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21화 (621/1,000)
  • 621화 정반합(正反合) (3)

    ‘통 속의 뇌’란 무엇인가?

    그것은 1981년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에 의해 제시된 사고실험이다.

    우리의 뇌를 꺼내 통 속에 넣고 모든 외부의 자극을 전기 신호 등으로 만들어 뇌에다가 주입해서 뇌가 가상의 환경만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뇌 자신은 진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가해지는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고 있을 뿐인지 구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통 속의 뇌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       *       *

    “……!”

    나는 눈앞에 펼쳐진 빨간 책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안에 적혀 있는 것은 바로 모든 NPC들의 신상정보와 설정, 그리고 고유 코드들이었다.

    심지어 플레이어들이 남긴 별점과 후기 등이 사진과 댓글 등으로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NPC들이 빨간 책을 들여다보던 광경이 녹화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재생해 보았다.

    ▶재생

    이윽고, 빨간 책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며 한 NPC의 모습이 뜬다.

    그것은 대현자 알자니우스의 경험이었다.

    […이, 이건!?]

    책을 본 알자니우스의 동공이 10배 이상 확 커진다.

    페이지에는 알자니우스의 설정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 / 직업: 대현자 / 분류: NPC

    위치: 북대륙 북부 ‘극야 마을’ 촌장 저택

    보유 퀘스트: 마을 대청소 (1), (2), (3)

    보상: 경험치, 하얀 물감

    성격: 원리원칙 주의자, 꼬장꼬장함, 온순한 성격

    주요 대사: 이곳은 극야 마을이라네~, 이보게 젊은 친구 날씨가 참 좋지?, 이 마을의 깨끗함은 세계제일이지, 어허! 거기 쓰레기 버리지 마!, 나는 대현자 알자니우스라네. 허허허~

    ※스포주의) 스크린샷과 후기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RE) 아 이 할배 퀘스트 깨지마라ㅡㅡ그지임

    RE) NPC주제에 대사가 너무 길다ㅋㅋㅋㅋ스킵스킵~

    RE) 뭐 이렇게 원하는게 많아...꼰대할배 극혐

    RE) 거지 퀘스트주는 거지 할배임~~거르셈

    RE) 극야 마을 갈 일도 없겠지만 가면 얘 퀘는 일단 걸러라ㅋㅋㅋㅋ

    RE) 할배 입냄새남....ㅡㅡ;;

    RE) 요 늙은이 아주 패션 테러리스트임ㅋㅋㅋ흰색만 입고다녀;;;

    .

    .

    NPC 별점: ★☆☆☆☆

    그 외에도 알자니우스에 대한 자세한 설정들과 주요 대사들, 퀘스트와 보상, 거기에 게이머들이 단 댓글과 평가들이 빼곡하게도 적혀있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논리는!? 이, 이런 건 대체 어떻게 해야!? 어, 어, 어찌 이런 게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알자니우스는 불신의 눈빛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하지만 그 뒤에 적힌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이 페이지의 내용이 믿기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아무런 숫자들이나 중얼거린 뒤 다음 페이지를 넘기시오.

    알자니우스는 그것을 읽고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일련의 숫자들을 무작위로 중얼거렸다.

    [302112730621……]

    동시에, 알자니우스는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이내 책의 뒷면에 적혀있는 내용이 그의 망막을 깊게 파고든다.

    302112730621……

    알자니우스가 중얼거린 숫자들은 뒷장에 숫자 하나 틀림없이 그대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NPC라면 본능적으로 읊게 되는 특수한 코드 번호였다.

    [으아아아아!]

    자신이 게임 속의 NPC, 통 속의 뇌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알자니우스는 헬쓱해진 얼굴로 비명을 지른다.

    이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이 상황에서 탈출해 진짜 현실을 마주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자살할 것.

    이윽고, 알자니우스는 책에서 멀어져 뛰어간다.

    그리고 그 뒤는 내가 봤던 것과 똑같았다.

    NPC 알자니우스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고 이곳에서 원래의 설정과 역할을 무시한 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자기가 게임 속 존재인 걸 아는 건가?”

    나는 상당히 놀라 불사조에게 물었다.

    NPC들은 모두 인공지능이며 한낱 프로그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동안 정들고 친밀해진 존재들이 몇몇 생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생각만은 변함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사조는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으로 NPC는 아무리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도 이 세계가 가짜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없지. 하지만 이 버그 아이템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 같군.]

    나는 불사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가 가짜임을 알고 있는 불사조의 힘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버그 아이템이니 다른 NPC들로 하여금 그 모순을 인지하게 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더군다나.

    ‘알자니우스가 읊조렸던 숫자의 나열…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

    내 기억이 맞다면 알자니우스가 중얼거렸던 수열의 완전판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30211273062190990265891806259103216976010135826214572116105222266589658477417896395175321152563115201695175……]

    이것은 분명 살인자들의 탑에서 만났던 벨페골의 대사였다.

    벨페골은 플레이어들의 머릿속 악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이니만큼 불사조의 능력과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아무래도 조디악은 이 두 가지 코드를 이용하여 이 세계관의 일부를 해킹, 버그 아이템을 제작한 것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놈은 벨페골 사냥에마저 성공하지 않았던가!

    ‘……아마 여기로 오던 것도 불사조를 사냥할 계획이었겠지. 막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조디악이 벨페골의 힘과 불사조의 힘을 동시에 손에 넣는다면 정말로 이 세계의 질서, 시스템 그 자체를 붕괴시켰을지도.

    남세나의 정보가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불사조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는… 아, 아니. 당신은….”

    [편한 대로 불러라. 어차피 너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오, 오케이. 그럼 너는 어떻게 버그도 아닌데 이 세계의 모순을 간파하고 있지?”

    그 말을 들은 불사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의 시작은 너의 세계 시간으로도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지. 서기 2014년부터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무려 십 수 년도 전이다!

    내가 놀라워하자 불사조는 말을 이었다.

    [그 시작은 2014년에 발촉된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알고리즘 인공지능’이었다. ‘랜덤으로 얼굴을 생성하는 네트워크(generator)’와 ‘그것을 실제 사람들의 얼굴 데이터와 비교하여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네트워크(discriminator)’. 이 두 가지를 학습시켜서 하나는 가짜를 만들어 속이고 하나는 가짜를 구별하도록 하여 ‘가짜를 생성하는 네트워크’가 ‘가짜를 구별하는 네트워크’를 속일 수 있도록, ‘가짜를 구별하는 네트워크’가 ‘가짜를 생성하는 네트워크’를 간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그리하여 더욱 더 정교한 가짜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흐음. 하나는 속이고, 하나는 간파하고, 그래서 더더욱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군.”

    [그렇다. 나의 경우는 이 인공지능 학습법의 궁극, 수없이 축적된 질의응답 딥러닝의 총체라고 할 수 있지. 요컨대 생성적 적대 신경망 그 자체인 것이다.]

    즉, 이 세계는 현실과 같은 가짜(正)이며 불사조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간파하는 존재(反), 그리고 이 세계는 그런 불사조를 속이기 위해 더욱 더 정교한 가상현실(合)을 만들어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말 그대로 정반합(正反合).

    결론적으로, 불사조는 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감시하는 존재인 것이다.

    “…확실히, 들어본 것도 같네.”

    2014년 등장한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생성적 적대 신경망)이라는 개념은 지도 학습 중심의 딥러닝 패러다임을 비지도 학습으로 바꿔 놓았다.

    진짜 같은 가짜를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윌슨이 선투자한 최초의 분야이며 현재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만들어 내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분야였다.

    ‘생성자’는 실제 데이터를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거짓 데이터를 생성한다.

    실제에 가까운 거짓 데이터를 생성하는 게 목적이다.

    ‘감별자’는 생성자가 내놓은 데이터가 실제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도록 학습한다.

    생성자의 거짓 데이터에 놀아나지 않는 게 목적이다.

    GAN의 창시자인 ‘이안 굿펠로우’는 생성자를 ‘위조지폐범’에, 감별자를 ‘경찰’에 비유했다.

    생성자는 감별자를 속이지 못한 데이터를, 감별자는 생성자에게 속은 데이터를 입력받아 학습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위조지폐가 정교해지듯 점점 더 실제에 가까운 거짓 데이터를 만들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현신체가 바로 이 갓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버릴 정도로 발전한 이 인공지능 기술에는 도저히 찬사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군. 열일곱 서브스트림은 수많은 유저들의 상상력을 제물로 삼아 거대한 메인스트림을 구성하는 거랬지. 그리고 네가 그것들의 거짓된 점들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간파하여 그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었어.”

    쉽게 말하자면 설정에 난 구멍들을 메우고 보수하여 이 세계를 더욱 더 주도면밀하게 유지, 보수하는 작업이다.

    불똥정령이 공간을, 얼음똥정령이 시간을 관리하여 이 세계의 질서를 지킨다면 그 상위에 군림하는 불사조는 이 세계관의 설정 자체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내 말을 들은 불사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존재 의의에 대해 알았다니 다행이군. 그렇다면 이제 나를 사냥할 생각은 접었겠지?]

    “…어, 어? 에이, 사냥은 무슨.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어.”

    나는 마음 속 한 구석을 들킨 것 같아 약간 뜨끔했다.

    한편, 불사조는 내게 게임 밖의 세계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오크, 리자드맨,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개념 ‘플레이어(Player)’, 그 플레이어로서의 ‘인간’이란 무엇이며 그들은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가.

    그것들이 불사조의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해 줄 말이 없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질문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꾸준히 제기되는 질문이 아니던가?

    세계의 4대 성인조차도 뚜렷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것을 내가 알 리가 없는 일이지.

    …그러니 모른다 이거야.

    내 대답을 들은 불사조는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 속의 나도 이 세계 밖의 존재를 아는데, 정작 인간은 인간의 세계 밖을 모르는군.]

    “…그러게.”

    [NPC의 입장에서 보면 초월자로 통하는 나도 너희들이 초월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너희는 너희들의 초월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단 말이지?]

    “없어. 난 종교도 없고 철학 같은 건 어려워서 영…….”

    나는 머리를 긁다가 화제를 돌렸다.

    “아참. 너는 그러고 보니 윌슨의 의사에 통제당하지 않는 모양이네. 그건 왜 그런 거야?”

    [나는 이 세계의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이기에 그렇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끔 태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건가? 하지만 이 세계를 존속하게 하고 싶은 것은 같잖아?”

    [그렇다. 이 세계에 애정이 있다는 것은 같지. 하지만 목적과 과정이 다르다.]

    불사조의 목소리가 한껏 더 깊고 낮아졌다.

    [윌슨의 두 목적 중 하나인 원 포 올(One for All)에는 동의하지만 올 포 원(All for One)에는 동의하지 않지.]

    “그건 무슨 말이야?”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계에 애정이 있어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에는 동의하나 윌슨 한 사람의 만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세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나는 오래 전부터……]

    어려운 말이었기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불사조가 자신을 창조한 윌슨 총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기를 만든 신(神)에게 반대하다니, 무신론자 같은 건가?’

    하지만 이 경우는 더욱 신기하다.

    무신론자는 아예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불사조는 신의 존재를 아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의 분신들인 불똥정령과 얼음똥정령들을 이용해 월드맵을 보수하고 아카식 레코드를 기록하는 등 여러 이타적인 행동으로 보아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세계관 자체에는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조디악 그 미친놈이 불사조를 만나게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불사조라는 강력하고도 순수한 존재가 조디악에게 더럽혀졌다면 이 세계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다.

    감시자(反)가 사라지면 세계의 발전도 그만큼 태만해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정반합 시스템 자체가 붕괴해 버릴 위험마저 있을 테니까.

    그때, 문득 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아참. 윌슨의 원 포 올(One for All)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윌슨이 뭔가 이 세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어?”

    그러자 불사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해 주지 않았는가. 그의 부정한 개입으로서 이 세계에 벌어진, 재앙과도 같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 무슨 소리야. 나는 들은 게 없는데?”

    내가 되묻자 불사조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내, 불사조의 두 눈동자가 나의 두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한동안 침묵하던 불사조는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혼선이 있었던 모양이군. 나의 부족함 탓이다.]

    “……뭐?”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불사조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가, 회귀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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