네 괴력난신(怪力亂神)이네 해도…… 그것만한 사기 몬스터가 또 없지.”

    그리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화이트 드래곤, 무투룡(武鬪龍) 카프카타렉트.”

    *       *       *

    “화이트 드래곤, 무투룡(武鬪龍) 카프카타렉트.”

    머릿속에 고인물 선배들이 입을 모아 하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들어 허공에서 흰 빛을 내뿜고 있는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카프카타렉트>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4m.

    -이 세상의 모든 용을 다스리는 일곱 군주 중 하나.

    전장, 무투장, 삶을 지배하는 위대한 흰 용.

    “세계는 위협으로 가득하고 모든 삶은 곧 투쟁이다.”

    -카프키타렉트- <신약, 백내장기(白內障記), 『 어느 투쟁의 기록 』>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용들에 비해 작은 덩치.

    하지만 내뿜는 위압감만큼은 압도적이다.

    어쩌면 내가 과거 게이머들의 평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어째서, 용과 악마가 손을 잡았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용과 악마가 손을 잡고 플레이어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3차 대격변 때의 콘텐츠로 출시되려면 아직 십 년은 멀었다.

    고이고 고인 플레이어들이 대규모로 연합하게 되고 고정 S+급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위치 소재가 파악되는 것도 모자라 아슬아슬하게나마 공략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플레이어 연합군에 대응해서 발발하게 되는 메인 퀘스트.

    하지만 지금은 고인물 연합군은커녕 아직 2차 대격변도 일어나지 않은 시점이니만큼 실로 황당무계한 일이었다.

    ‘내가 딱 3차 대격변 직전까지 겪어 봤다가 회귀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정말 윌슨의 긴급 강제 패치인가? 내가 불사조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과거 벨제붑을 죽였을 때 흰 용에 관련된 알림음이 떴었던 적이 있긴 있다.

    <싸움 나락의 흰 용군주 ‘무투룡 카프카타렉트’가 ‘고인물’ 님의 업적에 관심을 표합니다>

    아마도 나는 그때 이 녀석의 어그로도 끌어 버린 것 같다.

    “하기야, 삶을 관장하는 용이니만큼 죽음과 연관된 악마성좌에게도 관심이 많았겠지.”

    심지어 내 어깨 위에는 죽음을 관장하는 용도 있다.

    [난 저 새끼 마음에 안 들어.]

    죽음룡 오즈는 저 위에 있는 무투룡 카프카타렉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내 펫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오즈와 카프카타렉트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듯싶다.

    ‘하기야. 흑과 백, 죽음과 삶의 대립적 관계이니만큼 설정부터가 반대이긴 하네.’

    그래서일까? 카프카타렉트 역시 나와 오즈를 향해 강한 적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편, 윤솔과 드레이크는 내 옆에 바짝 붙은 채 전투 준비를 마쳤다.

    “흰 용? 그런데 관장하는 것이 전장과 무투장, 그리고 삶이라고 되어 있네. 이 셋이 무슨 관계일까?”

    “삶은 곧 전쟁이고 무투장이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해쳐야 하고 남들은 그런 나를 보며 울고 웃고 평가하지. 그게 전장과 무투장의 성질 아니겠나.”

    나는 드레이크의 말이 회귀하기 전 한 고인물에게 들었던 말과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념에 그리 오래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온다.”

    질투의 악마성좌 레비아탄과 흰 용 카프카타렉트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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