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07화 (607/1,000)
  • 607화 도둑잡기 (1)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

    .

    로그인을 알리는 빛무리, 아카식 레코드 관리자의 익숙한 음성.

    나는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에 들어왔다.

    “인간 마을은 여전히 휑하네.”

    저 멀리 망루나 시계탑에 올라가면 절벽 너머로 보이는 오크와 리자드맨의 마을은 떠들썩하고 활기찬 반면, 인간의 마을은 여전히 한산하다.

    한때 발 디딜 틈도 없어 접속대기 시간만 몇 십 시간에 이르던 중앙 광장.

    뉴비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던 튜토리얼의 탑.

    수련장의 허수아비 한 번 더 때려 보겠다고 엎치락뒤치락하던 초보자 존.

    뉴비나 랭커 영입에 열성적이었던 대형 길드들의 호객꾼들, 헤드 헌터들.

    이 모든 것들은 이제 고토(故土)의 영광, 빛바랜 추억이다.

    사람 없이 텅 빈 인간의 도시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쇠퇴해 가는 고대문명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다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음 같아서야 예전처럼 인간 종족을 격려하는 파티라도 벌이고 싶지만.

    ‘그 돈지랄을 또 하는 건 절대 무리지.’

    그래도 그 사건 덕분에 수전노 근성을 버린 스크루지 후작이 인간 종족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세금도 낮춰 주고 기본 소모품도 제공하는 듯 여러 혜택을 베풀어줘서 인간으로 플레이하기 수월해졌다는 평가가 많았다.

    “뭐, 인간 종족이 더 부흥하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겠지.”

    나는 스크린 하단에 보이는 종족 킬 수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종족 킬

    (Generation Kill)

    인    간          358,262

    리자드맨   930,327

    오    크          1,152,016

    지금은 인간의 점수가 제일 낮지만…… 앞으로는 또 모르는 일이다.

    *       *       *

    나는 유토러스 외곽의 창고지대로 향했다.

    높은 산지대에 계단식 비탈길이 있고 수많은 창고들이 포진해 있다.

    말라죽은 거목 위로 올라가 구름다리 몇 개를 건너 바위산의 가장 넓고 큰 암반지대에 내가 영구임대해 둔 창고가 몇 채 있었다.

    나는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창고 중 가장 오른편에 있는 제 1창고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 간만에 왔네.]

    내가 손을 들어 인사하자 창고지기 NPC인 떼껄룩 씨가 손을 마주 흔든다.

    귀여운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고양이 계열 수인으로 내 창고 부지를 맡아서 관리해 주고 있는 고마운 NPC.

    “요즘 별일 없나요?”

    [으응? 창고 출입객 명부에는 당신 친구들뿐이야. 드레이크 캣, 그리고 윤솔 씨. 그 외에는 별 일 없어. 늘 24시간 경계중이니 걱정 말라고.]

    나는 떼껄룩 씨의 말을 듣고 조금 놀라야만 했다.

    ‘이상하네? 고양이 계열 수인은 하루 15시간은 자는 걸로 아는데.’

    그런데 24시간 내내 경계중이라니 뭔가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캐주얼한 차림이던 떼껄룩 씨가 답지 않게 방패와 창,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하고 있는 상태.

    늘 가슴 주머니에 꽂고 다니던 츄르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떼껄룩 씨는 이상함을 느꼈는지 부연설명을 해 주었다.

    [요즘 좀도둑들이 부쩍 많아져서 말이야. 대격변 이후 경기가 어려워지니 범죄율이 늘었어. 특히나 오크나 리자드맨 녀석들이 인간 족 창고를 털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말이지.]

    ……아, 이것도 대격변 이후에 바뀐 설정인가? 처음 겪는 것 같은데.

    ‘하기야, 나라고 바뀐 걸 모두 아는 건 아니니까.’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창고 부지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떼껄룩 씨는 또다시 창과 방패를 들고 전방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계열 수인이 그 좋아하는 잠도 안 자고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을 보니 참 성실한 NPC다 싶었다.

    …덜컹!

    육중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늘 똑같은 풍경이 보인다.

    빠른걸음 부츠, 바람의 망토, 속력의 각반, 날쌘미늘 갑옷, 신진대사 활성화 목걸이, 눈치빠른 링, 퀵 실버 귀걸이, 눈 깜짝 장갑, 민첩한 도적의 마스크, 날다람쥐 코트, 단거리 질주의 군화, 빠른물소 투구, 뚜벅뚜벅 지팡이, 기타등등……

    등급 불문, 가격을 불문하고 민첩 스탯을 올려 주는 아이템이라면 뭐든지.

    그것들이 거의 산을 넘어 바다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내가 요 몇 년간 게임을 하며 모으고 또 모아 왔던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민첩 아이템들의 바다 중앙에서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인물이 하나.

    바로 윤솔이었다.

    “어디 보자, 민첩한 도적의 마스크가 163개, 빠른물소 투구가 252개, 뚜벅뚜벅 반지가 요즘은 잘 안 드랍되나 보네? 29개뿐인가……. 흐음~ 그리고 잡화점이랑 고물상, 야시장에서 들여온 민첩 아이템들이…….”

    윤솔은 재고 파악에 집중하고 있느라 내가 온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이~ 윤씨. 작업은 잘 돼 가나?”

    내가 아저씨 같은 어조로(아저씨 맞긴 하다) 껄껄 웃으며 말을 걸자 윤솔이 고개를 돌린다.

    나를 보는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아! 어진아, 왔었네? 재고 파악 중이었어!”

    “귀하신 몸인데 이런 거 할 시간이 어딨어. 내가 할게, 이리 줘.”

    “아냐! 주말이라 한가해. 오늘은 스케줄도 없고.”

    나와 윤솔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새로 들어온 민첩 아이템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언뜻 봐도 창고에 적재되어 있는 민첩 아이템들의 수가 확 늘어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족히 세 배는 더 불어난 것 같다.

    “……내가 민첩 아이템을 이렇게나 많이 모았었나?”

    아무리 오즈와 쥬딜로페가 아이템 수거를 도와줬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 많아졌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윤솔이 멋쩍게 말했다.

    “아아, 사실은 내가 경매장이랑 고물상 NPC들과 협상을 해서 민첩 옵션이 붙은 아이템은 무게 당 달아서 파는 것보다 가격을 조금 더 쳐 준다고 하고 대량 매입 계약을 했거든.”

    오? 그런 방법이 있었던가.

    하기야 고물상 NPC들인 그레이드와 리엔포스, 그리고 홈리스는 나와의 호감도가 나쁜 편이 아니다.

    플레이어들이 고물상에 아이템을 등급, 무게로 달아 넘기고 그 중 민첩 옵션이 붙은 것들은 전부 나에게 오는 수주 계약.

    이런 식으로 도매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일일이 잡템들을 주우러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이다.

    “역시 너는 수완이 좋아. 고물상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을 줄은 나도 몰랐어.”

    “에이, 별 거 아냐. 힘민체에서 만난 아키사다 아야카 씨가 알려 주신 건데 몇몇 길드들이 이런 방법을 쓴다기에 나도 해 본 거고. 또 우리는 민첩 옵션만 붙어 있으면 잡템이든 뭐든 안 가리니까 계약 따내기도 쉬웠어.”

    “그래도 대단해. 내가 모은 물량의 몇 배를 순식간에 모았잖아. 장부 보니까 되게 싸게 매입했던데.”

    나는 윤솔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배시시 웃는다.

    ‘여전히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구만.’

    시간이 꽤 흘렀지만 윤솔은 참 여전하다.

    이렇게 낯가림이 많은데 어떻게 예능이나 광고 촬영, 심지어 걸그룹 무대까지 소화해 내는지는 살짝 의문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엄청 강행군이야.”

    윤솔은 아이템을 정리하면서 자기 근황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챔 빅리그에서 러시아의 올가, 라스푸틴, 트로츠키를 연달아 꺾고 트리플 킬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이후 CF가 엄청나게 들어오고 있다나.

    “……그런데 그 CF가 대부분 힘에 관련된 거야. 운동기구나 보충제 광고… 실제로는 나 힘도 별로 없는데.”

    “이미지라는 게 엄청 중요하니까. 걸그룹 일은 좀 어때? 걸크러쉬라고 여자 팬들 엄청 많은 것 같던데.”

    “아 그거? 조만간 또 신곡 낸다나 봐. 작사, 작곡하시는 분이 차기곡 거의 다 됐다고 하시던데. 슬슬 각국 멤버들 다시 모아서 연습 들어가지 싶어.”

    윤솔은 아이템들을 분류하다 말고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

    내가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윤솔은 또다시 고개를 홱 돌리고는 아이템을 내려다본다.

    여전히 얼굴은 빨개진 채다.

    “고마워.”

    문득, 윤솔이 말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윤솔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거, 다 네 덕분이야. 너 아니었으면 내 삶이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가. 어머니는 아프셨고 당장 살 집도 없었고. …정말 기댈 곳 하나 없이 막막했었는데. 사실,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솔직히 꿈 같아.”

    “맞아. 다 내 덕분이지. 고마워하라고.”

    내가 낄낄 웃자 윤솔도 미소 짓는다.

    바쁘지만 행복한 시간.

    모두에게 주목받고 사랑받는 삶.

    내가 회귀 전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다.

    그런 기쁨을 윤솔에게도 알려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학창 시절 유일하게 내게 은혜를 베풀었던 이에게 보답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어진아, 너는 요즘 어떻게 지냈어? 요 몇 주일 간 연락 잘 안 되던데.”

    윤솔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끼리는 별로 비밀일 것도 없는 내용인지라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고정 S+급 몬스터 잡으러 바다 밑에 갔다 왔어. 창해룡 버뮤다라고.”

    “아앗? 바다? 그래서 잡았어?”

    “어어. 절대 못 잡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답사만 한번 간 거였는데…… 어찌어찌 일이 잘 풀려서 사냥까지 성공했지.”

    “와아아! 진짜 대단하다! 바다 몬스터는 어때? 마몬이나 오즈처럼 컸어? 나도 해저 풍경이 궁금한데.”

    “나중에 동영상 보여 줄게. 다음에는 같이 가자. 바다.”

    나는 윤솔을 보며 씩 웃어 주었다.

    ‘……안 그래도 바다 맵은 한 번 더 들를 일이 남았지.’

    나는 인벤토리 한 구석에서 빛나고 있는 아이템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나약한 자의 나팔고둥> / 재료 / C

    힘껏 불면 트럼펫 소리가 나는 커다란 소라껍데기.

    보기보다 물러서 힘껏 누르면 부서질 것 같다.

    -방어력 -50

    -특성 ‘나약한 갑각’ 사용 가능

    짙은 크림색에 엷은 핑크색이 감돌고 있는 아주 예쁜 소라껍데기.

    입구에 뚫려 있는 구멍부터 껍데기 끝까지는 약 8인치, 나선무늬가 좌측으로 빙빙 꼬아져 있었고 일부 볼록무늬가 우아하게 양각되어 있다.

    과거 벨제붑의 제물이 되었던 살인자 5인방이 떨어트렸던 아이템이다.

    ‘이제 이걸 사용해서…….’

    내가 앞으로의 레이드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드르륵!

    창고의 철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린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창고지기 NPC 떼껄룩 씨.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드레이크였다.

    “어, 어진!”

    드레이크는 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부른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에서 내 얼굴까지 딱딱하게 굳히는 말이 튀어나왔다.

    “옆 창고가 싹 다 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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