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22화 (622/1,000)
  • 622화 불사조 (1)

    “인간은 이 세계에 내팽개쳐진 존재.”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       *       *

    [지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가, 회귀자여?]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털들이 쭈뼛 서고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타고 오른다.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전신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지, 지금 뭐라고?”

    내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파칫!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츠츠츠츠츠츠-

    동시에 머릿속에 어떤 기억 한 조각이 떠오른다.

    지금까지는 전부 환상이었고 사실 현실은 따로 있었다! ……따위의 기분 나쁜 감각은 아니다.

    다만, 잊고 지냈던 오랜 기억을 다시 마주한 것 같은… 그런 요상야릇한 기분.

    그것은 얼마 전, 살인자들의 탑에서 벨페골을 만났을 때 시청했었던 이상한 동영상이었다.

    *       *       *

    세상은 온통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태양이 사라진 하늘, 누런 유황구름만이 가득한 밤하늘에는 불길한 적빛의 별똥별 하나가 떨어진다.

    불타는 대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그리고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한 줄기의 커다란 별똥별 궤적.

    나는 하늘에 길게 그어져 있는 붉은 궤적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별이 떨어지는 곳. 하늘과 땅이

    맞붙는 지점.

    그곳에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거대한 의문의 괴물체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멸망의 어머니 ‘오무아무아’> -등급: ? / 특성: ?

    -서식지: ?

    -크기: ?

    -?

    ‘저게 뭐지?’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눈앞의 거대한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멸망한 세상에 홀로 우뚝 솟은 존재.

    검붉은 빛에 휘감겨 있는 타원형의 길쭉한 그 모습은 마치 현세의 것이 아닌 양 기괴한 모습이다.

    이름부터 외형, 설명까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존재였다.

    ‘저런 몬스터가 있었다고? 아니, 대체 뭐야 여기는?’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내 눈에 새로운 모습들이 들어왔다.

    수없이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

    인간, 오크, 리자드맨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죽어 쓰러져 있다.

    그중에는 얼굴만 봐도 누구인지 알 만한 유명한 랭커들도 다수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의 산 앞에 우뚝 서 있는 한 남자.

    온통 불타고 붕괴해 내리는 대지 위에서 최후까지 서 있는 그의 얼굴은 나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잖아?’

    그것은 나였다.

    회귀하기 전의 나보다 15살은 더 많아 보이는 얼굴.

    거의 50대로 보이는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눈앞에 있는 거대한 몬스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하늘, 길게 그어진 붉은 궤적,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몬스터, 그리고 최후의 플레이어.

    동시에.

    쿠-구구구구……

    몬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하늘의 붉은 궤적이 점점 더 짙어진다.

    별똥별이 그어 놓고 간 긴 자국은 길고도 선명하게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때.

    -띠링!

    귓가에 요란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

    .

    *       *       *

    “뭐, 뭐야 이 기억은?”

    내가 머리를 잡고 비틀거리자 윤솔과 드레이크가 나를 황급히 부축한다.

    “어진아! 무슨 일이야!?”

    “갑자기 비틀거리다니, 불사조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

    윤솔과 드레이크는 황급히 나와 불사조의 사이를 막아섰다.

    오즈와 쥬딜로페도 적대적인 표정으로 불사조를 노려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친구들의 오해를 풀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대체 이게 무슨 기억이지?’

    애초에 이것을 기억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내 것이 아닌 기억, 하지만 그 안에서 들여다본 얼굴은 분명의 나의 것이 맞았다.

    회귀하기 전의 얼굴보다 훨씬 더 삭은(?) 것으로 보아 나이도 꽤나 먹은 것처럼 보이던데…….

    ‘설마 이 모든 게 다 ‘아 X발 꿈’일리는 없고.’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것으로 보아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현실이 맞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일들에 휘말렸다고 해도 지금 내가 딛고 있는 곳이 진짜인지 아닌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대체 이 경험해 보지 못한 기억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삐-

    충격의 여파일까? 저번과 같은 지독한 이명이 내 머릿속을 울린다.

    나는 두 귀를 꽉 붙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혼란으로 흔들리는 내 눈을 마주한 불사조, 녀석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안타깝…… 나의 ……으로…… 딥러닝으로…… 예상한…… 데이터 예측치…… 미래값…… 한계…… 절반…… ……의 부정한 개입……]

    혼란으로 인한 이명 때문에 불사조의 대사 역시도 드문드문 들려온다.

    이명을 감안하고 들어도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뿐.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중, 불사조는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될…… 서버…… 곧 차차 알게 될…… ……의 부정한 개입이 불러…… 재앙……대격변……4차……]

    생각해보니 언젠가 들었던 말 같기도 하다.

    ‘넌 윌슨의 목적을 알고도 이 게임을 사랑한다고 지껄이는 거냐?’

    과거 조디악이 내게 했던 말이다.

    또한 녀석은 벨페골이 ‘가장 무서운 것’ 보여 주는 환상 마법을 걸었을 때 그 악몽 속에서 윌슨을 보았었다.

    [One for All, All for One. Welcome to Closed Beta. The show will start soon.]

    당시 조디악은 윌슨의 이 대사를 듣고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었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처리 2반의 반장 남세나에게 들었던 말도 떠오른다.

    ‘크흠! 뭐 아무튼. 뎀 유니버스 본사에서 그쪽 대책팀을 만든다는 것은 비밀이에요. 윌슨 총수가 직접 관심을 보이고 있다던가 뭐 그런 것들도.’

    윌슨 역시도 분명 조디악이 불러일으킬 어떠한 일련의 결과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윌슨과 조디악, 불사조. 그리고 이 세계.

    이것들은 대체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일까.

    나는 이 관계와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고수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라고 해도 이렇게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입장으로서는 뭘 하면 좋을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어떤 철학자가 그랬던가? 인간은 세계에 내팽개쳐진 존재라고.

    지금껏 그 말이 이렇게 여실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다.

    바로 그때.

    …쿵!

    갑자기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감 좋은 드레이크가 제일 먼저 고개를 틀었다.

    드드드드드드드…

    아주 먼 곳에서부터 땅이 떨리고 있었다.

    진원지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그것은 좌중의 혼란을 걷고 내 머릿속의 이명을 내몰아 버릴 정도로 긴급하고도 또 불길한 것이었다.

    이윽고, 불사조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시작되었군. ‘부정한 개입’이.]

    동시에.

    콰콰콰쾅!

    지진이 일어나 성의 일부를 무너트렸다.

    붕괴해 내린 천장 귀퉁이로 파아란 하늘이 들여다보인다.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푸른 초원 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꿀렁!

    푸른 하늘이 한번 크게 출렁거렸다.

    그리고는 파란색 도화지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친다.

    쩌저저저저적!

    그것은 지금 찢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쩌어어어어억!

    하늘이 찢어지고 균열의 틈새로 밀려들어오는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바닷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소용돌이의 중앙 맨 아래, 깊이로 따지면 대심해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공간에 금이 가자 바닷물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하다.

    동시에, 쏟아지는 바닷물의 폭포 속으로 무언가 음산한 소리가 떠밀려 들려왔다.

    오…오오오!

    그것은 창공 높이 치솟는 뱃고동 소리 같기도 했고 심해에 아득히 울려 퍼지는 고래 떼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르륵! …꾸르륵! 퍼펑!

    무시무시한 마기가 바닷물과 함께 균열을 비집고 들어왔다.

    불사조가 쳐 놓은 결계를 찢어발기고 그 안으로 들어온 불청객!

    그것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거대한 향유고래의 머리에 긴 뱀장어 같은 몸뚱이를 가진 괴물이었다.

    하얗게 물든 대가리, 검은 몸, 그리고 머리에 돋아나 있는 커다란 일각(一角)은 마치 육중한 해머에 맞은 것처럼 반으로 뚝 부러져 있다.

    그 거대한 바다괴물을 목격하는 순간, 나는 오래 전 윌슨이 건넸던 충고이자 경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레비아탄을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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