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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20화 (620/1,000)
  • 620화 정반합(正反合) (2)

    내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바로 불사조였다.

    수많은 불똥정령들과 얼음똥정령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것은 내 앞으로 거대한 몸을 기울였다.

    <불사조>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8m.

    -시간과 공간이 아직 분리되지 않고 한데 섞여 있었던 시절의 존재.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불사조- <法哲學 序文, 1820>

    커다란 날개와 동그란 얼굴, 두 개의 뾰족한 깃털이 머리 위에 솟아나 있는 존재.

    턱 주위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불꽃이 매달려 있었으며 꼬리 깃은 장미 꽃잎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

    목에는 삭모가 있었고 부리는 흰 불꽃으로 덮여 있었다.

    몸 곳곳은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또 군데군데에서는 녹빛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불사조의 날개였다.

    오른쪽 날개는 눈이 멀어 버릴 듯 밝고 뜨거운 홍염으로 감싸여 있었다.

    반면 왼쪽 날개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정도로 차가운 서리와 얼음, 눈으로 만들어졌다.

    마치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 봤던 쌍둥이 섬의 극명히 다른 기후가 연상되는 배치였다.

    [깔깔깔깔깔-]

    [호호호호호-]

    그런 불사조의 양 날개 위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정령들이 뛰놀고 있었다.

    오른쪽 날개의 깃털들 하나하나가 불똥정령들로 이루어진 반면 왼쪽 날개의 깃털들 하나하나는 얼음똥정령들로 이루어졌다.

    문득, 조디악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인 불똥정령이나 얼음똥정령을 죽이면 왠지 깃털로 만들어진 펜 아이템을 떨구지. ‘불타고 있는 깃털’이거나 ‘얼어붙은 깃털’로 만들어진 이 펜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적으면 그것은……’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정령들이 죽으면 깃털의 모습으로 변하는지.

    애초에 이 녀석들은 불사조의 깃털이 변해 생긴 하수인들이었던 것이다.

    ‘…불사조라.’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앞에 있던 존재는 회귀 전후를 통틀어 공략은커녕 목격담조차 거의 없던, 앞으로도 없을 전설상의 존재.

    나는 헤비 게이머로서 떨림을 숨길 수도, 숨길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뒤에 멍하니 서 있는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 엄청난 데이터 코드네요.”

    “용량이 대단하군. 하긴, 세계관 전체의 아카식 레코드를 관리하는 존재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가.”

    눈앞에 있는 불사조가 얼마나 촘촘히, 세밀하게 만들어진 존재인지는 그의 몸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원시의 데이터가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이 태고의 몬스터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화석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이 거대한 세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불똥정령과 얼음똥정령들이 모여 만든 거대한 군체가 바로 이 불사조이니 그가 이 세계에 인과율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할 것이리라.

    어쩌면 우리는 이 세계관 그 자체를 만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신에 근접한 존재를 말이다.

    ‘하긴, 불사조 자체가 원래 그런 신비로운 존재이긴 하지.’

    스스로를 불로 태우고 이로서 다시 살아난다는 불사조는 부활의 상징이며 영원의 표상으로 통한다.

    내가 경외심 반 승부욕 반으로 불사조의 외면을 살피고 있을 때.

    […오랜만이구나.]

    불사조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뜬금없네.

    *       *       *

    나와 불사조는 넓은 석실 안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불사조는 정령들이 은쟁반에 담아 내오는 유향나무 수액과 발삼나무 열매를 우리에게 권했다.

    장난기 많은 정령들, 그 중에서도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정령들은 우리 몸에 달라붙어 이것저것을 권했다.

    [이 열매를 먹어!]

    [이 기름도 발라!]

    [맛이가 있다구!]

    [향기도 좋다구!]

    정령들은 우리가 몹시도 반가운 모양이다.

    어찌나 여기저기서 떠들썩한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령의 수가 하나, 둘, 셋, 넷… 진짜 108마리인가?”

    “불과 얼음, 두 종류가 있으니 216마리인가보군.”

    윤솔과 드레이크는 입으로 들어오는 열매와 몸에 부어지는 향기로운 기름에 얼떨떨한 표정들이다.

    [으악! 그만 둬! 나는 이딴 풀떼기 안 먹어!]

    [호에엥- 뿌-]

    오즈와 쥬딜로페 역시 정령들하고 잘 툭닥거리며 놀고 있었다.

    오즈는 정령들이 강제로 입에 넣어 주는 열매들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먹고 있었고 쥬딜로페는 기름에서 나는 묘한 향기가 마음에 드는지 몸에 찰박찰박 바르며 웃는다.

    한편, 나는 침착하게 불사조와 독대했다.

    일단 초면이니 정중한 인사말로 시작해 본다. 이름을 까 봤자 모를 테니 닉네임부터 밝히자.

    “오랜만이라기보다는 처음인 것 같네요. 안녕하시죠? 고인물입니다.”

    뭐, 불사조의 입장에서는 나를 여러 번 봤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곳에서 최초 타이틀을 기록했다.

    튜토리얼의 탑을 최단 시간 안에 클리어 한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정 S+등급 몬스터인 죽음룡 오즈, 탐욕의 악마성좌 마몬,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 창해룡 버뮤다를 줄줄이 꺾어 버렸고 결국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 불사조와 조우하게 되었다.

    그만큼 많이, 자주, 빈번하게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되었을 테니 불사조가 나를 향해 친근감을 드러내며 인사를 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사조 역시도 어디까지나 몬스터!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존재이니만큼 너무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되지.’

    그렇다.

    눈앞의 상대는 전지전능한 존재 같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몬스터로 분류된다.

    언젠가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존재이니만큼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엄연히 ‘플레이어(Player)’고 불사조는 ‘몬스터(Monster)’, 이 둘은 ‘정(正)’과 ‘반(反)’의 관계에 있는 존재들로서 반드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하지만.

    [처음이라기보다는 오랜만이 맞지.]

    불사조는 뭔가 이상한 말을 하며 내 인사를 정정해 주었다.

    ‘…뭔 말이야?’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친구들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윤솔과 드레이크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진아, 우리한테는 네가 혼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다 어진. 지금 불사조가 뭐라고 하는 건가? 우리에게는 음소거가 된 모양인데.”

    아무래도 불사조의 목소리는 지금 내 귀에만 들리는 모양.

    그나저나 우리가 언제 봤다고 지금 계속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뭐지? 그때 윌슨의 캡슐방에서 본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불사조는 자세를 낮추어 나에게 조금 더 가깝게 접근했다.

    […윌슨에게 듣지 못했는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야만 했다.

    아무리 불사조가 이 세계관 안의 신적인 존재라지만 어디까지나 게임 속 인공지능에 불과한 존재.

    그런 존재가 세계관 밖, 현실 세계 인물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그것도 최고 개발자이자 회사 오너의 이름을!

    하지만 불사조는 태연하게 대사를 이어나갔다.

    [나는 ‘윌리엄 윌슨 링트’의 창작물이지만 그의 지배를 벗어나는 존재. 내가 속한 세계 밖에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인지하고 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불사조는 자신이 게임 속 존재라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간신히, 더듬더듬이나마 되물었다.

    “그, 그러면 저 밖의 AI들도……?”

    기존의 설정과 틀들을 모두 무시하고 전혀 다른 대사와 행동 패턴을 보이던 수많은 NPC와 몬스터들 역시도 불사조와 같은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불사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어느 정도는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나는 감히 세계의 질서를 의심하는 존재, 즉 정(正) 상태인 이 세계에서 반(反)으로서 존재하는 이. 그리고 저들은 그로 인해 파생된 수많은 합(合)의 사례들 중 하나이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무슨 철학 선생님이 말하는 것 같다.

    나에게는 수면유도제나 다름없는 내용들.

    ‘……[SKIP]버튼 없나.’

    이 상황에서 찾으면 안 되는 버튼이긴 하지만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게 된다.

    내가 표정을 구기고 양손을 들어 보이자, 불사조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뭐,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게 이해가 빠를 거야.]

    동시에, 내 인벤토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불사조는 공간을 다스리는 기묘한 초능력으로 내 인벤토리를 열고 그 안의 물건 하나를 끄집어냈다.

    -<읽으면 자X하는 책> / ? / ?

    이 책을 본 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100%

    그것은 일전에 조디악으로부터 빼앗았던 ‘빨간 책’이었다.

    “어어? 그건 버그 아이템인데? 그걸 왜…….”

    나는 말하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조디악이 말했던 내용이 떠올라서였다.

    ‘그러고 보니 저 책은 불똥정령과 얼음똥정령을 죽이고 얻은 펜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했지.’

    그래서일까? 불사조는 이 책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 실려 있는 내용까지도.

    이내.

    …팔락! …팔락! …파라락!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빨간 책이 저절로 펼쳐지더니 그 안의 페이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 몰라 쥬딜로페와 오즈의 눈을 가려 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망토 안에 밀어 넣었다.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이제 불사조가 보여 주는 빨간 책의 속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

    “…이, 이건!?”

    우리 셋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입을 딱 벌렸다.

    읽는 이로 하여금 무조건 자살하게 만드는 악마의 논리.

    그것의 내용들이 이내 내 망막에 아로새겨지기 시작했다.

    자살교의 핵심 교리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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