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01화 (601/1,000)

601화 상해(上海)의 왕 (9)

“……역시 인생에는 반전이 없군.”

나는 눈앞에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심연을 헤치고 위로 솟구쳐 오른 것은 바로 크툴루 크라켄이었다.

고-오오오오……

이 거대한 문어는 너덜너덜해진 살점을 눈처럼 흩뿌리며 천천히 융기해 오른다.

죄다 끊어진 촉수, 거대한 몸뚱아리는 이미 걸레짝이 되었다.

심해의 저변에서 태양처럼 빛나던 눈알은 이미 빛을 잃고 흐리멍텅해졌다.

“…….”

나는 만신창이가 된 크라켄의 몸을 올려다보았다.

문어의 살점이 이처럼 부드럽고 하얀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대지 위에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그때.

…꿈틀!

나를 내려다보던 크라켄의 죽은 눈이 한번 움직였다.

찌직-

무언가 질기고 두터운 것이 찢어지는 소리.

마치 떨어져 내리는 번개처럼 삐뚤빼뚤한 금이 심연을 두 조각으로 가른다.

…뿌지지지직! 쫘아악!

크툴루 크라켄의 몸뚱이는 내가 보는 앞에서 두 조각으로 찢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상해의 왕 블루 드래곤, 창해룡 버뮤다!

결국 해저 대난투의 승리자이자 최후 생존자는 이 녀석이 된 것이다.

딱히 반전이랄 것도 없는 이 결과에 내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던 오즈가 음흉하게 웃는다.

[큭큭큭- 늙은 파랭이 꼴이 말이 아니군. 고작 이깟 문어 새끼 한 마리한테 저렇게까지 몰리다니 말이야. 내 불카노스 비늘이었으면 고작 저따위 빨판쯤은……]

하지만, 지금 버뮤다를 비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놈의 진청색 비늘은 분명 크라켄의 부리에 긁히고 빨판에 빨려 많이 너덜너덜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단단했다.

세 개나 되는 뿔도 크라켄의 피와 점액으로 더러워져 있을 뿐 여전히 날카로웠다.

크툴루 모드로 변한 크라켄이 온 힘을 다해 촉수로 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실금 하나 가지 않은 것을 보면 대체 물리방어력이 얼마나 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한편.

버뮤다는 멀어 버린 왼쪽 눈을 감은 채 반대편의 오른쪽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분화구 속에서 끓어오르는 해수와도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크라켄을 향해 돌진할 때 내 뿔에 네놈의 끔찍한 시체를 못 박아 뒀어야 하는데.]

쥘 베른이 집필한 ‘해저 2만리(20,000 Leagues Under The Sea)’에 나오는 유명한 명대사가 아닌가!

버뮤다는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답게 크라켄의 갑작스러운 습격이 나와 연관이 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르륵!

버뮤다의 좌우로 물이 끓고 얼기를 반복하며 또다시 순환해류가 만들어졌다.

말도 안 될 정도의 속도로 몰아치는 해류 폭풍!

나는 그 거대한 말스트룀을 보며 이곳이 곧 승부처임을 직감했다.

“좋아.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두 개의 깎단이 역한 녹색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파리 대왕의 역병이 봉인된’ 깎아내는 단말마> / 양손무기 / S(S+) / 강화: +10

고문기술자들 중에서도 가장 음침하고 흉악한 이들이 쓰는 무기.

고결한 천사장조차도 이 칼 앞에서는 신을 모욕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이템 속에서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의 숨길 수 없는 지독한 악의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공격력 +990 (+990)

-파괴불가 (특수)

-특성 ‘능지처참(陵遲處斬)’ 사용 가능 (특수)

-특성 ‘능지처참(陵遲處斬)’ 사용 가능 (특수)

-특성 ‘극독(劇毒)’ 사용 가능 (특수)

-특성 ‘극독(劇毒)’ 사용 가능 (특수)

벨제붑을 잡고 얻은 주문서로 인해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도트 데미지.

한 번이라도 적중되면 죽을 때까지 생명력을 갉아먹는 악의(惡意)가 날을 벼린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동시에, 나는 거세게 날뛰는 해류에 몸을 한번 내던진 뒤 전신을 검붉은 기운으로 코팅했다.

-<이어진 폴다운 모드>

LV: 92

호칭: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을 잡고 얻은 불완전변태 특성.

생명이 한번 다했을 시 모든 스탯이 10배로 폭증하는 사기 스킬이다.

‘여벌의 심장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포션도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이번에는 시간이 좀체 내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

빨리 승부를 내야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콰콰콰쾅!

무시무시한 해류에도 분명 틈이라는 것이 있다.

덜 깎여나간 바위들의 밑동마다 생겨나는 사각지대, 그나마 지형 데미지가 적은 구역.

그러면 그 구역으로 어떻게 다이브하느냐?

……바로 해초를 이용해서이다.

“네가 네 발목을 잡은 거야!”

나는 버뮤다가 온 사방에 흩뿌려놓은 해초들을 향해 펄쩍 뛰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는 것은 고인물의 기본이다.

하지만 미리 사전에 맵의 오브젝트들을 모조리 파악하는 것은 2류에 불과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지형지물을 임기응변으로 적재적소에 응용, 이용하는 것이 바로 1류!

휘리릭- 탁!

9시 방향의 해초를 잡고 미끄러져 건너편으로 날아간 뒤 3시 방향의 해초를 잡고 다시 미끄러져 6시로.

그리고 버섯처럼 생긴 바위 밑동을 붙잡고 잠시 숨을 돌렸다가 7시 방향 부서진 난파선에 휘감긴 해초를 잡고 또다시 다이브!

나는 가닥가닥 끊어져 사방에 걸려있는 해초들을 번갈아 잡아가며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창해룡 버뮤다가 세 개의 뿔끝을 휘젓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거나 먹어라!”

나는 소용돌이의 힘을 역이용해 절벽을 박찼고 곧장 버뮤다의 몸을 향해 돌진했다.

평소 내가 낼 수 있는 속도보다 10배나 빠른 움직임이었다.

…뿍!

폭풍을 뚫고 침을 박아 넣는 쌍살벌 한 마리.

내 깎단은 정확히 버뮤다의 왼쪽 가슴팍에 꽂혔다.

그것은 놈의 왼쪽 눈이 멀어 왼편에 시각지대가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오오오오오!?]

버뮤다는 깜짝 놀라 몸을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두 발의 탄환처럼 날아든 깎단의 저주와 벨제붑의 극독은 벌써 놈의 피부를 뚫고 몸 안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초당 최대 체력의 0.04%의 도트 데미지.

즉. 놈은 2,500초. 41분 40초 뒤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고정 S+급 몬스터의 어마무시한 자연회복량을 염두에 두지 않은 계산이지만)

하지만, 그 대가로 내가 치러야 할 값은 막대한 것이었다.

우지지직!

나는 창해룡이 휘두르는 앞발에 맞아 그대로 절벽에 처박혔다.

콰콰콰콰쾅!

해저의 단단한 암벽을 두부처럼 뚫고 틀어박힌 나, 하지만 앙버팀 특성 덕분에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목숨을 건졌다고 해서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끄윽.”

나는 단단한 암벽 구멍 속에 처박힌 채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HP야 여벌의 심장과 얼마 남지 않은 포션 덕분에 다시 채울 수 있었지만…….

키이이이이잉-

지금 눈앞 정면에 겨누어진 세 개의 뿔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지 않고 있었다.

창해룡 버뮤다. 놈은 자신의 눈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물었다.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의 근원에 들어가 보았느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거닐어 본 적이 있느냐?]

성서에 나오는 한 구절.

‘……지금 나한테 그 경험을 시켜 주겠다는 건가?’

몬스터의 대사치고는 참 얄밉다는 생각이 든다.

“젠장! 좀 빠져라!”

나는 꽉 낀 암벽 틈에서 몸을 빼내며 이를 악물었다.

씨어데블의 점액으로 몸을 감싼 뒤 크라켄의 틈 특성을 발현하자 비로소 이 좁디좁은 구멍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창해룡의 세 뿔이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할 수 없다!’

가불기. 회피도 방어도 불가능한 절대적인 공격.

상해의 왕이 필살의 의지를 담아 작렬시키는 ‘트라이던트 다이브(Trident dive)’!

말스트룀을 상회하는 수준의 어마어마한 공격력을 오로지 세 뿔 끝에만 집약해서 터트리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의 OP기술이다.

앙버팀으로 버틴다 해도 그 뒤가 문제였다.

놈의 비늘에서 뿜어져 나오는 격렬한 수류 때문에 온 세상천지가 바위와 난파선의 조각으로 가득하다.

1의 HP로는 아마 여벌의 심장을 가동시킬 틈도 없이 으깨져 죽을 것이 분명했다.

…콰콰콰콰콰콱!

이윽고, 창해룡 버뮤다가 세 개의 뿔을 앞세우고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주변에 몰아치는 쓰나미가 이 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혼자 왔으면 안 됐나?’

하지만 여기에 드레이크와 윤솔이 함께 있다고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싶다.

회귀 전, 후의 세상에서 모두 공략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죽음을 직감했다.

창해룡 버뮤다 레이드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미션이었던 것이다.

……그때.

퍼펑!

모든 것을 체념했을 때, 내 귀에 들려오는 굉음이 있었다.

고개를 드니 천장을 이루고 있던 거센 해류를 뚫고 무언가 커다란 것이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아주 낯익은 글씨체로 쓰인 문구.

<애인급구 010-990X-XXXX>

이마에 우스꽝스러운 낙서를 적어 놓은 해골, 그리고 그 해골을 등에 태우고 있는 거대한 몸집의 게 한 마리.

[……친구여! 도우러 왔다네!]

바로 레흐락과 게슈탈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