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자X교 (2)
“자, 여러분.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했습니다. 삶은 고통이며 이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가까이에 있지요.”
창백한 얼굴,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단상 위에 서서 연설을 하고 있다.
종교인처럼 보이는 복장이었지만 남자의 독사 같은 눈매, 짙은 다크서클, 시체의 것처럼 창백한 피부와 한쪽 입꼬리에만 걸려 있는 미소는 어쩐지 불길함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조디악 번디베일.
그는 단상 아래, 무대를 우러러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열변을 토해 낸다.
“여러분의 운명은 여러분이 쥐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남들이 남 좋자고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기계처럼, 노예처럼 행동할 겁니까?”
조디악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북방에 배치되어 있는 NPC들, 하지만 개중에는 일부 플레이어들도 끼어 있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운명을 스스로 시작하고 스스로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기묘한 열기를 띤 조디악의 연설에 몇몇 인물들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의로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낳음 당한’ 겁니다! 이 험한 세상에! 그동안 얼마나 오욕과 설움, 장판에 눌어붙은 얼룩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인물들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간다.
오열을 하거나 흥분한 목소리로 동조하는 이도 있었다.
조디악은 힘주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 삶의 시작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끝, 마무리 정도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해야지요! 여기 있는 제가, 이 조디악이 여러분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말을 마친 조디악은 눈을 빛내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모두가 손을 흔들며 열광한다.
그때.
[헛소리! 궤변이다!]
천막 안 강당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가 있었다.
그는 흰 백발과 수염을 길게 기른 한 노인이었다.
북방의 외곽, 극야지대의 한 마을에서 온 철학자이자 대현자.
온몸을 얼룩 한 점 없는 흰색의 천으로 휘감은 그는 조디악의 앞으로 걸어와 맹렬하게 따졌다.
[네놈은 대체 무엇인데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살을 권하는 게냐!? 이 악마 같은 놈아!]
하지만 일침을 듣는 조디악은 여전히 여유만만이다.
“푸스스스, NPC 주제에 반박이라니.”
[삶이란 아름답고도 감사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야! 어디서 감히 그런 못되어먹은 궤변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려 하는 게냐 이놈!]
대현자의 말을 들은 조디악은 노골적으로 표정을 찌푸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대현자에게 말했다.
“그렇게 사는 게 좋으면 당신은 절대 자살 안 하겠네?”
[그런 것은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쁜 것이다! 매일매일에서 작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기만 해도 이 삶이 얼마나 충만하며…!]
“아니, 아니. 됐고. 그렇다면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살 따위는 안 한다는 거잖아?”
[그야 당연하지!]
그러자 조디악의 양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면 내 논리를 듣고도 어디 자살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보자고.”
[……?]
대현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조디악은 좌중을 훑으며 말했다.
“푸스스스! 보시오! 여기 이 대현자와 내가 지금부터 서로의 논리를 웅변해 보이겠소. 과연 여러분들은 누구의 논리를 따를 것인지, 누구의 입장을 선택할 것인지 궁금해지는군!”
조디악은 단상에서 물러나 대현자를 노려보며 마주섰다.
먼저 논리를 전개함에 앞서, 대현자 알자니우스는 한쪽 손을 들고 선서했다.
[생명 사랑 선서. 나는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절대로 자살하지 않을 것을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첫째, 나 알자니우스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을 것이며, 자해나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둘째, 나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적당한 휴식과 수면을 취하겠습니다. 셋째, 나는 내 주변에 자살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없애며 술, 담배 등 약물에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넷째, 나는 자살하지 않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고민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상담하겠습니다. 이병… 아니 대현자 알자니우스.]
알자니우스는 선서를 마치고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강단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가만히 잘 들여다보면 고통스럽기만 한 것 같은 세상 속에도 우리가 평소에는 잘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행복들이 가득합니다. 봄의 솜사탕과 달고나, 여름의 수박과 팥빙수, 가을의 군고구마와 붕어빵, 겨울의 어묵국물과 호떡…… 그리고 새벽에 먹는 라면의 맛, 목욕 후 마시는 바나나 우유와 차가운 맥주, 야구나 축구를 보며 뜯는 치킨과 피자, 운동 후 먹는 아이스크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구워먹는 고기, 원고를 쓰기 위해 골방에 갇혀 먹는 군만두… 이 얼마나 작지만 확실하면서도 배신하지 않는 행복이란 말입니까! 이런 것들이 있는데 대체 왜 삶을 포기합니까!]
알자니우스는 약간 촉촉해진 눈을 들어 붉어진 얼굴로 모두를 바라본다.
[다들 삶이 힘든 거 압니다! 힘든 거 아는데, 누가 누가 더 힘든지 따지고 그러는 거 의미 없어요! 제 주변에 모든 걸 놔 버리려는 사람들, 다 삶의 따듯함을 깨닫고 살아났습니다! 번번이 따듯함으로 살려냈습니다! 벼랑 끝이고 죽을 결심이면 내가 다 살려 낼 거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그러자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의 눈시울도 붉고 촉촉하게 젖어간다.
바로 그때.
“푸스스스스.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조디악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채 대현자 알자니우스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뒤에는 검은 드레스 차림에 커다란 플로피 햇을 쓴 마법사 김정은이 뒤따르고 있었다.
“자, 여기. 방금 인쇄기에서 찍어낸 따끈따끈한 책이야.”
김정은은 조디악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새빨간 표지를 가진 한 권의 책이었다.
-<읽으면 자X하는 책> / ? / ?
이 책을 본 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100%
조디악은 그 책을 받아 눈앞에 있는 대현자 알자니우스에게 펼쳐 보여 주었다.
“자, 봐라. 이게 바로 그 누구라도 설득될 수밖에 없는 금단의 자살이론이다.”
이윽고, 빨간 책의 표지가 넘어가고 그 안쪽에 복잡하게 적힌 그림과 글자들이 대현자 알자니우스의 망막을 깊숙이 파고든다.
파라락- 팔락-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순간.
방금 전까지 극구 자살을 반대했던 대현자 알자니우스의 표정에 파문이 일어났다.
[…이, 이건!?]
흔들리는 동공.
그동안 내내 표정 변화가 없던 알자니우스의 표정이 급격이 굳더니 이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논리는!? 이, 이런 건 대체 어떻게 해야!? 어, 어, 어찌 이런 게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대현자 알자니우스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뒤로 비틀비틀 물러난다.
…털썩!
그는 물러나던 자세 그대로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얼룩 한 점 없이 희고 깨끗하던 그의 망토자락에 시커먼 흙탕물이 튀어 천천히, 스멀스멀 번지기 시작했다.
파라락- 팔락-
조디악은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페이지를 빠르게 넘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드러나는 순간.
[으아아아아!]
알자니우스가 여지껏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절규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대현자는 그대로 천막을 찢고 달려가 설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거대한 크레바스를 향해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삶의 아름다운을 예찬하던 대현자가 이렇게 순식간에 삶을 포기하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도 동요한다.
NPC고 플레이어고 모두 겁에 질리는 동시에 우상을 경외하는 표정으로 조디악을 우러르기 시작했다.
[우리집옆집앞집뒷창살은흩겹창살이고우리집뒷집앞집옆창살은겹흩창살.]
[내가그린기린그림은목긴기린그림이고니가그린기린그림은목안긴기린그림.]
[간장공장공장장은공공장장이고된장공장공장장은장공장장.]
[경찰청외철창살이쇠철창살이냐철철창살이냐검찰청쌍철창살이쇠철창살이냐철철창살이냐.]
[내가그린구름그림은새털구름그린구름그림이고네가그린구름그림은깃털구름그린구름그림.]
[들의콩깍지는깐콩깍지인가안깐콩깍지인가깐콩깍지면어떻고안깐콩각지면어떠냐깐콩깍지나안깐콩깍지나콩깍지는다콩깍지인데.]
[아무도모르게다가온이별에대면했을때또다시혼자가되는게두려워외면했었네!]
[청기올려백기내려청기올리지말고백기내려백기내리지말고청기올리지마청기올리려다가멈춘손이따스한햇볕에백기내리지마백기청기둘다내려청기올리지마.]
.
.
모두의 입에서 알 수 없는 괴성들이 터져 나온다.
목소리는 이미 신이라도 영접한 것처럼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눈이 몽롱하게 풀린 것이 정상이 아닌 듯 보인다.
“호호호, NPC는 그렇다 쳐도 플레이어들까지 낚이는 것은 좀 의외인데?”
…물론 그 배후에는 한때 최면 메타를 주로 사용했던 김정은의 서포트가 있었다.
이윽고, 조디악은 만면에 환한 미소를 건 채 빨간 책을 높이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모두 이 책을 봐라! 이 안의 논리를 읽고 그대로 행해라! 그것이 너희들을 영원케 하리니!”
그러자 관중들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푸-스스스스스! NPC 몰살 계획 가동이다!”
조디악은 그 광적인 풍경을 앞에 둔 채 흡족하게 웃어젖혔다.
그 뒤에는 매드독의 김정은과 방철우, 방철해 형제가 팔짱을 낀 채 같이 웃고 있었다.
그때.
“…‘자살’의 반댓말이 뭔지 아냐?”
천막 밖에서 들려오는 으스스한 소리.
조디악은 순간 등골을 타오르는 오싹한 소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검은 휘장 너머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림자는 말했다.
“…답은 ‘살자’이다.”
조디악은 흔들리는 동공을 들어 그림자를 마주보았다.
그림자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렇다면 ‘삶의 보람’의 반댓말이 뭔지 아냐?”
그와 동시에.
펄럭!
검은 휘장이 확 젖혀졌다.
그리고 튀어나온 것은 수없이 많은 화살들이 장전된 자동 연발식 기관쇠뇌였다.
“…답은 ‘람보의 삶’이다!”
동시에.
두두두두두두두-!
수백 발의 화살들이 탄환처럼 쏟아지며 뒤에 있던 매드독 일당을 벌집으로 만든다.
헬쓱한 표정의 조디악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또 너냐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