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03화 (603/1,000)
  • 603화 상해(上海)의 왕 (11)

    게슈탈트의 몸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잉!? ‘지옥바퀴 대왕게’의 상태가……?

    나는 눈을 찌르는 황금빛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만신창이였던 녀석의 몸이 변화한다.

    전신에 돋아나 있던 날카로운 가시들은 몇 배는 더 거대해졌다.

    마치 테트라포드들을 몇 십 개씩 뭉쳐 놓은 것을 보는 모양새.

    기존의 몇 배나 두터워진 갑각은 그야말로 철벽, 그 자체였다.

    원래도 거대했던 집게는 더욱 더 육중해져서 이제는 어지간한 대형 화물선도 바로 두동강 내버릴 수 있을 정도.

    -축하합니다! ‘지옥바퀴 대왕게’는(은) ‘유령선장 황제대게’(으)로 진화했다!

    야생 몬스터 한 개체가 세 번에 걸쳐 상위종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새롭게 등장한 몬스터의 상태창을 살폈다.

    <유령선장 황제대게> -등급: S / 특성: 물, 심해, 백전노장, 지진, 만근추, 기다림, 주폭(酒暴)

    -서식지: 블루홀 밑바닥

    -크기: 20m

    -과거 대해적 레흐락의 배를 따라다니며 그가 흘린 술을 받아먹곤 하던 작은 게가 끝까지 성장한 모습.

    오랜 기다림 끝에 옛 친구를 만나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었기에 몹시 행복한 모양이다.

    레흐락의 하반신이 게슈탈트와 합쳐졌다.

    과거 해상(海上)을 주름잡던 대해적이 옛 힘을 되찾았고 해저(海猪)를 주름잡던 거대한 대게 역시도 완전히 되돌아온 생명력으로 힘차게 움직인다.

    이윽고, 그 둘의 눈동자가 내 눈동자와 마주쳤다.

    레흐락이 말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군. 그렇지?]

    그렇다. 나는 버뮤다가 깎단의 도트 데미지로 인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버틸 수만 있다면 시간은 나의 편이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게슈탈트의 입이 열렸다.

    [기다리는 일이라면 자신 있어. 내게 맡기라고.]

    처음 들어보는 굵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그 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 수밖에 없었다.

    [……가라! 언젠가 이 넓은 바다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자!]

    그것이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마지막 인사였다.

    흔한 멘트였지만 결코 흔하지 않은 각오가 담긴 말.

    진성 헤비 게이머 중 누가 그들을 한낱 NPC와 몬스터로 취급할 것인가!

    …번쩍!

    이윽고, 창해룡 버뮤다가 반동 데미지로 인한 마비 상태에서 완전히 풀려났고 2차 트라이던트 다이브를 감행해 왔다.

    콰콰콰콰쾅! …빠직! 우지지지직!

    두께가 십 수 센티미터도 넘는 단단한 갑각이 깨져 나간다.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해룡 버뮤다의 뿔을 끌어안았다.

    집채만큼 거대하게 자라난 두 집게가 창해룡 버뮤다의 첫 번째 뿔을 잡고 사납게 비틀었다.

    크툴루 크라켄이 남겨 놓은 부리와 빨판 자국이 가장 심하게 나 있는 부분이었다.

    이윽고.

    …뚝!

    해저의 지축을 울리는 묵직한 굉음.

    [그-아아아아아악!?]

    버뮤다가 내지르는 비명이 온 바다를 뒤집어 놓는다.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버뮤다의 버스트 다이브를 두 번이나 막아낸 것도 모자라 놈의 뿔 하나를 부러트려 놓은 것이다!

    츠츠츠츠츠……

    이윽고. 심해의 끝자락, 블루홀의 지독한 어둠 속.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천천히 부서져 갔다.

    심해의 먼지가 되어.

    하지만 사라지기 직전, 여운으로 남은 그들의 미소는 내 뇌리에 짙은 번인(Burn-in)현상을 남겨 놓았다.

    부글부글부글부글……

    뜨거운 물거품이 내 얼굴에 닿아 눈시울을 쓸어간다.

    한편, 나는 이를 악물고 뒤돌아 헤엄쳤다.

    두 친구를 잃었는데 나까지 죽어 버리면 그들의 희생이 정말로 한 줌 물거품이 될 것이다.

    나는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필사적으로 헤엄쳐 블루홀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쩐지 코끝에 독한 술의 향취가 스치는 느낌이다.

    [……그르르륵! 서라!]

    창해룡 버뮤다가 핏발 선 눈을 들어 급부상한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나를 추격해 오는 상해의 왕!

    하지만 내가 걸어 놓은 깎단의 저주와 벨제붑의 독은 놈의 몸을 착실하게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시간 싸움이었다.

    *       *       *

    -띠링!

    <현 위치: 블루홀 ‘입구’>

    <최초 방문자: 고인물>

    나는 모든 힘을 쥐어짜 블루홀 밖으로 튀어나왔다.

    불완전변태 모드가 아니었더라면 제 시간 안에 던전을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시에.

    콰-콰콰콰콰콰쾅!

    블루홀의 좁은 입구를 부수며 튀어나오는 거대한 덩치.

    창해룡 버뮤다가 격노한 모습으로 나를 바짝 추격해 오고 있었다.

    [으아아아! 저 늙은이가 이렇게 열 받은 건 처음 보는데!]

    [……호애앵! 쀼!]

    오즈와 쥬딜로페마저 기겁할 정도로 버뮤다의 기세는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블루홀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승산은 있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레흐락과 게슈탈트가 목숨을 희생해서까지 만들어 준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릴 수는 없다.

    ……더군다나, 녀석들과 나는 공통의 빚을 지고 있는 게 하나 있지 않던가?

    “걱정 마 친구들, 반드시 잡을게. 그리고 너희들의 빚도 대신 갚아 주마!”

    나는 고개를 들어 모래언덕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찾던 것이 보인다.

    나를 블루홀에 빠트렸던 놈들, 그리고 레흐락과 게슈탈트를 오랜 시간 동안 갈라 놨던 놈들.

    해저도시 아틀란둠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크라켄을 잡을 때도 저 녀석들을 이용했었지.’

    그때는 플라튠 전 국왕(현재는 심해 스토커 씨아블로)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 있었는데 현 국왕인 귀스타프 놈에게는 그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여기다 요 파란 도마뱀아!”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어그로를 끌었다.

    안 그래도 어그로를 만땅으로 흡수해놓고 있었던 처라 창해룡은 자연스럽게 나를 추격해 왔다.

    나는 그대로 내달려 정면에 보이는 아틀란둠의 해초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콰-콰콰콰콰콰콰쾅!

    창해룡 버뮤다의 아틀란둠 습격!

    질긴 해초들이 찢어지며 그 안쪽의 거대한 성벽이 두부 쌓아 놓은 것처럼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다.

    [뭐, 뭐냐!?]

    왕성 창문으로 헤엄쳐 나오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바로 아틀란둠의 새로운 국왕 귀스타프다.

    [전 함대 출격! 침입자를 격퇴하라!]

    아틀란둠의 자랑 8함대가 출동했다.

    곳곳에서 어마어마한 화력의 불벼락이 몰아쳐 창해룡 버뮤다를 요격하고 있었다.

    “뭐, 뭐야? 저게 뭐에요?”

    “으아아아! 몰라, 뭐야, 무서워!”

    “세상에! 고인물 아냐 저거!?”

    “대체 뭘 잡고 있는 거야 저 인간!”

    아틀란둠에서 옹기종기 모여 심해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던 몇몇 플레이어들이 나를 보며 기겁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아키사다 아야카도 보인다.

    “고, 고정 S+급 몬스터!?”

    아키사다 아야카는 창해룡 버뮤다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몰아치는 포격을 뚫고 성벽을 부수는 창해룡, 그리고 그것이 오로지 노리고 있는 하나의 목표물.

    ……바로 나다!

    콰쾅! 우르르릉!

    한편, 나는 왕성의 시계탑, 도시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서서 모든 것이 붕괴해 내리는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몸과 얼굴은 해초다발로 가린 채다)

    실시간으로 멸망하는 아틀란둠, 예전에 크라켄의 습격을 당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몇 없던 플레이어들은 전부 죽거나 로그아웃했고 NPC들만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쿠오오오오오-

    창해룡 버뮤다가 만들어 낸 말스트룀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우지지직! 콰콰쾅!

    아틀란둠의 자랑이던 8개의 함선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다.

    안에서 화약이 지레 폭발했고 쇠돌기들은 수수깡처럼 바스라져 한 줌 먼지가 되었다.

    기기기긱-

    여덟 개의 뱃머리가 일제히 모래톱에 처박혔고 이내 산산조각 난다.

    우왕좌왕하던 플레이어들은 당최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도망치기에 급급할 뿐.

    애초에 그들의 눈에는 아틀란둠의 NPC들이 보이지도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번쩍!

    무기를 버리고 냅다 도망치던 귀스타프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창해룡 버뮤다는 모든 함대를 절멸시키고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나 남은 눈알이 살벌하게 빛난다.

    버뮤다는 두 개의 뿔과 하나의 부러진 뿔을 들어 또다시 트라이던트 다이브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첨탑의 꼭대기에 오연히 서 있는 내가 있다.

    나는 또다시 밀려오기 시작한 쓰나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

    “10.”

    죽음의 카운트다운.

    이미 내 머릿속에는 모든 계산이 끝났다.

    창해룡 버뮤다가 세 뿔끝의 에임을 내게 맞춘다.

    “9.”

    이윽고, 해류가 거세게 요동치며 주변을 흽쓸어 간다.

    하지만 뿔 하나가 부러진지라 위력은 전만 못했다.

    “8.”

    버뮤다가 나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7.”

    가로막던 해저인 군단의 잔당들이 완전히 와해된다.

    “6.”

    트라이던트 다이브의 여파가 몰아쳐 최후의 내성(內城)을 무너트렸다.

    “5.”

    이제 버뮤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류가 내 몸에 닿는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4.”

    버뮤다가 내 앞까지 쇄도해 왔다.

    놈은 고개를 들어 내 몸을 향해 거대한 뿔끝을 찔러 넣었지만…….

    “3.”

    안타깝게도, 버뮤다의 거리 계산은 틀렸다.

    원래대로라면 내 몸을 관통해야 했을 놈의 첫 번째 뿔, 그것은 게슈탈트의 집게발에 의해 반으로 부러진 뒤였던 것이다.

    “2.”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부러진 뿔의 절단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저 뿔이 부러지지 않았었더라면 놈은 나를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과에 만약이란 없다.

    “1.”

    카운트는 끝났고.

    [……!]

    창해룡 버뮤다는 돌진하던 자세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콰-콰콰콰콰쾅!

    내가 있던 시계탑은 간발의 차이로 붕괴를 면했다.

    직선 궤도로 돌진하던 창해룡이 갑자기 피격 직전 몸을 틀더니 옆으로 넘어져 성벽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우르르릉!

    무너져 내리는 반대편 내성.

    육중한 돌무더기에 깔린 버뮤다는 그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띠링!

    <세계 최초로 ‘창해룡 버뮤다’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고인물>

    <보상이 지급됩니다!>

    <‘창해룡’이 쓰러졌습니다>

    <심해의 수원(水源)이 사라졌습니다>

    <‘하해(下海)’를 제외한 모든 바다의 수위가 낮아집니다>

    <바다의 잔물결들이 모두 잡힙니다>

    <해풍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모든 해변가엔 밀물과 썰물이 사라집니다>

    <바다 밑에 가라앉았던 모든 난파선들이 떠오릅니다>

    <삼각지대에서 실종되었던 모든 것들이 수면 위를 향합니다>

    <※위의 지형 변화들은 앞으로 720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상해(上海)의 모든 것들이 ‘고인물’ 님의 업적에 경의를 표합니다>

    <아틀란둠의 왕위계승권자 후보 1순위가 되셨습니다>

    <던전 ‘블루홀’이 사라졌습니다>

    <‘하해(下海)의 왕’이 ‘고인물’ 님의 업적에 관심을 표합니다>

    .

    .

    나는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알림음들을 들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0.”

    시간이 결국 내 손을 들어주었다.

    깎단의 효과가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