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화 상해(上海)의 왕 (12)
자욱한 버섯구름.
……쿵!
창해룡 버뮤다의 거체가 해저 바닥에 가로뉘었다.
상해의 왕. 진청의 핵심. 생태계의 정점.
이 세계관을 17등분으로 나누어 지배하는 절대자 하나가 또다시 내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이다.
○REC
길고 길었던 영상 녹화도 이 시점에서 종료된다.
“……휴.”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다가 그만 탑의 지붕 밑으로 떨어져 추락사 할 뻔했다.
여기가 물속이라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서 다행이다.
“끝났네.”
나는 시계탑의 거대한 시계바늘 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초토화된 왕성, 무너진 성벽, 뒤집어진 집터,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포연과 물거품들.
아틀란둠은 두 번째 멸망을 맞이했다.
(물론 그 두 번 다 나로 인한 것이다)
그때. 어깨 위에서 오즈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해치운 건가?]
이내 반대편 어깨 위에서 쥬딜로페도 고개를 빼꼼 내민다.
[……쀼.]
오즈의 머리를 또다시 딱 때리는 쥬딜로페.
[크악!? 왜 또 때려!?]
“‘해치웠나?’ 같은 건 악당을 부활시키는 주문이니까 하지 말래.”
[헉!? 어, 어떻게 알았지? 내가 전성기 시절 주로 사용했던 금단의 부활 주문을……]
“조용하고. 가서 아이템이나 수거해 와.”
나는 움직일 힘도 없었기에 오즈와 쥬딜로페를 대신 내려 보냈다.
뽀르르……
꼬맹이들이 저 밑으로 아이템과 각종 보상들을 수거하러 간 동안 나는 시곗바늘 위에 앉아 상태창을 점검했다.
<이어진>
LV: 93
호칭: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 아귀메기 태공(특전: 잠복) / 크툴루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의 펫(특전: 갹출) /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 리자드맨 학살자(특전: 징수) / 식인황제 시해자(특전: 1차 대격변) / 뒤틀린 황천의 생존자(특전: 절약) / 불사(不死)의 좌군단장(특전: 여벌의 심장) / 불사(不死)의 우군단장(특전: 선택) / 검은 용군주 오즈의 위상(특전: 혈족전생) /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의 명예 백작(특전: 귀족) / 탐욕의 악마성좌 마몬의 위상(특전: 수전노) / 발록의 뿔을 꺾은 자(특전: 야수) / 그 무서운 데모고르곤(특전: 싸움광) / 살인자들의 탑 5층의 주인(특전: 맵 디자인) /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의 위상(특전: 폭식 창자) / 데스나이트 ‘킹 아서(King Arthur)’의 후예(특전: 백전노장) / 저주받은 고목 쟈쿰 벌목자(특전: 고대 신앙) / 심해 스토커(특전: 마찰계수) / 푸른 용군주 버뮤다의 위상(특전: 잠수) /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친구(기다림) / 아틀란둠의 왕자(특전: 대심해)
HP: 930/930
체력은 꽉 차 있었지만 정신적 피로가 상당해서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쉬는 김에 버뮤다를 잡고 난 결과들을 천천히 체크해 보았다.
“……일단 레벨이 1 올랐네.”
고정 S+급 몬스터를 잡았는데 고작 1오른 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90대 레벨의 구간 별 레벨 업 필요 경험치는 그야말로 억 소리 나오는 수준.
90대에 진입한 이후로는 아주 기록적인 성장폭이었다.
“……어디 보자, 호칭 특전이 세 개나?”
나는 제일 먼저 창해룡 버뮤다를 잡고 얻은 호칭을 확인했다.
<푸른 용군주 버뮤다의 위상(특전: 잠수)>
‘잠수’ 특성이라?
나조차 처음 보는 특성이다.
게이머라면 잠수라는 말 자체는 흔하게 듣지만 특성으로 보게 되니 뭔가 신기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잠수>
↳게임에서 로그아웃 해 있는 동안에도 캐릭터의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시간 제한은 없습니다.
“…이게 뭐야?”
나는 황당함에 입을 반쯤 벌렸다.
창해룡 버뮤다가 준 패시브 특성은 정말 말 그대로 ‘잠수’ 관련 스킬이었다.
일반적으로 잠수(潛水)란 ‘물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게임 용어로 쓰이는 잠수는 조금 다르다.
게이머가 게임을 켜 놓은 채로 다른 일을 하는 동안 게임 캐릭터는 가상 세계 안에서 그냥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상태를 ‘잠수’라고 부른다.
흔히 ‘잠수 탄다’라고 일컬어지는 행위이다.
창해룡 버뮤다를 잡고 얻은 특전은 바로 이 ‘잠수’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개의 뜻을 절묘하게 합쳐 언어유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물 속 깊은 곳에 사는 몬스터를 잡고 얻은 대가가 로그아웃 했을 때도 캐릭터를 접속시켜 놓은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 능력이라니.
“아니, 근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온다.
로그아웃 했을 때도 게임 세계 속 캐릭터가 접속해 있는 것으로 처리된단다.
뭐 육체야 아공간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캐릭터의 플레이 타임은 계속 늘어난다는 소리다.
……365일 24시간 계속 말이다.
“즉, 로그아웃 자체는 가능하지만 플레이 시간은 계속 올라간다는 거네. 게임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말이야.”
플레이 시간이 높다는 것은 고인물들 사이의 훈장 같은 것이지만… 그게 게임 플레이에 뭔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누가 누가 더 폐인인가를 겨루는 자존심 싸움에서 척도가 될 뿐.
고정 S+등급 몬스터를 잡고 얻은 특전이라기에는 아쉬워도 많이 아쉽다.
……아니, 아쉬운 것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창해룡 버뮤다가 용들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고 했나? 이 특성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군. 하…… 근데 그게 용들에게나 의미가 있지 나한테는 아무런 좋을 게 없잖아.”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죽을 고생을 해 가며 얻은 게 기껏해야 남들보다 나이를 빨리 먹는 능력이라니.
허탈했지만 뭐 어쩌랴?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오기만을 바랄 뿐.
……하지만!
그 써먹을 날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바로 다음 호칭을 확인한 직후였다.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친구(특전: 기다림)>
그것을 확인한 순간 어째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진다.
나를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쳤던 두 명의 친구.
나는 그들을 심해에 묻고 혼자 살아남았다.
“응? 그런데 호칭의 특전이……?”
레흐락과 게슈탈트가 남겨 준 특전 특성은 ‘기다림’, 이 역시도 처음 보는 스킬이다.
<기다림>
↳접속해 있는 동안 자연적으로 경험치가 조금씩 조금씩 상승합니다.
※시간 제한은 없습니다.
“……?”
나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잠수’ 특성과 ‘기다림’ 특성을 대조해 보았다.
잠수 특성은 내가 로그아웃해 있을 때도 캐릭터가 접속되어 있는 것으로 처리되어 플레이 타임이 흘러가게끔 하는 패시브 스킬.
그리고 기다림 특성은 접속해 있는 동안은 저절로 경험치가 자동 상승하는 패시브 스킬.
……이 두 가지가 조합된다면?
“……대박이잖아.”
이처럼 멍청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즉, 나는 이제부터 로그인을 하나 로그아웃을 하나 계속 무한대로 경험치를 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동으로!
“……진짜 올라가네?”
혹시나 싶어 경험치 게이지를 빤히 보고 있노라면 자동으로 꼬물꼬물 올라가는 경험치가 보인다.
미약한 양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24시간, 365일 계속된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법이다.
“이 정도면 대박 인정이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는 세 번째 특전을 점검할 시간.
<아틀란둠의 왕자(특전: 대심해)>
이거야 뭐, 전에 떴던 알림음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띠링!
<아틀란둠의 왕위계승권자 후보 1순위가 되셨습니다>
창해룡 버뮤다를 잡고 얻은 호칭이라기보다는 아틀란둠을 두 번이나 멸망시켰기에 얻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 인과율 상 더 적절하리라.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의 명예 백작(특전: 귀족)>이라는 호칭과 비슷한 명예 호칭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아틀란둠이 리젠될 때쯤이면 또 모르겠네. 정말로 국왕이 될 수 있을지도.”
막대한 세금을 거둘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 일단 킵 해둬야겠다.
아참, 그리고 잊어버릴 뻔한 호칭이 하나 더.
<크툴루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그것은 크라켄을 잡고 얻은 옛 호칭이다.
약간 바뀌긴 했지만 기본적은 능력은 그대로다.
아마 정신계 상태이상 저항력이 조금 더 높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그때.
[뿌!]
내 볼을 툭툭 치는 조그마한 손바닥이 있었다.
아이템을 수거하러 갔던 쥬딜로페가 돌아온 것이다!
“어이쿠, 잘했어요. 어디 우리 쥬딜로페가 뭘 가져왔나 한번 볼까?”
나는 쥬딜로페가 두 손으로 내미는 아이템을 마찬가지로 두 손으로 공손히 넘겨받았다.
그것은 문어다리의 중간 한 부분을 뚝 끊어내어 온 듯한 외형의 살점 토막이었다.
흰색과 적갈색이 반씩 뒤섞인 바탕에 검은 반점들이 몇 보인다.
부드러운 살덩어리에 돋아난 빨판 속에는 무시무시한 이빨들이 돋아나 있었다.
“어라?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나는 기대 외의 수확에 조금 놀라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크라켄이 떨군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크툴루 크라켄의 촉수> / 완갑 / S
대풍랑을 부르는 해신(海神)의 위엄. 그 자체.
-방어력 +1,700
-민첩 +2,000
-특성 ‘풍랑(風浪)’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완충(緩衝)’ 사용 가능 (특수)
“……저세상 곱창처럼 생겼네.”
나는 그것을 팔에 끼워보았다.
내 팔뚝에 딱 맞는 보호대.
주변 기후를 조종해 폭우와 파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풍랑’ 특성과 모든 반동 데미지를 0에 수렴하게끔 해 주는 ‘완충’ 특성이 붙어 있다.
“이건 마동왕 전용 아이템이로군.”
안 그래도 데스웜과 마몬의 힘이 깃든 건틀릿을 쓸 때마다 반동 데미지 때문에 고역이었던 참.
건틀릿 뒤에 이 크툴루 크라켄의 팔뚝 보호대를 착용한다면 반동 데미지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아휴~ 참 잘했어요. 이걸 또 언제 주워 왔대?”
나는 크라켄이 사망하는 틈을 노려 아이템을 수거해 온 쥬딜로페를 크게 칭찬했다.
그러자.
[인간! 인간! 나도 주워 왔다! 이것 좀 봐!]
저 멀리서 오즈가 뽈뽈거리며 뛰어오는 게 보인다.
자기 몸보다 훨씬 더 크고 긴 아이템을 들고 쭐레쭐레 다가오는 꼴이 뭔가 가여우면서도 웃기다.
오즈가 내 앞으로 내민 것은 아주 긴 양손무기였다.
-<창해룡 버뮤다의 창 ‘노틸러스’> / 양손무기 / S+
ᄉᆡ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공격력 +1
-특성 ‘물의 근원’ 사용 가능 (특수)
-파괴불가 (특수)
세 개의 뿔이 달려 있는 삼지창.
뿔 하나하나는 나선무늬가 좌현으로 휘돌고 있는 배낙지조개의 껍데기를 닮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삼지창을 집어 들었다.
“세상에, 이런 무기가 있다니.”
공격력이 1인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깎단 역시도 공격력 자체는 쓰레기나 다름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이 창에 붙어 있는 특성인 ‘물의 근원’이다.
이것은 오즈가 말해 주었던 창해룡 버뮤다의 패시브 특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몸 자체에서 끊임없이 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
……푹!
나는 버뮤다의 삼지창 ‘노틸러스’를 시계탑의 지붕에 꽂아 보았다.
그러자 이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퍼퍼펑!
굉음과 함께, 노틸러스가 박힌 곳에서 새로운 물이 펑펑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새롭게 나온 물은 원래 있던 물을 밀어내며 계속해서 범람한다.
나는 황금히 노틸러스를 뽑아냈다.
그러자 물은 더 이상 흘러넘치지 않게 되었다.
“……이게 꽂힌 곳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바다로 변하는 건가.”
시간만 주어진다면 호수나 강쯤은 순식간에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나는 노틸러스를 인벤토리 안에 갈무리해 넣었다.
뭐 아무튼.
여기까지 해서 창해룡 버뮤다 레이드는 종료되었다.
혼자였다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던 이 기나긴 여정에 끝을 고할 시간이다.
나는 폐허가 된 아틀란둠을 떠나 성벽 너머로 나갔다.
내가 향한 곳은 저 멀리 외떨어진 모래톱 위에 있는 난파선.
바로 ‘독주의 무덤’이었다.
<독주(毒酒)의 무덤> -등급: S
플레이버 텍스트: 안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제는 영원히 빈 곳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술도, 그것의 원래 주인도, 또 원래 주인을 기다리던 수문장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 이 던전에는 아무것도 리젠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때 이 던전을 지켰던 수문장이 얼마나 강했는지, 또 던전 안의 보물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S’급 표시만이 쓸쓸히 남아 있을 뿐.
나는 이 텅 빈 던전 앞에 섰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열어 마지막 남은 최후의 아이템을 꺼냈다.
-<레흐락의 럼(Rum)> / 재료 / D
대해적 레흐락이 목숨 다음으로 아꼈던 명주.
알코올 도수 105%의 위엄을 자랑하는 독주 중의 독주(毒酒)로 너무 많이 마셨다간 실명한다.
“……아틀란둠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이거 말고도 또 있으니까.”
인벤토리 안에 딱 한 병 남아 있던 술.
아마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레흐락의 럼이리라.
쪼르르륵……
나는 이 마지막 술을 봉긋하게 솟아오른 모래톱 위에 뿌려 주었다.
쓸쓸한 해류가 불어오는 이곳은 이제 정말로 독주(毒酒)의 무덤이 되었다.
문득 오래 전에 했던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는 의리 있고 멋진 놈이니까 따로 격에 맞는 최후를 찾아가도록 해라.’
결국 내 말대로,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상해의 왕을 상대로 격에 맞는 마지막을 보여 주었다.
“……멋진 친구들을 위해 건배.”
평소대로였으면 하지 않았을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독주의 무덤을 향해 고개를 한번 꾸벅 숙여 보인 뒤 발길을 돌렸다.
호박색 진한 액체가 바닷물에 번져 가는 것을 뒤로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