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화 상해(上海)의 왕 (7)
“……좋아. 이게 있으면 버뮤다와도 한 판 붙어 볼 수 있지.”
나는 손 안의 주황색 알약을 꼭 움켜쥔 채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콰쾅! …우르릉!
머리 위의 암초가 갑자기 무너지는 바람에 나는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으음, 일단 가까이 가야 하는데. 접근 자체를 불허해 버리네.”
나는 침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르르르륵-
어마어마한 속도로 흐르는 상승해류, 하강해류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분쇄하며 버뮤다의 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초속 10미터 이상의 저 괴물 같은 폭풍에 한번 말려들기라도 하면 아마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온 몸이 바위에 부딪쳐 으스러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더군다나, 주의해야 할 것은 해류뿐만이 아니었다.
쉬리리릭-
발목을 휘감아 조이는 부드러운 느낌에 고개를 내리니 거대하게 자란 바닷말이 긴 잎사귀를 뻗어 내 다리를 타오르고 있었다.
꿀렁- 꿀렁- 꿀렁-
곳곳에서 미역, 다시마 등의 거대 해초류가 내 몸을 휘감아 조인다.
“…흠, ‘호객행위’ 특성인가?”
대상의 움직임을 원천봉쇄하는 기술, 심한 경우는 지형 전체를 이용해 압박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온몸에서 점액을 분비해 왼팔을 붙잡는 다시마와 오른팔을 붙잡는 미역줄기를 걷어 냈다.
그리고 왼발을 휘감는 바닷말과 오른발을 휘감는 우뭇가사리도 전부 털어내 버렸다.
그 외, 대황, 스피룰리나, 톳, 두발, 덜스, 김, 파래, 사슬풀, 주걱, 애기풀, 마디잘록이, 물잔디, 마리모들도 죄다 뿌리쳤다.
하지만 뿌리쳐 낸 해초들은 또다시 해류에 떠밀려 내게로 다가온다.
워낙에 길어서 그런가 한번 몸에 감기면 떼어 내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끈질긴 풀떼기들이네.”
심해의 가혹한 수압에 단련된 해초들이라 그런가 말스트룀에 휘말려서도 끊어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뱀처럼 움직여 내 몸에 달라붙었고 빙글빙글 회전하며 나를 휘감아 조였다.
휘리리리릭-
해초들은 길게 이어져 일련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마치 어둠 대왕이나 천사황제 니고데모, 혹은 벨제붑의 줄넘기 식 공격 패턴과도 흡사했다.
“줄넘기라면 이제 지긋지긋한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해초들이 나를 옭아매기 위해 휘둘러진다.
나는 전후좌우, 사방팔방으로 몰아치는 해초의 줄을 피해 깨금발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 느, 냐!”
그러자 해류가 격동하며 해초들의 움직임이 더욱 더 광폭해진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자욱한 진흙구름 너머, 창해룡 버뮤다가 만들어 내는 말스트룀이 더욱 더 본격적으로 위세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돌 조각과 진흙 무더기, 난파선의 파편과 해초들이 뒤섞여 회전하기 때문에 스치기만 해도 즉사일 것이다.
“깡… 총! 깡… 총! 뛰면서!”
하지만 나는 줄다리기의 줄처럼 날아드는 이 모든 것들을 전부 피해 내고 있다.
극한까지 개화한 회피력 스탯은 이 가혹한 환경에서도 내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해 준다.
[으으윽!? 버뮤다 이 늙은이! 그새 더욱 강해졌군! 불카노스만큼이나 질긴 이 해초들을 어디서 이렇게 길러 냈지!?]
[호에엥 뿌!]
오즈와 쥬딜로페 역시도 나를 따라 해초들을 열심히 뛰어넘고 있었다.
쉬리리릭- 찌지지직!
해초들이 폭풍에 잘게 찢어져 더욱 더 세밀한 가닥으로 나뉜다.
줄넘기는 계속해서 줄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중, 두 가닥으로 늘어난 해초들의 줄이 나를 노린다.
삼중, 세 가닥쯤 되면 이제 줄을 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사중, 이미 일반적인 줄넘기 통념을 벗어났다.
오중, 미묘한 박자가 추가된다.
육중, 이건 무겁다.
그리고 칠중, 팔중, 구중, 십중, 십일중, 십이중, 십삼중, 십사중, 십오중, 십육중,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점점 무수한 줄이 나를 감싼다.
하지만!
“…어! 디를 가느냐!”
나는 또다시 무수한 줄 세례를 피해 낸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줄이 늘어날수록 줄넘기의 난이도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처럼 94중 줄넘기쯤 되다 보면…….
“오히려 더 잘 보이네.”
발을 내딛을 때 땅보다 줄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더 넓다 보니 몇몇 특정한 포인트만 반복해서 밟아 주면 오히려 밟아야 하는 땅의 여백이 두드러져 보이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까 성실한 게이머라면 평소에도 횡단보도 등을 건널 때 검은 부분을 밟으면 죽고 흰 부분만 밟고 가야 산다는 식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꾸준히 하도록 하자!)
물론 여기까지 오는 것은 상당한 피지컬을 요하는 일이기에 일반적인 게이머라면 대부분 게임을 접는 그 순간까지 모르고 넘어가는 팁이다.
그때.
…턱!
나는 동대문 밀리오레 호객꾼마냥 손목을 강하게 잡아오는 미역줄기 한 가닥 때문에 손에 든 물건을 놓치고 말았다.
“아앗!?”
주황색 알약이 손에서 떨어져 저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천려일실(千慮一失),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러나.
…탁!
위기의 순간, 그것을 다시 주워온 이는 바로 오즈였다.
[인간! 칠칠맞구나! 이런 위기의 순간 머저리 같이 구는 건 정말 질색……]
“어, 그래. 잘했다.”
[……에헤헤헤헤.]
내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자 오즈는 저도 모르게 실실 웃는다.
뒤늦게 급정색을 해 봐야 이미 늦은 일이다.
그때.
[오-오오오오오오!]
폭풍 저 너머에서 또다시 세 개의 뿔이 이쪽을 향해 겨누어지는 것이 보였다.
고-오오오오…
창해룡 버뮤다가 뿜어내는 피어가 망망대해를 뒤흔들고 있었다.
물속에서 느껴지는 피어는 지상의 피어와 차원이 다르다.
지상에서는 귀를 막거나 나무, 바위 등 지형 오브젝트의 뒤로 숨으면 되지만 이곳은 물속.
대기에 퍼지는 파장이 그대로 몸에 와 때려 박힌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거품이 온 세상천지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찌나 기포 발생량이 많은지 물속이지만 간간히 숨이 쉬어질 정도다.
‘……위험하다!’
고인물 특유의 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창해룡 버뮤다가 공격 패턴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적!
오른편의 바다가 뜨거운 열로 인해 끓고 있었다.
반면 왼편의 바다는 차갑게 얼어붙는다.
망망대해 전체가 시뻘겋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창해룡 버뮤다의 공격 패턴을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았다.
“…엘리뇨와 라니냐의 특성인가.”
회귀하기 전, 아틀란둠 근처에 서식하는 네임드 몬스터 ‘엘리뇨’와 ‘라니냐’를 상대해 본 적이 있다.
놈들은 긴 몸체를 가진 거대한 산갈치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붉은 갈기를 가진 ‘엘리뇨’는 주변의 바닷물을 뜨겁게 끓여서 공격해 오는 반면 푸른 갈기를 가진 ‘라니냐’는 주변의 바닷물을 차갑게 얼리는 식으로 공격해 온다.
엘리뇨는 해수의 온도를 급격히 상승시켜 주변에 화상 데미지를 뿌리는 것도 모자라 해류의 흐름을 변화시켜 폭풍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 어마무시한 규모의 적조 현상을 일으켜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숨이 막혀 제풀에 필드를 떠나게 만드는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반면 라니냐는 해수를 급격히 냉각시켜 주변에 동상과 빙결 데미지를 뿌린다.
거기에 ‘브리니클’이라 불리는 죽음의 고드름을 만들어 플레이어를 베거나 꿰뚫고 더 나아가 얼음 속에 가둬 버리기까지 하는 공포스러운 몬스터가 바로 이 녀석이다.
둘이 힘을 합친다면 공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네임드 마수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둘은 사이가 나빠 결코 한 필드에 등장하지 않기에 각개격파했을 경우 클리어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 자식… 두 특성을 한꺼번에 쓰잖아!? 거기에 위력도 몇 배나 더 세고.”
나는 버뮤다의 양팔에서 얼고 끓는 해수를 보며 경악해야 했다.
아무리 내가 이 게임의 고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저 어마어마한 규모의 광역기를, 그것도 서로 성질이 상극인 자연재해를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확실히, 막거나 피하라고 만든 공격이 아니군.”
나는 인정했다.
창해룡 버뮤다를 사람의 힘으로, 그것도 1:1로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방법은 있지.”
나는 몸에 들러붙은 해초들을 털어버린 뒤 손을 쫙 폈다.
손바닥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홍빛.
크라켄의 금고 속에서 꺼내온 비밀 무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켄의 알> / 재료 / S
크라켄이 창대한 덩치로 자라나기 전, 그 시작은 아주 미약했다.
그것은 바로 크라켄이 낳은 알이었다.
…딸랑!
내 귓불에 달린 귀걸이가 가볍게 울리며 소리를 냈다.
크라켄의 알껍질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그런가 크라켄의 알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앞의 버뮤다를 향해 크라켄의 알을 흔들어 보였다.
“크라켄은 평생을 살며 단 하나의 알을 낳지. 보여? 그게 바로 이거야.”
그 뒤는 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탄력 있는 해초 줄기에 크라켄의 알을 덮은 뒤 그것을 쭉 잡아당겨 새총처럼 만들었다.
핑-
크라켄의 알은 저 앞의 버뮤다를 향해 콩알탄처럼 날아갔고.
…으직!
이내 너무도 쉽게 깨져 버렸다.
약한 알 껍질이 찢어지며 그 안의 내용물이 천천히 바닷물 속에 번진다.
부글부글부글부글…
그리고 그 알 속의 내용물은 버뮤다가 내뿜고 있는 뜨거운 거품방울에 실려 위로 올라간다.
저 위를 향해 계속.
“가서 부모님 모시고 오렴.”
나는 버뮤다의 몸에 닿아 깨진 알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
창해룡 버뮤다는 내가 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놈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톡톡히 깨닫게 되었다.
Scary scary scary scary solstice♬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무서운 날)
반응은 엄청나게 빨리 왔다.
아니, 애초에 알이 깨지기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Very very very scary solstice♪
(너무 너무 너무나도 무서운 날)
오싹한 BGM이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가라앉아 온다.
다가온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다섯 발.
…여섯 발.
…일곱 발.
…여덟 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
.
.
…분노에 찬 걸음으로!
오…오오오오오…!
동시에, 심해의 천장 해류를 찢어발기고 튀어나오는 거대한 여덟 촉수가 있었다.
크라켄!
하나뿐인 알이 파괴되었음을 느낀 어버이가 직접 이 아득한 심해로 원수를 찾으러 왔다.
“……!”
순간, 위에서 내려온 크라켄의 모습을 본 나는 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잠에서 완전히 눈을 뜬, 분노에 완전히 눈이 먼 크라켄의 모습은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크라켄 ‘크툴루’ 모드> -등급: S+ / 특성: 고생물, 대심해, 지진, 풍랑, 틈, 나포
-서식지: 블루홀 ‘밑바닥’
-크기: ?
-빛도 어둠도 없던 시절에 살던 먼 태고의 생물.
해수형 몬스터의 ‘궁극(窮極)’,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그의 힘은 능히 신에 비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