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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11화 (611/1,000)
  • 611화 도둑잡기 (5)

    “늬들 템도 싹 벗어.”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다.

    나는 결박술을 이용해 녀석들의 다리의 힘줄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스킬 같은 건 아니고 고인물들의 꼼수다.

    혈액을 차단함과 동시에 혈을 압박해 일시적으로 마비에 가까운 증상을 만드는 것.

    지금 내 눈앞엔 40인의 성인 남성들이 인어공주처럼 엎어져 있었다.

    이미 알몸이 되어 버린 몸에는 밧줄들이 거북이 등껍질 모양새로 꽁꽁 감겨 있다.

    “싹 다 벗으라고.”

    “벗었…… 벗었는데요?”

    계속 되는 탈의 요구에 도둑 하나가 질문했다.

    장비템은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벗었다.

    그런데 뭘 또 벗으라는 것인가.

    나는 다시 친절하게 설명했다.

    “인벤토리에 있는 것들도 벗어.”

    내 말을 들은 40인의 도둑들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도둑놈 것을 역으로 털어 가는 놈이 있다니!

    “아니 무슨…… 이 도, 도둑놈아! 차라리 게임을 접으라 그래!”

    “도둑? 늬들이 할 말이냐? 거기 쥬 간호사 잠깐 이리 와 보세요.”

    내가 턱짓을 하자 쥬딜로페가 나뭇가지로 맨 앞에 있던 장태익의 머리를 딱콩 때렸다.

    “어헉!”

    노템 상태에 결박술로 컨디션 저하까지 와서 그런지 쥬딜로페의 공격 한 번에 두개골은 문콕 당한 차체처럼 움푹 들어갔다.

    두 눈에선 자동적으로 눈물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앞에 쪼그려앉았다.

    “아파?”

    “아… 아파요!”

    “그럼 안 아플 때까지 맞아야겠네. 주사 맞기 전에 엉덩이 세게 치는 이유 알지? 자, 쥬 간호사? 여기 환자 한 번만 더…….”

    “아뇨아뇨! 안 아파요! 거짓말처럼 안 아픈 거 같아요!”

    “진짜 안 아파?”

    “예예!”

    “호호, 녀석.”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비로소 그가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회귀 전에도 가끔 이렇게 카오 유저들을 교육시키곤 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벗어. 마음의 문도 열었는데 인벤토리의 문도 열어야지.”

    “……악마 새끼.”

    결국 소환사 최무홍이 개구리를 불러내 아이템들을 토해 내게 했고 나는 그동안 모아왔던 민첩템들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 이 도둑들이 가진 아이템들까지 전부 말이다.

    “흠… 고렙 도둑들이라 그런가 민첩 아이템이 엄청 많네? 고등급 템도 많고. 너네 되게 부자였구나?”

    이쯤 되면 창고 화재를 모두 복구하고도 충분히 남는 장사이다.

    더군다나 도둑들이라 그런가 민첩을 올려 주는 아이템들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 아주 개이득인 셈.

    “엄마…… 나 장가 다 갔어.”

    “다리가 안 움직여서 하반신과 상반신 중 한 쪽만 가릴 수 있어…… 흑…….”

    “그게 어떻게 산 아이템인데……!”

    “그건 전여친이 남긴 마지막 배틀액스란 말이야! 끄흡!”

    나는 훌쩍이는 도둑놈들을 달래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어차피 너희들은 다 구제불능 카르마 유저들이라서 죽으면 신전에서 부활하는 즉시 체포되어 온갖 패널티를 다 먹을 텐데.”

    “……크윽!”

    “차라리 나한테 다 털리는 게 낫지. 좋은 게 좋은 거잖어~”

    피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아이템을 상납하는 도둑들.

    나는 놈들의 인벤토리를 훤히 들여다보며 돈 되는 것은 모두 긁어 왔다.

    거기에 민첩 옵션이 붙은 잡템들까지 싹 다.

    ……바로 그때.

    “응?”

    나는 신창원이 뱉어낸 아이템 목록 중 이상한 것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빨간 책.

    아주 새빨간 표지를 가지고 있는 한 권의 얇은 책이었다.

    -<읽으면 자X하는 책> / ? / ?

    이 책을 본 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100%

    “……뭐야 이건?”

    내가 묻자 신창원이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도둑질을 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감성팔이? 안 사요.”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사연이 있어!”

    “안 궁금해. 이게 뭔지나 말해.”

    “드, 들어줘. 그 아이템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꼭 말해야 한다고.”

    신창원은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는 며칠 전부터 큰 곤란을 겪고 있었어. 퀘스트를 깨려고 오랜 시간 몬스터를 잡고, 소모품을 쓰고, 퀘스트 아이템을 모아서 가면 꼭 퀘스트를 줬던 NPC들이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드레이크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진, 나도 저 내용 들은 적 있다. 요즘 곳곳에서 NPC들이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흐음.”

    나는 신창원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신창원은 말을 이어나갔다.

    “고위 랭커일수록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를 깨야 하고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일수록 준비 기간과 필요 아이템, 도전 과업의 난이도가 높은 건 당연하잖아.”

    “뭐, 그렇지?”

    “우리가 도전했던 퀘스트는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 소모도 막심했어. 그런데 그렇게 해서 퀘스트를 완수하고 돌아가면 보상을 줄 NPC들이 사라져 버리는 거야. 정말 미칠 노릇이지. 중소기업이었으면 벌써 도산해 버렸을 거라고.”

    “그래서 내 물건에 손을 댔다?”

    “그, 그 점은 반성하고 있다고 하잖아!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는……”

    “안 잡혔으면 반성도 안 했겠지.”

    “데헷-”

    내가 끓는 기름을 들이밀며 빵가루를 뿌리자 신창원의 태도가 한결 더 고분고분해졌다.

    녀석은 최대한 내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 사라져 버린 NPC가 있던 곳에 떨어져 있던 게 바로 이 책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빨간 책을 내려다보았다.

    읽으면 죽는 책이라……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이템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모르는 아이템인데.’

    회귀 전에도 후에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이템이니만큼 뭔가 꺼림칙하긴 하다.

    더군다나 아이템을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도 뭔가 기묘했다.

    원래 한손무기는 황금 빛, 양손무기는 붉은 빛, 방어구는 푸른 빛, 악세서리는 녹색 빛, 그외 아이템들은 흰 빛을 뿜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 아이템은 듣도 보도 못한 붉은빛을 뿌리고 있다.

    피처럼 아주 새빨간.

    “읽으면 죽는다고? 말이 안 되는데. 이 게임에 그런 밸런스 붕괴 아이템이 존재할 리가. 그러면 게임 망할 게 뻔한데. ……설마 버그 아이템인가?”

    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신창원은 자기도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바로 그때.

    [……그게 뭔데 그러나?]

    소란을 듣고 달려온 창고지기 떼껄룩 씨가 슬쩍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 손에 들린 책을 펼쳐 보았다.

    그러자.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히이이이이이익!?]

    언제나 밝고 침착하던 떼껄룩 씨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허리춤의 칼을 빼더니 대뜸 자기 가슴을 찌르려 들었다.

    “뭐, 뭐야! 무슨 짓이에요!”

    [놔, 놔! 나, 나는! 나는 죽어야 해!]

    나를 뿌리친 떼껄룩 씨는 칼을 버리더니 창고에 있는 밧줄을 향해 달려간다.

    이번에는 저걸로 올가미를 만들어 목에 걸려는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NPC를 공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쯤 되면 별 수 없다.

    나는 몸에서 점액을 내뿜어 떼껄룩 씨를 뒤덮어 버렸다.

    그러자 그는 창고 바깥의 내리막길로 미친 듯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냐하-!!]

    나는 워터슬라이드를 타는 것 같은 떼껄룩 씨를 보곤 드레이크를 불렀다.

    “마동왕, 부탁해. 그 보스 잡을 때…… 알지?”

    그러자 드레이크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건틀릿을 이용해 평원 한가운데 거대하게 움푹 패인 공간을 만들어 냈다.

    [냐아아앗! 자, 잠깐!]

    슈우우욱-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 떼껄룩 씨는 원반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고르딕사를 잡을 때 사용한 패링 접시와 비슷한 구조다.

    그래도 고작 계속 빙글빙글 돌도록 하는 것이니 잔인한 처사는 아니었다.

    비록 반고리관에 이상이 생기거나 원심분리기에 들어간 것처럼 온몸의 혈액이 혈장과 혈구로 분리되겠지만 뭐…… 분명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우욱! 냐아아앗! 빙글빙글 돈다!]

    제법 신나게 놀고 있는 것 같군.

    그곳을 한참 돌고 있도록 나는 좀 더 점액을 흘려 넣었다.

    “미안해요, 떼껄룩~.”

    [으아아아아! 놔! 놔!]

    나는 가장자리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떼껄룩 씨. 이 게임은 전체연령가이기 때문에 그러시면 안 돼요. 애초에 자살이라는 단어도 자X로 표현될 만큼 심의도 까다로운데.”

    [어지러워! 어지러워서 죽을 것 같아!]

    “앗, 그건 안 되는데. 마동왕, 그럼 이제 반대로 돌려 줘. 그럼 죽진 않겠지.”

    [앗, 반대로 도니까 정신이 괜찮아져 간…… 간다앗……! 기, 기다려! 정신이 날아가 버린다…! 가 버렷…!]

    내가 떼껄룩 씨의 자X를 막기 위해 낑낑거리고 있을 때.

    팔랑…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한 장의 종이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그것은 한 장의 지도였다.

    알아보기 힘들게 대충 휘갈겨진 지도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자X 뒤에 오는 현명해지는 시간. 죽음 너머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바로 그곳’

    죽음 너머에 갈 수 있는 곳이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든다, 나의 철학과 어느 정도 맞는군. 죽음이야말로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영원불변한 것이지!]

    내 어깨 위의 죽음룡 오즈가 낄낄거리는 것을 보니 꽤나 불길한 일이다.

    “……뭔가 사이비 종교 냄새가 난다.”

    드레이크도 불안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도 뒷면에는 큼지막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자X교 교주 ‘J’>

    어딘가 익숙한 알파벳 이니셜이다.

    “자살교… 아니 자X교의 교주 J라.”

    순간, 나는 얼마 전 카페에서 만난 남세나가 건네준 서류를 떠올렸다.

    조디악. 이 사이코가 현재 꾸미고 있는 계획.

    그것은 바로 ‘NPC 몰살계획’이다!

    ‘……이 게임을 망치고 싶어 안달 난 조디악이 비밀리에 추진 중인 프로젝트라.’

    나는 항아리에 담긴 40인의 도둑들을 바라보았다.

    “이봐. 너희들… 모두 NPC 실종사건의 피해자들이냐?”

    내가 묻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든 작든 모두 NPC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는 녀석들이었다.

    나는 놈들에게 빼앗았던 돈과 아이템들을 일부 돌려주었다.

    그리고 녀석들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는 누가 실종되었는지, 그리고 NPC들이 어떤 증후를 보였는지, 마지막 행적은 어디인지 소상하게 말해 봐.”

    그러자 이내 40개의 진술들이 한데 모인다.

    정확히는 알몸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온 남정네들의 뜨겁고 불결한 날숨 40개지만.

    “내가 먼저!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우룻토사 마을에 있을 때 얘기다!”

    “나는 검은 사막! 그 근처에서 우리 회사 조 팀장님이랑 뜨거운 불륜을……!”

    “……같이 퀘스트 깨기로 한 그녀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지. 탈모 알레르기가 있다고 좋은 인연을 만나라며…….”

    “홀홀, 리자드맨과 오크의 사랑 이야기를 아시오?”

    “난 전설 따위는 믿지 않아. 그러나 훌룽불룽 마을의 동상에는 믿을 만한 전설이 있었지.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성실히 남자 NPC들의 팬티를 훔치며…….”

    “나는 그녀가 플레이어인 줄 알았어! 근데 NPC였다니! 내가 데이터 러버였다니! 근데 어느날……!”

    “결론만 말하자면 이거야. 그러니까…어느 옛날 옛적 말이다… 내가 왕년에……그러니까…어디 보자……말하자면…….”

    “그곳은 좌표로는 33,42,166A고, 지명은 ‘얼어 버린 날개’. 그곳 지역사를 공부하면 알 수 있는 옛 지명은 ‘초승달이 내려앉은 대지’, 근처 지역민들은 그곳을 ‘날아가는 속눈썹’이라고 부르는 곳이었지. 정확한 표면적은 1,353,575…….”

    그 결과. 나는 꽤나 많은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1. 북대륙.

    2. NPC들의 집단 실종.

    3. 그리고 그 자리에 남겨져 있던 정체불명의 ‘빨간 책’.

    4. 퀘스트가 도중에 증발하자 상심하여 게임을 접거나 카르마 유저로 변해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 플레이어들.

    5. 실종된 NPC들이 있던 자리에서 꼭 한 번씩은 목격되는 검은 옷의 남자.

    6. 그리고 빨간 책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이니셜 ‘J’

    게임을 망치려는 누군가의 악의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정보들이다.

    “……아무래도 남세나의 정보가 맞는 것 같네.”

    지금 40인의 도둑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조디악 번디베일.

    아무래도 놈이 꽤나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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