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16화 (616/1,000)
  • 616화 자X교 (5)

    [뱃사람이 죽을 곳은 바다 위.]

    치 카이의 고유 설정 때문일까?

    그녀는 단순히 어딘가로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항로를 크게 벗어난 쪽으로 타륜을 잡기 시작했다.

    기기기긱…

    악마의 만찬 호는 마트료시카가 있는 곳이 아니라 더 멀고 외딴 바다를 향해 뱃머리를 틀었다.

    -띠링!

    <기혹한 바다 ‘생존불가해역(生存不可海域)’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고인물, J…>

    원래대로라면 이곳은 배로 나아갈 수 없는 항로이다.

    요 앞쪽부터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폭풍우와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격류, 가혹한 맹추위가 지배하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바다를 정복했다던 전대의 해적왕 치 카이가 자살할 생각으로 배를 몰아가는 곳이니 오죽할까?

    ……그러나,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침몰해야 할 악마의 만찬 호는 지금 의외로 순탄하게 항로를 헤엄쳐 나아가고 있었다.

    <‘창해룡’이 쓰러졌습니다>

    <심해의 수원(水源)이 사라졌습니다>

    <‘하해(下海)’를 제외한 모든 바다의 수위가 낮아집니다>

    <바다의 잔물결들이 모두 잡힙니다>

    <해풍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위의 지형 변화들은 앞으로 720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저 깊은 바다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창해룡 버뮤다가 쓰러졌기에 다행스럽게도 전 바다가 잠잠해진 것이다.

    때문에 악마의 만찬 호가 침몰하는 일은 없었다.

    “타이밍이 좋았군.”

    창해룡을 진즉에 잡아 놓은 덕분에 운 좋게도 폭풍우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디악 역시도 마찬가지다.

    “푸스스스. 그러고 보니 네놈 유튜뷰 봤다. 설마 창해룡 버뮤다도 잡은 거냐?”

    “상상에 맡기지.”

    나와 조디악은 또다시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파캉! 쿠르르르륵!

    깎단과 악몽귀갑이 스파크를 튀기며 부딪쳤고 시커먼 불길과 시커먼 비늘이 공격과 반사를 주고받는다.

    퍼퍽! 퍼퍼퍼퍽!

    사방팔방으로 튀는 불꽃과 반사 데미지, 스플레쉬 데미지들은 갑판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바다괴물들을 꿰뚫고 지나간다.

    갑판이 쩍쩍 갈라지고 그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죄다 부서지고 불타 버렸다.

    [그어어어어…]

    [키이이익-]

    [아옭옭!]

    중장갑을 두르고 다니는 고대의 판피어도, 육중한 몸을 가진 거대 두족류도,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갑각류도, 거구의 몸을 가진 거북도, 넓은 지느러미를 가진 개구리도.

    모든 바다괴물들은 페이즈의 구분 없이 썰려나가고 있었다.

    특히나 조디악은 변경된 항로에서 처음 목격되는 신종 바다괴물들도 쓰레기 치우듯 죽여 버리고 있다.

    몬스터들의 평균 위험 등급이 A이상임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신위였다.

    그때.

    …퍼엉!

    물무리가 높게 융기하며 그 안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바다망령, 심해마귀 등등으로 불리며 해상 필드의 보스로 군림하는 존재.

    악마의 만찬 호에 탑승하는 플레이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몬스터가 나타났다.

    바로 씨어데블이다!

    [제물 주…… 케흑!?]

    하지만 그 공포스러운 명성과 걸맞지 않게, 놈의 죽음은 너무나도 순식간이었다.

    퍼억! 콰콰콰쾅!

    드레이크가 귀찮다는 듯 쏘아 보낸 화살 한 대가 헤드샷으로 꽂혔고 거기에 김정은이 소환한 거대 불덩이에 연달아 피격!

    가뜩이나 방어력과 체력이 약한 씨어데블은 그렇게 리타이어되었다.

    A+등급의 필드보스 몬스터가 순식간에 썰려나갈 정도로 나와 조디악의 싸움은 치열한 것이었다.

    ‘이 자식, 엄청 강해졌는데?’

    나는 조디악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고인물 메타로만 싸워서는 이제 조금 힘들다.

    마동왕 메타까지 동원한다면야 낙승일 것 같은데…… 과연 이 사이코에게 내가 마동왕이라는 사실을 알려도 괜찮을까?

    ‘괜찮을 리가 없지.’

    나는 조디악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의 특성은 ‘내일모레’, 데미지를 무시하거나 감소시키는 것도 아니고 할부로 차차 나눠받는 식이니 딱히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일이 아주 귀찮아진 것이다.

    “푸스스스…… 머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조디악은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너는 이제 나 못 이겨. 나는 도트 데미지조차 할부로 나눠 입을 수 있거든.”

    “…….”

    “네 친구인 마동왕이라는 놈이 와도 이제 날 이길 수는 없을 거야. 나는 애초에 그놈보다 스피드가 훨씬 빠르니까.”

    “…….”

    “푸스스스스! 물론 너희 둘이 한 몸으로 합쳐진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잖아?”

    조디악은 계속해서 나를 향해 깐족거린다.

    확실히, 고인물은 조디악보다 빠르지만 한 방 결정력이 부족하다.

    마동왕은 한 방 결정력이 있지만 조디악을 잡기에는 스피드가 부족하다.

    ‘어쩔 수 없나.’

    이쯤에서 썩은물 메타를 공개해야 할 것인가?

    나는 여차하면 진짜 힘을 드러내서라도 조디악을 패죽일 생각이었다.

    놈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그때.

    옆에 있던 윤솔이 김정은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게임을 망하게 하지 못해서 안달이에요?”

    윤솔은 화난 목소리로 김정은을 다그쳤다.

    “이 게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지 알아요? 이 세계에서의 삶을 제 2의 삶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구요! 당신들이 하는 고의 트롤링은 정말로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행동이에요!”

    아주 원론적인 비난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사이코들에게는 정상적인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호호호, 그래. 네깟 년은 감히 짐작도 못 하겠지. 우리 아나키스트들의 숙명을.”

    김정은은 윤솔을 깔아보며 경멸스럽다는 듯 비웃는다.

    하지만 윤솔도 지지 않고 그녀에게 맞섰다.

    “숙명은 무슨 숙명. 그냥 이 게임이 싫은 거지!”

    “호호, 그게 아니라니까?”

    “……앗, 그러면 혹시.”

    윤솔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식간에 차갑게 바뀌는 표정.

    “……히익.”

    방철우, 방철해는 이 표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고인물과 같이 있을 때가 아니면 나오는 ‘마녀’ 그 자체의 표정!

    윤솔은 차갑게 중얼거린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가망이 없어서일까.”

    김정은은 작은 속삭임을 용케 듣고 불쾌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뭐가 가망이 없어?”

    “……아뇨, 그냥. 혹시 그런 짓을 못하면 위로 못 올라가는 발컨허접인가 해서요.”

    “뭐, 뭐? 너 지금……… 그 싸가지 없는 모습을 저 변태도 아냐?”

    “으음? 저번에도 비슷하게 물어보신 것 같은데?”

    윤솔은 쿠잉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른다고요. 앞으로 알게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구요.”

    “…….”

    김정은은 순간 할 말을 잊었지만 곧 다시 안경을 고쳐 쓰며 한발 물러났다.

    “센 척도 딱 방금까지야. 오늘은 운명이 우릴 도와줄 거거든.”

    “푸스스스. 맞아. 오늘은 정말 왠지 느낌이 좋단 말이지.”

    그런 말을 조디악 역시 되풀이하고 있었다.

    확실히, 둘이 같이 다니는 이유가 있다.

    윤솔은 혀를 차며 물었다.

    “죄없는 NPC들을 버그 아이템으로 소멸시키는 게 운명인가요? 참 잘나신 운명이네요.”

    김정은은 억지로 입을 비틀어 올리며 조소했다.

    더 이상 윤솔의 기에 눌리기는 싫은 모양이다.

    “어머? 이게 버그 아이템인지는 어떻게 아니? 웃기셔~ 이거 합법적으로 게임 안에서 제작한 거야~”

    김정은은 깔깔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빨간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읽으면 자X하는 책> / ? / ?

    이 책을 본 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100%

    버그가 가미된 것이 확실해 보이긴 하지만 일단 아이템인 것은 맞다.

    김정은은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빨간 책의 겉표지를 슬슬 어루만진다.

    나는 잽싸게 손을 뻗어 옆에 있던 드레이크의 눈을 가려 주었다.

    “……보지 마, 드레이크!”

    “음! 알고 있지만 고맙다.”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행여나 안의 표지를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뒤로 물러났다.

    김정은은 이제야 기세를 제압했다고 생각했는지 여유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책을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를 몇이나 죽였는지 모르겠다고.”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라면 분명 ‘불똥정령’과 ‘얼음똥정령’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귀여운 친구들은 윤솔이 게임 속으로의 첫 여정(천공섬 레이드)을 내딛었던 순간에도 함께했던 존재이니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굉장히 친숙한 존재였다.

    따라서 윤솔과 드레이크는 불똥정령을 죽여서 버그 아이템을 제작했다는 김정은의 말에 매우 불쾌해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뭐?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를 죽였어?’

    당연하게도, 나는 회귀 전이나 후나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를 죽여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각종 커뮤니티 등에서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를 죽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먼저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인 불똥정령이나 얼음똥정령을 죽이면 왠지 깃털로 만들어진 펜 아이템이 떨어진다.

    ‘불타고 있는 깃털’이거나 ‘얼어붙은 깃털’로 만들어진 이 펜이 잉크를 써서 종이에 적으면 그것은 글자가 된다.

    딱히 부가적인 기능은 없는 줄로만 알았던 그 펜이 아무래도 버그 아이템의 핵심이 되는 것 같았다.

    “호호호, 하지만 자세한 레시피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지. 물론 너희들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고~”

    해커의 기질이 다분한 김정은은 빨간 책을 흔들어 보이며 우리를 조롱한다.

    그러나.

    나는 빨간 책의 제작법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무엇보다도 주목하고 있는 사실은…….

    ‘너희가 감히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에게 손을 댔다는 것이지!’

    아마 조디악 패거리의 여유로운 태도로 미루어 보아 놈들은 불똥정령이나 얼음똥정령을 해친 패널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 패널티’가 제대로 밝혀지려면 아직 몇 년 정도는 남았다.

    “……후후후후. 그래. 그 수가 있었군.”

    내가 음침하게 웃기 시작하자 조디악 패거리뿐만이 아니라 윤솔과 드레이크마저 흠칫한다.

    특히나 조디악은 나의 이런 표정에 PTSD가 도졌는지 반사적으로 손을 덜덜 떤다.

    억지 웃음은 덤이다.

    “……푸, 푸스스스, 뭐야. 허세냐? 표정 한번 음산하군.”

    조디악이 내 표정을 지적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음산하다고 하는 것인지 기가 막힐 노릇.

    하지만 나는 조디악의 말을 듣지 않고 이미 단신으로 조디악 패거리의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지옥을 보여 주마.”

    나는 조디악 패거리를 향해 호언장담했다.

    진짜 힘을 숨기고도 눈앞의 이 녀석들을 싸그리 몰살시킬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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