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00화 (600/1,000)

600화 상해(上海)의 왕 (8)

아득한 공해(空海).

우주처럼 어둡고 넓은 심해의 밑바닥에 장송곡과도 같은 캐롤이 으스스하게 울려 퍼진다.

태양과도 같은 적빛을 뿜어내는 외눈, 그리고 그 아래 수없이 많은 촉수와 빨판들이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크라켄 ‘크툴루’ 모드> -등급: S+ / 특성: 고생물, 대심해, 지진, 풍랑, 틈, 나포

-서식지: 블루홀 ‘밑바닥’

-크기: ?

-빛도 어둠도 없던 시절에 살던 먼 태고의 생물.

해수형 몬스터의 ‘궁극(窮極)’,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그의 힘은 능히 신에 비길 만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세계관 근간을 이루고 있는 17마리의 ‘고정 S+등급’ 몬스터.

하지만 눈앞에 있는 크툴루 모드 크라켄은 그 17 엔트리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규격 외, 그 자체로 인과율을 비틀어 버리는.

세계관의 룰을 어기고 있는 존재. 이방인.

이 세계관에서 홀로 툭 불거져 나온 예외자(例外者)인 것이다.

…더군다나 분노에 찬 그 모습은 흡사 고대의 악신과도 같은 모습!

도저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흉상(凶相)이었다.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라켄의 본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수면 위, 아니 섬 위에서 상대했던 크라켄의 HP는 약 2억가량.

정확히는 209,759,000이었다.

하지만 심해 깊숙이 내려갈수록 놈의 체력과 스탯은 점점 상승했다.

마지막에 난파선 옆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거의 8억이 넘는 무시무시한 피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상해(上海)에서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지금! 크라켄의 HP는……

‘이런 미친!? 십육억!?’

나는 손을 휘저어 눈앞에서 지직거리는 노이즈를 걷어 내고는 상태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1,678,072,000.

창해룡 버뮤다가 내뿜는 방해 피어에 조금 깨져 보이긴 했지만 분명 상태창에는 16억이 넘는 숫자가 기입되어 있었다.

즉,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대심해 속 크툴루 모드 크라켄은 과거 지상에서 상대했던 크라켄보다 8배나 더 강한 것이다.

‘……벨제붑의 체력이 15억 정도 아니었었나?’

물론 체력 수치가 곧 전투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크라켄은 거의 고정 S+급 몬스터에 필적하는 힘을 뿜어내고 있음이 확실했다.

…쭈뼛

모골이 송연해진다.

등골의 식은땀은 배어나오자마자 심해의 차가운 해수에 풀어져 사라졌다.

새삼 과거 레벨 40대였을 적에 크라켄을 잡았던 것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었는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비록 수면 위, 지상까지 끌어낸 뒤에 온갖 꼼수를 동원해서 이뤄 낸 결과였지만.

[오-오오오오오오!]

크라켄은 더욱 더 거대해진 몸을 움직여 해저의 절벽을 타 내려왔다.

원래도 산맥 같았던 촉수들은 이제는 더욱 커져 그야말로 해저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과도 같았다.

크툴루 크라켄은 이 거대한 촉수 여덟 개를 부려 자신의 근원을 더 깊은 해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 끝에는 진청의 핵심, 상해의 왕인 창해룡 버뮤다가 있었다!

[……얕은 것아. 네 감히 어디로 내려오느냐.]

버뮤다는 자신이 크라켄의 알을 깨 버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을 향한 크툴루 크라켄의 분노도 이해할 수 없음이 당연했다.

[오-오오오오오오!]

크툴루 크라켄은 거대한 촉수를 뻗어 심해 전체를 통째로 조여 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빨판들이 해저의 협곡 곳곳을 압박해 들어온다.

하지만 버뮤다가 괜히 상해의 왕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콰-콰콰콰콰콰쾅!

세 개의 뿔끝에서 뻗어나간 소용돌이는 하늘을 무너트릴 기세로 휘둘러지던 크툴루 크라켄의 촉수를 갈가리 찢어 버린 것도 모자라 그 너머의 본체에도 깊은 흉터를 남겼다.

마치 바다를 세 조각으로 갈라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위력!

…우르릉!

진흙이 만들어 낸 먹구름 속에 플라즈마 번개가 수없이 내리친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

음울한 괴성과 함께, 촉수를 하나 잃어버린 크툴루 크라켄이 몸을 움직였다.

그것의 체적은 실로 넓고 거대한 것이어서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능히 광역에 밤을 드리우는 것이 가능했다.

와기기기긱!

크툴루 크라켄의 남은 촉수와 빨판들이 창해룡의 몸을 거칠게 휘감기 시작했다.

기나긴 날을 살아온 고룡의 육체는 크툴루 크라켄의 촉수로 휘감기 딱 좋을 만큼 거대했고 또 육중했다.

…우드득! …우드득!

심해 속, 두 초생물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펑! 퍼퍼펑! 펑!

곳곳에서 들려오는 폭음은 크툴루 크라켄의 기둥 같은 근섬유들이 끊어지는 소리였고 또한 창해룡 버뮤다의 비늘이 살갗에서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이빨과 손톱, 비늘과 촉수, 부리, 근육과 뼈가 맞부딪치며 모든 것이 뒤틀린다.

…쿠오오오오오!

해류가 미쳐 날뛰며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 가기 시작했다.

물속이라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몇 개의 국가를 한꺼번에 아노미 상태로 몰아 넣기에 충분할 정도로 엄청난 초자연재해급 쓰나미였다.

지금 그런 것이 실시간으로 몇 십, 몇 백 겹이나 중첩되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모든 것이 뒤집히고 부서지고 휘몰아치는 세상.

…후두둑! …후둑! …후두두둑!

그 와중에 내리는 마린 스노우(marine snow).

격렬한 수류에 떠밀려 온 크라켄의 살점 조각들이 함박눈처럼 나부낀다.

“…어? 어어? 이거 나도 위험하겠는데?”

나는 얼굴에 철퍽철퍽 달라붙는 살점들을 떼어 내며 중얼거렸다.

쿠르릉!

아니나 다를까, 두 바다괴물의 싸움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 역시 여파에 휩쓸리게 되었다.

모래언덕들이 연달아 무너졌고 바위들이 바스라진다.

자욱한 흙구름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너덜너덜해진 근섬유와 비늘 부스러기들이 뻘흙에 뒤섞여 눈발처럼 날이고 있었다.

…쾅! …퍼퍼펑!

대지가 주저앉는다.

블루홀의 지반이 아래로 푹 꺼지며 주변에 서 있던 거대한 바위들이 점점 협곡의 중앙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미친.”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센 수류가 모래구름을 걷어 내자 보인 것은 거대한 어비스! 심연 그 자체였다!

…쿠르릉!

태고의 심연 블루홀 속에서조차 그 밑이 보이지 않는 칠흑의 구멍.

기어코 이 두 바다괴물이 지반마저 찢어발겨 놓은 것이다!

“……세상에!”

새로이 나타난 구멍으로 물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모든 해류들이 그곳을 향했다.

쿠르르르르르륵!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속도로 헤엄을 쳐 봤지만 한낱 인간인 이상 자연재해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마치 물에 빠진 벌레가 하수구로 빨려들어 가는 모양새.

결국 나는 반대로 헤엄치는 것을 포기했다.

‘……반대가 안 된다면!’

곧장 구멍으로 돌진할 뿐이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는 저 두 바다괴물의 거체에 짓눌려 쥐포가 되어 버릴 테니까.

…쿵!

나는 새롭게 생겨난 크레이터 안으로 몸을 던졌다.

주변에 몰아치는 바위와 난파선 파편들에 맞아 죽지 않은 것은 솔직히 기적이라고 밖에는 설명 못 하겠다.

나는 절벽에 움푹 패인 틈에 작은 게처럼 틀어박혀 밖을 내다보았다.

오-오오오오오오!

심해에 울려 퍼지는 끔찍한 괴성.

아득하며 또 까마득하다.

붉은 피와 푸른 피가 해류를 타고 번져 진흙구름을 뒤덮는다.

너무나도 거대한 것들의 싸움,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검붉은 파도와 하늘하늘 떨어지는 살점들의 토막눈뿐이다.

쌀알만 하게 흘러들어오던 빛도 그림자와 진흙, 바위 부스러기와 파편들에 의해 모두 차폐되었다.

이곳 심해는 영원한 밤에 갇혀버렸다.

“……소리로만 들어야겠네.”

사운드 플레이. 나라면 소리만 들어도 밖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Prison walls break, Old Ones awake♬

(감옥이 무너지고 옛 것들이 깨어난다)

Stars brightly burning, boiling and churning♪

(별들이 밝게 불타고 끓어오르고 뒤섞이며)

Bode a returning season of doom♬

(멸망의 시기가 돌아올 징조이다)

Scary scary scary scary solstice♪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무서운 날)

Very very very scary solstice♬

(너무 너무 너무나도 무서운 날)

“…아우, 브금 진짜!”

하지만 이 와중에도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이 장송곡 같은 BGM 때문에 당최 바깥 상황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시각도 촉각도 청각도 후각도 모두 마비되었다. 공포도 이런 공포가 없다.

다른 플레이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저 눈을 꼭 감고 죽음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눈을 크게 빛냈다.

“하지만 난 아니지!”

고인물로서의 직감이 말해 준다. 틀림없이 밖으로 나갈 방법은 있을 것이다.

…꾸르륵!

봐, 이것 봐! 구멍에 물이 거의 다 차 가니까 해류가 약해지잖아.

이제 적당한 틈을 찾아 이 구멍을 나서면…….

나서면…….

“어으악!? 저게 뭐야!”

나는 드디어 바깥에서 싸우는 두 괴물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볼 수 있었냐고?

내가 나간 게 아니라 놈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버뮤다와 크라켄은 서로 맹렬하게 뒤엉키며 이쪽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

흉흉한 안광들이 나를 향한다.

고인물의 직감이 말했다.

아까 전의 직감은 틀렸다고.

나는 이 깊은 심연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인간.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것이 너를 영원케……]

[뿌우우- 쀼!]

오즈와 쥬딜로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바로 그때!

꽈악-

그 순간, 내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해류에 휘말려 들어온 수많은 해저 부산물 중 하나겠지만 손에 닿는 감촉이 유달리 익숙했다.

“…버뮤다가 길러 낸 해초!”

나는 손에 잡힌 길고 굵은 해초를 단단히 붙잡았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밖의 어디 뭉툭한 부분에 걸려 있는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해왕의 그물맥> / 재료 / A+

심해의 높은 수압을 견디며 자라난 해초는 그 강도를 달리 한다.

깊은 심해에서라면 불카노스조차도 이 해초를 끊을 수 없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말스트룀, 바다의 배꼽.

휘말려든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이 초자연적인 폭력 속에서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딱 하나, 지금 이 생명줄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몸이 산산조각날 법한 수압 속에서 나는 버티고 또 버텨냈다.

여벌의 심장이 한번 펄떡일 때마다 최고급 포션들이 뭉텅이로 증발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해초는 말스트룀 속에서도 꺾이거나 끊어지지 않고 낭창낭창하게 잘 버텨 주고 있다.

내가 천천히 기어나가고 있는 구덩이 속에서, 크라켄과 버뮤다는 맹렬하게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둘은 어둠으로 녹아들어 간다.

…키이이이이이이잉!

이명과도 같은 굉음, 뭐 때문에 들려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만 해저화산이 분출하는 것처럼 엄청난 양의 피와 살점들이 구덩이 밖으로 연신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치열한 싸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쿵!

어떤 소리는 끝을 모르는 심연에 먹힌 듯 멀리서 들리다가.

콰쾅!

또 어떤 소리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구멍 근처에서 들려온다.

나는 이 끔찍한 혼돈의 소용돌이 밑바닥에서 조용히 선고 결과를 기다렸다.

저 구덩이 속에서 기어 나올 것은 누구인가.

상해의 지배자 버뮤다인가!

아니면 거대한 분노 그 자체인 크툴루 크라켄인가!

“……아무도 안 나와 주는 게 나로서는 고마운 일인데.”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쿵!

해저의 지축을 울리는 굉음.

마침내 분화구 속이 잠잠해졌다. 승자가 정해진 것일까?

예상대로의 뻔한 결과일까?

아니면 예측을 뒤엎는 반전이 일어나 줄 것인가!

나는 식은땀을 해류에 태워 흘려보내며 뻘흙들이 침잠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기-기기기기긱…

원래의 형태를 크게 잃어버린 바다괴물 하나가 분화구 밖으로 그 거대한 육체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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