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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97화 (597/1,000)
  • 597화 상해(上海)의 왕 (5)

    …꾸르르르륵!

    나는 금고 안의 물건을 회수하는 즉시 몸을 뒤로 뺐다.

    난파선의 창문을 비집고 나오자 여전히 깊은 수면에 빠져 있는 크라켄이 보인다.

    아득한 심연 속에 잠들어 있는 태고의 심해괴수.

    지금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놈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적으로 쉽게 인식되지 않아서 그렇다.

    만약 놈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이 공간은 그야말로 지옥이 되겠지.

    “계속 편안한 밤 되라고 친구.”

    나는 짧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돌아섰다.

    품에는 방금 전 금고를 따고 훔쳐 온 물건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다.

    “조심조심.”

    크라켄의 거대한 촉수들은 하나하나가 독립된 생명체들과 같다.

    나는 이 촉수들을 자극하지 않게 주의하며 해저 깊은 곳을 더듬어 내려갔다.

    놀랍게도, 블루홀의 밑바닥 아래에는 더욱 더 깊은 심연이 존재했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실이 있더라’ 같은 느낌이랄까?

    “……무슨 주식이라도 하는 느낌이네.”

    어두운 심해의 암벽을 더듬어 내려가고 있는 동안 오즈와 쥬딜로페가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특히나 오즈는 저 위에 잠들어 있는 크라켄에게 아주 관심이 많아 보인다.

    [인간. 저 위에 있는 상해의 문어와는 싸우지 않을 생각인가?]

    “일단은.”

    [……아쉽군.]

    오즈는 위에 있는 크라켄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뭐가 아쉽다는 건지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윽고, 나는 블루홀에서도 진정코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띠링!

    <히든 던전 ‘블루홀 최저점’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와아.”

    탄성이 절로 입을 비집고 나온다.

    나는 입안으로 극저온의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딱 벌렸다.

    그동안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심해의 제일 깊은 곳.

    이곳은 지금까지의 어둠이 무색할 정도로 밝은 별천지였다.

    거센 해류가 벽을 만들어 위의 세상과는 격리되어 있는 공간, 하지만 폭풍의 핵이라 부를 수 있는 이곳 저점만은 고요하다.

    수없이 많은 산호들이 산과 계단, 완만한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육산호의 대지, 온갖 색색깔의 육방산호류가 뿜어내는 영롱한 빛이 무지개를 이루며 언덕과 언덕 사이를 잇는다.

    곳곳에서 보글보글 끓는 작은 화산들이 분화구를 옹기종기 한데 모아 끓이고 있었기에 입김처럼 따듯한 난류가 이 격리 공간 안을 맴돌고 있었다.

    산호들이 발산하는 빛은 파랗고 붉고 푸르른 해초류 숲을 통과할 때마다 기묘하고 굴절되고 반사되어 마치 북극광과 같은 오로라를 천막처럼 드리운다.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회귀 전후, 평생을 통틀어 처음 봤다.

    “여기는 뭐, 그냥 다른 맵이네 거의.”

    나는 오로라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천장해류를 보며 감탄했다.

    낮은 구릉지대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또다시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북쪽 산호숲, 동쪽 해초숲, 서쪽 조개껍데기 무덤을 각각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지대에 어마어마한 퇴적물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난파선(難破船).

    아주 오래 전의 축조 양식으로 만들어진 가지각색의 배들.

    시대도 종류도 규모도 다른 수많은 고대 문명의 흔적들이 이 아득한 심해에 가라앉아 옛 영광을 되뇌고 있다.

    놀라운 것은 여기 가라앉아 있는 것들이 배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열기구, 비공정, 기병대의 대포와 마차, 전차… 심지어 성(城)까지 보인다.

    대체 어떤 연유로 이 깊은 곳까지 딸려 온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것들이다.

    “…히야. 이런 거 구경하는 맛에 이 게임 하지.”

    나는 난파선들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커다란 첨탑을 바라보았다.

    세 쌍둥이 탑.

    세 개나 되는 높고 굵은 탑은 뾰족한 지붕을 위로 곧추세운 채 위풍당당하게 군림한다.

    그리고 그것의 주위를 덮고 있거나 혹은 꿰어 있는 난파선들은 으스스하면서도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지형 중앙의 세 쌍둥이 탑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나는 문득 해초와 따개비들에 뒤덮인 고성의 문턱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어라?”

    나는 금색으로 물든 모래톱 위를 주목했다.

    …반짝!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분홍색과 살구색이 뒤섞여 빛나는 한 조개껍데기였다.

    “오오!”

    나는 허리를 굽혀 조개껍데기를 주워들었다.

    조개는 소라의 한 종류였는데 특이하게도 껍데기에 나 있는 나선형의 회전 무늬가 좌측을 향해 촘촘히 뻗어나가고 있었다.

    내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는 오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인간. 조개껍데기는 뭐 하러 줍나?]

    “모르는 말씀.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나는 오즈를 향해 조개껍데기를 흔들어 보였다.

    “이 세계의 조개껍데기들은 대부분 나선무늬가 오른쪽으로 휘돌아 있지. 왼쪽으로 뻗어 있는 것들은 극도로 희귀하단 말이야.”

    물론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다만 몇몇 수집가 NPC, 그리고 가상현실 세계의 가상생물학에 심취한 일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이 왼편나선형 조개껍데기가 황금보다도 더 귀한 것으로 꼽힌다.

    “아마 박물관이나 개인수집가들에게 넘기면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탐험가로서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지.”

    나는 모래톱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왼편나선형 조개들을 수집했다.

    하나같이들 크고 나선무늬가 촘촘한데다가 색깔까지 영롱하여 수집물로써 높은 가치를 기록할만한 것들이었다.

    [호애앵- 뿌-]

    [응? 아니, 그건 오른편나선형이잖나. 아니, 밥 먹는 손이 오른손이야. 넌 지금 반대로 수집하고 있다고.]

    [응뿌뽑-]

    [아악! 그건 소라껍데기가 아니라 내 뿔이야! 잡아당기지 마라!]

    쥬딜로페와 오즈 역시 나를 따라 열심히 조개껍데기를 주으며 따라온다.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세상에.”

    떨리는 동공, 크게 벌어진 입.

    나는 저 금빛으로 빛나는 모래톱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왼편으로 뻗은 조개껍데기가 무수히 쌓여 있는 곳.

    그 너머에서 반짝이는 금색의 모래톱은 정말로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모래가 아니라 황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세 쌍둥이 첨탑의 뾰족한 지붕 끝에 꿰뚫려 허리가 부러지거나 배에 구멍이 뚫린 난파선들.

    허공에 박음질당한 그 수많은 난파선들의 뱃속에서 후두둑 후두둑 쏟아지고 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들이었다!

    난파당한 각종 보물선의 옆구리나 배에 뚫린 구멍에서 떨어져 쌓인 보물들이 심해의 밑바닥에 산을 이루고 있었다.

    오래 전 양식으로 주조된 금화 은화,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과 오르하르콘 투구, 각종 보석으로 세공된 아티펙트들.

    그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은 능히 고르딕사의 금광을 능가해 마몬의 황금향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희귀 조개와 보석, 금화, 은화, 각종 명화와 값비싼 도자기, 진귀한 고대의 아이템들이 도처에 그득하다.

    “내 이런 순간이 한번은 더 올 줄 알았지.”

    나는 고르딕사 레이드와 마몬 레이드에 이어 세 번째 노다지를 찾고야 만 것이다!

    ……하지만, 고르딕사 때와 마몬 때와는 다른 결정적인 요인 하나가 있다.

    -<이어진>

    LV: 92

    호칭: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의 위상(특전: 폭식 창자)

    HP: 920/920

    벨제붑을 죽이고 얻은 ‘폭식 창자’ 특성!

    바로 인벤토리가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나게 늘어나는 특성이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쩍 벌어진 내 인벤토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두동강 난 난파선의 끊어진 허리에서 금맥들이 창자처럼 줄줄이 뽑혀 나온다.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와 은괴, 금화, 은화, 동화, 보석, 아이템들이 내 인벤토리에 착착 쌓이기 시작했다.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나는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황금의 파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예전에는 드레이크와 윤솔까지 세 명이 해서 보물을 퍼담고 또 퍼담았는데도 인벤토리가 부족하거나 시간이 없어 만족할 만큼 쓸어 담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거기에 지금은 아이템 회수의 전문가인 오즈도 있지 않은가!

    [제기랄! 내가 이런 몰이꾼 신세라니!]

    오즈는 지금 열심히 날개를 퍼덕여 금화들을 몰고 와 내 인벤토리로 몰아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아이템을 회수하는 데는 이 녀석 만한 펫이 없다.

    나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는 소지금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심해로 내려오는 그 끔찍한 여정을 버텨낸 보람이 있구만! 쇠공 속에 갇혀서 말야.”

    유토러스의 스크루지 후작도 깜짝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

    이걸 현실의 돈으로 환전하면 다 얼마냐 싶다.

    바로 그때.

    내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보물들을 거의 다 폭식했다고 느끼고 있을 때쯤,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WARNING!]

    [WARNING!]

    [WARNING!]

    [지형이 급변합니다!]

    [주변 해류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입니다!]

    갑자기 낯선 경고음과 함께 주변의 해류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난파선들과 보물의 산. 그것들이 통째로 요동치며 지형이 크게 격변한다.

    우지지지직!

    보물이 거의 다 사라지자 난파선들 역시도 부서져 나무조각으로 변해 나부꼈다.

    오즈의 표정이 변했다.

    [……말스트룀(maelström)! 바다의 배꼽!]

    녀석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수없이 많은 난파선들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도 직감했다.

    보물을 주워 담는 피버 타임이 끝났다.

    그리고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를 순간이었다.

    …우지지직! 콰쾅! 우르릉!

    천지가 무너지고 뒤틀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확 뒤바뀌었다.

    세 쌍둥이 탑.

    난파선들의 무덤 사이에 묘비처럼 우뚝 서 있던 세 개의 뾰족한 건축물.

    그것들이 지금 해저의 가장 깊은 곳에서 천천히 융기해 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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