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자X교 (4)
<인간 지네> -등급: S / 특성: 어둠, 언데드, 하수인, 벌레, 악귀, 맹독, 백전노장, 잠복, 지진, 나포, 과식, 흡혈, 고속재생, 갹출, 돌격대, 격리수용
-서식지: ‘칼침의 탑 8층’
-크기: 44m
-……(이하중략)……이렇게 해서 태어난 괴기스러운 언데드, ‘데스나이트 실패작’들의 융합체가 바로 이 ‘인간 지네’인 것이다.
저 길고 굵은 바디를 어찌 잊겠나.
썩어 문드러져 가는 몸, 데이터 과부하로 붕괴되고 있는 안면, 돌아 버린 눈알, 날카롭게 돋아난 기형치들, 온몸에서 불타는 듯 끓어오르는 시커먼 독 기운.
내가 지금껏 봤던 몬스터들 중에 그로테스크함으로 따지면 ‘벨제붑의 아들’과 함께 공동 1위다.
더군다나 저 얼굴은 나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크-아아아아악!]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 것 같은 저 표정.
놈은 바로 적폐망령이었다!
과거 내가 만들어 낸 도플갱어가 무수한 전장과 사선을 넘으며 변질되고 또 변질된 모습.
……물론 말이 도플갱어지 놈에게 더 이상 나와 닮은 신체 부위는 없었지만.
“데스나이트에서 인간 지네로 옮겨 갔던 건가? 이놈도 정말 생명력 하나는 오지는군. 이쯤 되면 진짜 미운 정이라도 들 것 같은데…….”
매번 죽은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지 못해서 항상 떨떠름했는데 결국 여기서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벌써 이게 몇 번째 만남인가 싶다.
그때.
등 뒤에서 윤솔과 드레이크가 앞으로 나섰다.
“어진아. 쟤랑 자꾸 얽히게 되는 것 같은데…… 여기서 확실하게 제거해 두는 게 낫지 않을까?”
“내 생각도 그렇다, 어진. 여기서 확실하게 죽여 버려야 후환이 없다.”
친구들은 눈앞에 있는 적폐망령의 가공스럽도록 질긴 목숨줄에 적잖이 경악하고 있는 눈치다.
하지만!
“……흐음.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나는 이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위한 설계를 하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 역전의 찬스가 아니던가.
“저 녀석에게 죽는 것은 3류. 저 녀석을 죽이는 것은 2류지. 1류라면 저 녀석을 되려 나에게 유리한 곳에 역이용 해먹을 수 있어야 해.”
“……?”
“……?”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당최 눈앞의 저 끔찍한 괴물을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
하지만 나는 벌써 얼추 각을 세웠다.
“너를 또 상대하기엔 여벌의 심장을 담가 놓은 포션 값이 아깝지.”
더군다나 놈은 이미 수많은 몬스터들의 특성을 흡수해 공격 패턴도 굉장히 다채로울 것이다.
상대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간 낭비다.
그런 고로,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들었다.
-<읽으면 자X하는 책> / ? / ?
이 책을 본 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100%
그것은 바로 잭 메리듀에게서 빼앗은 ‘빨간 책’!
그것을 보는 순간 조디악과 김정은의 입에서 욕설이 쏟아진다.
“으아아아! 저걸 빼앗겼어?! 잭 이 멍청한……!”
“저거 하나 찍어 내는 데 얼마나 힘든데! 아오!”
놈들의 아우성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크-워어어어억!]
나는 원본을 향한 증오심으로 달려드는 적폐망령을 향해 거침없이 빨간 책을 펼쳐 보여 주었다.
‘이히히히에게도 통했으니 저 놈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이 빨간 책의 효과가 몬스터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던져 본 수였다.
물론 통하지 않는다면 바로 다음 계획으로 물 흐르듯 넘어가야지.
……하지만, 내 생각보다도 이 빨간 책의 효과는 더욱 강렬했다.
[커억!?]
적폐망령은 원래도 컸던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뜨고는 혼란스러워한다.
“안 돼! 보지 말란 말야!”
조디악이 화염벽을 만들어 나와 적폐망령의 사이를 갈라 놓았지만 이미 늦었다.
[꺄-아아아아악!]
적폐망령은 인간 지네의 긴 몸을 이끌고 내게서 몸을 틀었다.
놈이 향한 곳은 바로 대현자 알자니우스가 몸을 던진 바로 그 계곡이었다.
콰쾅!
앞을 가로막는 얼음덩어리 몇 개를 그대로 들이받아 부순 적폐망령은 바닥도 없는 깊은 크레바스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후두둑… 후둑…
안에 무엇을 품고 있을지 모를 어둠은 그대로 적폐망령을 아득히 삼켜 버린다.
조디악과 김정은이 크레바스를 들여다보며 한탄했다.
“이런 젠장! 벨페골한테도 데미지를 박아 넣던 튼튼한 놈인데!”
“저 좋은 몸빵을 이렇게 날려버리네.”
이윽고, 조디악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저 놈이 방해하러 온 이상 바로 다음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아쉽게 됐어. 인간 지네에게 저 놈을 막으라고 하고 튈 생각이었는데.”
나는 놈들의 혼잣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바짝 긴장한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디악이 지금껏 자X교를 만들어 운용해 온 목적은 따로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야욕을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펄럭!
조디악은 검은 망토를 휘저으며 뒤로 내뺐다.
드레이크가 경계하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유인책인가?”
“……아냐.”
나는 드레이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조디악은 나를 유인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다.
“이럴 때는 당연히 추격해야지.”
나는 곧바로 조디악을 쫓기 시작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 * *
조디악이 향한 곳은 북방 가혹한 바다의 시작점.
안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만(灣)이었다.
NPC 치 카이와 그녀가 지배하는 악마의 만찬 호가 정박되어 있는 얼음 항구이다.
‘Devil's banquet’
불길한 글귀가 음각된 배 앞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탑승 시 낼 금액을 조정하고 있었다.
“와, 뱃삯 엄청 비싸네.”
“랜덤으로 책정된다고 하던데, 로그아웃 했다가 다시 올까요?”
“그냥 뿜빠이해서 내죠. 귀찮은데.”
장비를 보아하니 중수 정도 되어 보이는 유저들.
아마 칼바람 싸움터에서 친목 대전을 벌이고 싶은 것 아니면 아틀란둠에 가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푸스스스스! 비켜라.”
갑자기 툭 튀어나온 조디악이 그들에게 시커먼 불길을 끼얹어 한 줌 잿가루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요호호호! 거 성질 급한 놈이로군. 배에 타고 싶나? 뱃삯은 있겠지?]
치 카이가 조디악을 향해 뼈와 가죽만 남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푸스스…… 돈은 없다. 대신 이건 어때?”
조디악은 인벤토리에 있던 빨간 책을 들어 치 카이의 눈앞에 활짝 펼쳤다.
언데드. 이미 한번 죽었던 존재.
하지만 생전 바다를 호령했던 대해적도, 죽음을 극복한 언데드조차도 조디악의 자살이론만은 피해 가지 못했다.
[…….]
어둠만이 진득하게 고여 있던 치 카이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이윽고, 그녀는 말없이 뒤돌아서 배의 줄사다리를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뱃사람이 죽을 곳은 바다 위다.]
아마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자기파괴를 시행할 생각인 것 같다.
끼기기긱-
이윽고, 배가 얼어붙은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캉! 터억!
얼음을 깨고 움직이는 배의 후미, 차갑게 얼어붙은 닻줄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조디악 패거리와 마찬가지로 뱃삯을 내지 않은 나와 윤솔, 드레이크였다.
“휴, 겨우 따라잡았네.”
나는 지름길을 에둘러 와 악마의 만찬 호가 항구를 떠나기 직전 겨우겨우 승선할 수 있었다.
승선이라기보다는 밧줄에 낚시 미끼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마찬가지로 내 옆에 매달린 윤솔과 드레이크가 보인다.
그때, 드레이크가 문득 내게 물었다.
“어진.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상황에? 뭔데?”
“아까 인간 지네에게 죽으면 3류, 인간 지네를 죽이면 2류, 인간 지네를 역으로 이용해먹을 수 있으면 1류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지.
내가 왜 그러냐는 듯 빤히 쳐다보자 드레이크는 잠시 헛기침을 한다.
“크흠. 아니 그런데…… 그 읽으면 자살하는 책을 인간 지네에게 보여줬으니, 결국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그것은 역이용한 게 아니잖아?”
합리적인 지적이었다.
“아,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내가 드레이크의 질문에 막 대답해 주려는 사이.
…쿵!
배가 항구에 떠다니는 유빙에 부딪쳐 크게 흔들렸다.
“이런, 질의응답을 하기에는 상황이 좀 나쁘네. 설명은 나중에 하지.”
나는 드레이크에게 눈짓했다.
…타타탁!
그리고는 줄사다리를 잡은 채 배의 벽면을 박차고 바로 난간을 타넘었다.
이윽고.
갑판 위로 올라오자 숨을 돌리고 있던 조디악과 김정은, 방철우, 방철해 형제가 보인다.
나를 본 조디악은 히죽 웃으며 한 마디 한다.
“We’re in the endgame now.”
뭐지? 이제는 가망이 없다는 뜻인가?
하지만 뎀의 초월번역 시스템 덕에 놈의 뜻은 온전히 전해졌다.
“푸스스스, 이제 최종 단계다.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어.”
조디악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나 역시 굳은 표정으로 깎단 두 개를 들어 가드 자세를 취했다.
NPC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것이 조디악의 계획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전에 남세나가 알려 주었던 대로, 놈이 이 세계의 멸망을 바라고 있다는 것.
“그렇게는 안 되지.”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게이머 스스로의 자유이지만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거나 강압적으로 행해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나 NPC나 몬스터나. 아니 게임이나 현실이나 모두.
…척! …덜커덕!
이내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난간을 넘어와 내 옆에 섰다.
조디악과 매드독 일당이 그런 우리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촤아악!
파도가 치는 소리.
크라켄의 죽음 이후 높이가 많이 낮아졌지만 그래도 위협적이다.
“게임이 싫으면 망칠 생각 말고 그냥 조용히 혼자 접으란 말이야. 이 지긋지긋한 낯짝아.”
“푸스스스스- 개소리 집어치우고 덤비기나 해. 오늘에야말로 끝장을 내자.”
나와 조디악이 서로를 향해 막 이빨을 들이밀려는 순간.
콰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배가 한 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었다.
원래대로라면 배의 이상을 알려줘야 할 치 카이는 굳은 표정으로 타륜만 잡고 있다.
그리고 그런 치 카이를 대신해 김정은이 외쳤다.
“1차 웨이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