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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02화 (602/1,000)
  • 602화 상해(上海)의 왕 (10)

    “어어!? 너희들!?”

    내가 휘둥그레진 눈을 들자 비로소 불청객들의 모습이 자세히 보인다.

    해골만 남은 얼굴, 낡은 가죽옷, 따개비와 산호, 조개껍데기가 들러붙어 있는 피부.

    …그리고 한 마리의 커다란 게.

    선장모를 삐딱하게 쓴 레흐락과 그를 등에 태우고 있는 커다란 게 게슈탈트가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게슈탈트는 부채처럼 넓은 마지막 쌍의 다리를 휘저어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녀석들이 밀어내는 물살 때문에 나는 뒤로 조금 밀려나야 했다.

    너무 의외의 상황이라 그런가 도저히 황당함을 숨길 수가 없다.

    나는 벙 찐 표정으로 물었다.

    “……늬들, 여긴 왜 왔냐?”

    그러자 레흐락이 썩어버린 한쪽 눈알을 찡긋하며 윙크를 보낸다.

    [은혜를 갚으러 왔지, 친구.]

    그는 손을 뻗어 내 가슴팍을 툭 쳤다.

    그러자 레흐락을 태우고 있던 게슈탈트 역시 거대한 집게발을 들어 그 끝으로 내 가슴팍을 툭 친다.

    찡긋-

    거대한 괴물 게가 한쪽 눈을 움직여 윙크를 하는 모습을 보자니 어딘가 그로테스크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후를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쿠르르르르르르륵!

    눈앞의 해류가 사납게 격동한다.

    말스트룀!

    바다의 배꼽이라 불릴 정도로 큰 와류의 중심부에서 창해룡 버뮤다가 거대한 뿔 세 개를 앞으로 내민 채 전면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피어(fear).

    고정 S+등급 몬스터가 무서운 이유 중 하나이다.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고 손발이 덜덜 떨린다는 것.

    크라켄의 ‘고생물’ 특성을 가지고 있는 나조차 용이 내뿜는 피어에 질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인데 눈앞의 이 주정뱅이 녀석들이야 오죽하랴?

    ……하지만 놀랍게도, 레흐락은 창해룡 버뮤다가 내뿜는 기세를 온 몸으로 쬐고 있으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등갑 위에 태우고 있는 게슈탈트 역시도 마찬가지다.

    ‘뭐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나는 멍한 표정으로 레흐락과 게슈탈트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녀석들은 창해룡 버뮤다의 피어를 받아 내고도 멀쩡한 것일까?

    그 해답은 레흐락이 곧 알려 주었다.

    [그거야 바로 이 ‘용기의 물약’ 덕분이지!]

    그의 손에서 빛나고 있는 유리병 속 호박색 액체.

    -<레흐락의 럼(Rum)> / 재료 / D

    대해적 레흐락이 목숨 다음으로 아꼈던 명주.

    알코올 도수 105%의 위엄을 자랑하는 독주 중의 독주(毒酒)로 너무 많이 마셨다간 실명한다.

    레흐락이 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바로 독한 럼주였다.

    마시면 눈이 멀어 버린다는 독주.

    나 역시도 익숙한 아이템이다.

    레흐락은 게거품을 내뿜고 있는 게슈탈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요놈 한 병이면 저깟 파란 도마뱀 따위는 안 무섭다 이거야!]

    과연,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지금 술에 취해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나는 기가 막혀 물었다.

    “……너희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내려왔냐?”

    기껏 감옥에서 탈옥시켜서 해후시켜 놨더니 설마 이런 지옥까지 제 발로 내려올 줄이야.

    그것도 잔뜩 취한 채로!

    하지만, 천하의 창해룡 버뮤다를 앞에 두고도 레흐락은 여전히 태연했다.

    [……글쎄. 술 마시기 좋은 곳?]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술병을 하나씩 입에 문 채로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세 뿔을 앞세운 창해룡 버뮤다가 무시무시한 필살기 ‘트라이던트 다이브’를 감행 중이다.

    …쿠르르르르르륵!

    어마어마한 여파가 몰아친다.

    드디어 버뮤다의 다이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히죽히죽 웃고 있는 레흐락과 게슈탈트가 있었고.

    “아, 안 돼! 이 주정뱅이 바보들아! 늬들이 그걸 어떻게 막아!?”

    나는 경악하여 소리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저 녀석들이 시간을 벌어 줄 때 냅다 도망쳐야 하는 게 맞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콰쾅!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놀라운 이변이 일어났다.

    창해룡 버뮤다의 세 뿔이 게슈탈드의 등갑을 두드리는 순간, 엄청난 충격파가 몰아치며 주위를 초토화시킨다.

    버섯 모양으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진흙 구름, 휘몰아치는 수류, 무너지는 절벽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걷히고 난 뒤 드러난 것은 뒤로 한 치도 밀려나지 않은 채 우뚝 버티고 있는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모습이었다!

    [……술이 확 깨는군.]

    터져나가는 껍데기 파편, 토막난 살점.

    그러나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의지에는 조금의 흠집조차 없다.

    [하지만 무섭지 않아.]

    술기운이 싹 가시고 난 뒤에도 그들의 눈은 맑고 굳건했다.

    오히려 흔들리는 눈으로 뒤로 물러난 것은 창해룡 버뮤다 쪽이었다!

    [……그으윽!?]

    창해룡의 거대한 몸이 빳빳하게 굳은 채 가늘게 떨린다.

    다이브 식의 공격 패턴 뒤에는 늘 저릿한 상태이상 ‘마비’가 오기 마련이다.

    창해룡 버뮤다는 반동 데미지를 입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

    나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게슈탈트는 분명 A+급 몬스터.

    반면 창해룡 버뮤다는 이 세계를 17등분으로 나누어 지배하는 신, 바다의 절반을 다스리고 있는 고정 S+급 몬스터이다.

    그 둘 사이에는 마치 반딧불이와 태양을 견주는 듯한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슈탈트는 창해룡 버뮤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아니, 막아 낸 것도 모자라 뒤로 밀어내기까지 한 것이다!

    [……!?]

    창해룡 버뮤다 역시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나 황당했는지 입을 딱 벌린 버뮤다, 하지만 녀석은 지금 자기 공격의 반동 탓에 마비가 와서 일순간 행동이 정지한 상태이다.

    이 급박한 상황 속, 나는 빠르게 생각했다.

    ‘백전노장 특성 때문에 갑각이 탈 A+급으로 단단해진 탓인가?’

    하기야, 나에게 얻어맞고 아키사다 아야카 레이드에게 얻어맞고 또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 다른 수많은 몬스터들을 뚫고 오면서 게슈탈트의 갑각은 점점 단단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이 버뮤다의 돌격을 막아 낼 정도로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한 번뿐.’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속의 살점과 내장들을 훤히 드러내면서도 게슈탈트와 그의 등에 우뚝 서 있는 레흐락의 기세는 조금도 죽지 않았다.

    …후두둑! …후두두둑!

    물론 몸이 천천히 가루로 변해 바스라져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쩌적! 쩌저적! 파스스스스……

    게슈탈트의 두 집게발 끝부터 시작해 전신 갑각이 부서져 먼지가 되고 있었다.

    한편, NPC인 레흐락의 몸은 점점 흐릿해져 간다.

    당연히 헤비 게임폐인인 나는 그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소멸(消滅).

    완전히 사라지는 것.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두 손을 들었다가 이내 다시 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흐락은 자기가 해야 할 다음 행동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손으로 술병을 들어 올렸다.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건배.]

    그리고는 기어코 남은 것들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꿀꺽-

    부서진 이빨들이 술과 함께 목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순간 눈 주변이 뜨거워진다.

    백전노장 특성의 신비로움은 어디까지일지 새삼 경이로울 정도였지만…… 그 정도 되는 기적이 두 번 연달아 일어날 리가 없다.

    잠깐 벌어진 기적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까, 이성적이었으니까.

    “이제 됐어, 이 자식들아! 너희도 도망쳐! 죽는다고!”

    나는 머릿속의 잡념을 몰아내고 레흐락과 게슈탈트를 향해 외쳤다.

    비록 게임 설정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끝에 상봉한 저 두 친구를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점점 흐릿해져 가는 몸으로 내 앞을 가로막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친구. 자네 덕에 두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지. 하나는 술, 하나는 바로 이 녀석이야.]

    레흐락은 돌아보지 않은 채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게슈탈트 역시 만신창이가 된 집게발을 들어 올려 나를 향해 휘저었다.

    ……저건 설마 가라는 뜻?

    이내, 창해룡 버뮤다가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세 개의 뿔끝이 또다시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레흐락이 게슈탈트의 등을 쓰다듬으며 외쳤다.

    [자, 또 한 번 막아 보자고. 저 녀석, 아직 술도 한 잔 못 마셨다고! 이런 데서 죽게 할 수는 없지!]

    그러자 게슈탈트는 부서져 가는 몸으로도 레흐락의 말에 반응한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도망칠까? 아니면 함께 싸워?

    어떻게 해도 창해룡 버뮤다를 바로 죽일 수 있을 확률은 낮다.

    깎단을 먹였으니 도망치는 것이 상책.

    …하지만 이게 정말 상책일까?

    그때.

    콰-가가가가가각!

    창해룡 버뮤다가 한 발 빨랐다.

    놈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우리를 덮쳐 왔다.

    [와 봐라! 이 안줏거리야-!]

    레흐락이 이를 악물고 게슈탈트의 등에 납작 엎드렸다.

    바로 그때.

    또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번쩍!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몸에서 눈이 멀 듯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잉!? ‘지옥바퀴 대왕게’의 상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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