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19화 (619/1,000)
  • 619화 정반합(正反合) (1)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법철학의 원리》 中-

    *       *       *

    나를 깨운 것은 팔 할이 알림음이었다.

    -띠링!

    <히든 던전 ‘파르테논(Parthenon)’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귓가에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헉!? 기절했었나?”

    자동 로그아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보니 기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캡슐 속 육체의 바이탈 사인을 체크해 본 뒤 별 이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눈을 뜬 것과 비슷한 타이밍에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상체를 일으켰다.

    “어, 어라? 우리는 분명 소용돌이 안으로…….”

    “여기는 바다 밑인 건가?”

    윤솔과 드레이크는 일단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지막 기억은 악마의 만찬 호가 완전히 파괴되고 모든 것들이 물 밑으로 처박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은 바다가 아닌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 왜 예전에 이런 노래 가사가 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 년 살고 싶어♬

    딱 이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 넓은 초원이 끝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소용돌이 중앙의 포탈은 우리를 전혀 다른 아공간으로 전이시킨 모양이다.

    “……여기는 처음 와 보는데.”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초원은 아름다웠다. 예전에 봤던 창해룡 버뮤다의 산호숲보다도 더.

    광활한 초원 위에는 빨간 지붕에 흰 몸을 가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하, 안경 맞출 때 초점 검사하려고 보여 주는 사진 같군.”

    드레이크는 푸른 초원 위 빨간 지붕의 하얀 집들을 보며 웃었다.

    그 외에도 짤똥한 풍차들이 돌고 냇물 위로 돛단배가 떠가는 등 여러모로 환상적인 풍경이다.

    마치 동화 속 삽화의 한 장을 골라 그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어엇?”

    그때, 윤솔이 초원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깜짝 놀란다.

    나와 드레이크 역시도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윤솔이 손을 뻗어 가리킨 드넓은 밭에는 각종 야채와 신비로운 화초들이 만발해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점이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밭의 작물들을 가꾸고 있는 존재.

    그 낯익은 얼굴들을 보고 놀란 것이다.

    “저, 저건 몬스터잖아요?”

    “NPC들도 있다!”

    윤솔과 드레이크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초원을 돌아다니고 있는 존재들은 전부 다 NPC, 혹은 몬스터들이다.

    D급 몬스터들이 밭을 갈거나 거름을 뿌리며 평화롭게 일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1차 대격변이 시작된 이래 멸종했다고 알려진 몬스터들이었다.

    심지어 간혹 정령과 거인, 천사도 보였다.

    용과 악마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외형 그대로.

    거인은 그 거대한 몸으로 풍차를 만들었고 정령들은 그 풍차를 돌려 바람 에너지를 만든다.

    천사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씨와 비료를 뿌린다.

    누구도 누구의 노예가 아니었다. 몸도 정신도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

    풍차에서 만들어진 바람은 보리밭과 담배 밭에 금빛 푸른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공통점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전부 다 ‘빨간 책’을 읽고 자살한 이들이야!”

    NPC들은 지금껏 빨간 책의 유포 경로를 역추적하며 익숙해졌던 얼굴들이다.

    그 와중에는 몬스터들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흠, 그런데 그 와중에 적폐망령은 없네.”

    인간 지네의 몸을 빼앗아 살아남았던 ‘그 녀석’은 이곳에 안 보인다.

    하지만 놈을 제외한 모든 자살자들은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데? 자세히 보니 뭔가가 이상하다.

    자살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더욱 더 신기한 것은 그들이 보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꺄르르륵!]

    머리에 꽃을 꽂고 알록달록 염색된 치마를 입고 꽃밭을 뛰놀고 있는 존재.

    그는 북방의 한 마을에서 온 NPC로 늘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는 꼬장꼬장한 성격이라는 설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결벽증 환자답게 옷은 언제나 깨끗한 흰 색만 걸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을 터.

    하지만 지금 보이는 그는 어떤가?

    알자니우스는 대현자라는 타이틀 따위는 벗어던지고 마치 소녀처럼 꽃밭을 뛰놀고 있다.

    흰 옷에 알록달록 꽃물이 드는 것을 즐기며 말이다.

    “저 NPC…… 예전에 조디악이랑 논리 싸움을 벌이다가 패배해서 절벽으로 뛰어내렸었지?”

    그런 존재가 왜 여기에, 그것도 저런 모습으로 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상한 행동 패턴을 보이는 존재는 알자니우스 하나가 아니었다.

    [껄껄껄걸-]

    [우훗!]

    [큭큭큭큭…]

    이곳에 있는 모든 NPC들이 프로그래밍 된 대사나 설정들을 무시하는 행위를 벌이고 있다.

    가령, 청순가련 여고생이 껄껄 웃으며 떡볶이를 혼자 1인분 이상 먹고, 마초 아저씨가 화장대에 앉아 네일아트를 한다.

    남자들끼리 팔짱을 끼고 다녔고 여자들끼리 키스를 주고받는다.

    도둑이 성서를 읽고 있었으며 신관이 부두교 의식에 심취해 있다.

    대장장이가 빵을 만들고 빵집 주인이 망치로 철을 두드리고 있었다.

    “???”

    나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뭘까? 이 모든 기존의 역할과 설정들이 무시되는 사회공동체는.

    그때.

    [그르르르르……]

    내 옆으로 지나가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바실리스크! 검은 비늘의 사생아!

    이 녀석은 뒤뚱거리며 내 옆을 지나간다.

    [……헉?]

    내 어깨 위에 있던 오즈가 괜시리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찔리는 구석이 많은 모양.

    하지만 바실리스크는 오즈를 한번 흘끗 쳐다보더니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나간다.

    어깨에 메고 있는 쟁기로 밭을 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듯한 태도.

    “……진짜 뭐지?”

    나는 멀어지는 바실리스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악마와 용을 빼놓고는 누구나 이 안에 들어올 수 있죠.]

    나에게 말을 거는 여자가 있었다.

    NPC 록사나

    큰 키에 흰 피부, 짙은 눈썹을 가진 전형적인 북방 여자다.

    ‘누구지?’

    나는 처음 보는 NPC의 모습에 잠시 의아해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이히히히?”

    그렇다. 북방 가혹한 설산의 필드보스 이히히히가 여기에 있었다!

    놀랍게도 멀끔한 생전의 모습으로 말이다.

    [놀랐나요?]

    록사나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내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오즈를 향해 말했다.

    [여기 있는 존재들은 모두 삶에 질려 버린 이들이죠. 반복되는 일과와 희망도 비전도 없는 운명에 지친.]

    “…….”

    [이곳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안락한 공간. 누구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강요하는 대사도 강제하는 행동 반경도 없죠.]

    록사나는 보리밭에서 얼음땡을 하며 노는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자기가 하던 저세상 얼음땡과는 사뭇 다른 모습.

    이내 그녀는 초원의 언덕 한 편을 가리켰다.

    [이곳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저쪽으로 가 보세요. 아 참, 그 검은 도마뱀이 용이라면 떼어 놓고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것이 마지막 대사였다.

    록사나는 이내 다른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야채밭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널찍하게 펼쳐진 구릉 위에 성 하나가 보인다.

    성 자체는 상당히 오래되어 보였다.

    동서로는 약 30미터, 남북으로는 약 70미터에 이르는 꽤 커다란 고성(古城).

    기단(基壇) 이상의 부분은 전부 아름다운 백대리석으로 시공되어 있다.

    엄숙하고 장중한 느낌의 도리아식 기둥이 동서면으로는 각각 8개, 남북면으로는 각각 17개가 서 있었다.

    기둥의 가운데가 양끝보다 두껍게 설계되어 긴 기둥의 가운데가 오목하게 보이지 않아 이상적인 균형미를 뽐낸다.

    황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각상이 신전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것은 ‘올빼미’를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구릉을 올라 성으로 향했다.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성을 한 바퀴 빙 둘러본 결과, 우리는 그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이 없잖아?”

    성문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성.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그때.

    키이이잉-

    흰 성벽에 갑자기 파란 원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커다란 차원문으로 바뀌었다.

    “……포탈?”

    눈앞에서 포탈이 생겨나는 것을 보다니. 아마 안쪽에 있는 존재의 소행인 것 같다.

    ‘의지만으로 포탈을 만들어 낸다고?’

    보통 힘으로 될 일은 아니다. 아마 시공간을 다루는 것에 상당히 익숙한 존재인 모양.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벽에 생겨난 포탈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내 몸을 감싸는 포근한 기운이 있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좋은 온기.

    마치 한겨울의 쌀쌀함과 한여름의 더위를 한 데 섞어 놓은 듯한 봄 날씨.

    이윽고.

    내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들어왔다.

    성 안의 광활한 공간.

    드넓은 광장을 꽉 채우고 있는 눈부신 존재들.

    <백팔번뇌 불똥정령> -등급: A+ / 특성: ?

    -서식지: ?

    -크기: ?

    -꽤나 큼지막한 불덩어리. 모습과 크기는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인다.

    <백팔번뇌 얼음똥정령> -등급: A+ / 특성: ?

    -서식지: ?

    -크기: ?

    -꽤나 큼지막한 얼음덩어리. 모습과 크기는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인다.

    [쨔잔! 지젼귀여운 우리였습니다!]

    광장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무수히 많은 불똥과 얼음똥들이었다!

    녀석들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호감을 표시한다.

    [이 녀석이야? 각종 ‘최초’ 기록으로 아카식 레코드에 이름을 도배해 놓은 게?]

    [오이오이! 일전에 어비스 터미널에서는 고마웠다구! 신세 졌어!]

    [벨페골하고 싸웠던 바보가 얘네 맞지? 끝내줬어!]

    [안녕! 그동안 너희들의 활약상 잘 보고 있었어!]

    주위를 감싸는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들.

    녀석들 덕분에 성 안의 온도가 춥지도 덥지도 않게 유지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 관리자들 위의 존재가 이내 불과 얼음의 파도를 헤치고 우리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 위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

    수없이 많은 불똥정령과 얼음똥정령들을 거느리고 있는 존재.

    그림자의 모양은 흡사 거대한 올빼미를 보는 듯하다.

    그 초월적인 존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오래 전 윌슨의 캡슐방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정 S+등급의 몬스터. 이 세상을 지배하는 열일곱 서브스트림.

    ……그리고 그중 유일하게 아직 미완성된 존재.

    [오랜만이군.]

    불사조가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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