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화 상해(上海)의 왕 (4)
지금 저 밑에 웅크리고 있는 크라켄의 덩치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크라켄> -등급: S / 특성: 고생물, 대심해, 지진, 풍랑, 틈, 나포
-서식지: 블루홀 ‘밑바닥’
-크기: ? m
-빛도 어둠도 없던 시절에 살던 먼 태고의 생물.
저 자식,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커졌다.
그것도 족히 두 배는 더 말이다!
Scary scary scary scary solstice♬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무서운 날)
Very very very scary solstice♪
(너무 너무 너무나도 무서운 날)
주변을 울리고 있는 장중하고 으스스한 캐롤 풍의 BGM.
심해 밑바닥의 깊은 협곡 속에서 크라켄은 미동도 없이, 그저 눈알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빛을 어스름하게 뿌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밑으로 침강했다.
한 걸음을 아래로 내딛을 때마다 수압이 미칠 듯이 강해졌지만 심해 특성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 움직임에 제약은 없었다.
‘…뭐지? 왜 가만히 있지? 나를 아직 못 봤나?’
크라켄은 내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가만히 웅크린 채 입에서 물거품만을 토해 내고 있을 뿐.
노오란 눈알 하나가 어둠 속에 빛을 뿌린다.
마치 심해에 뜬 태양과도 같이 크고 밝은 구체.
“……?”
나는 크라켄의 눈알을 가까이서 보고 깜짝 놀라야 했다.
블루홀 그 자체를 보는 듯 시커먼 동공, 그 깊은 구멍 근처로는 수없이 많은 실핏줄들이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뱀 떼처럼 중앙부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눈이 멀 듯 밝게 뿜어져 나오는 누런 빛 역시도 내 시야를 온통 아득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거대한 눈알은 지금 반 뼘 두께의 얇고 넓은 피막에 덮여 있었다.
놈은 지금 수면 상태인 것이다!
‘……그런가, 이렇게 자고 있다가 위에서 아틀란둠의 여덟 함대가 덤벼들면 깨어나는 건가.’
평소에는 이렇게 대심해 깊은 곳에서 자고 있다가 싸움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면 위로 급부상해 오는 공격 패턴인가 보다.
부글부글부글…
크라켄이 자면서 뿜어내는 거대한 물거품 무리가 위로 부상해 오른다.
나는 그것을 뚫고 조금 더 깊숙하게 잠수했다.
크라켄의 몸을 가까이서 살필수록 피부로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 자식, 진짜 커지긴 커졌네.’
예전에 만났던 크라켄의 기본 HP는 209,759,000.
블루홀 입구 근처에서 심해 특성을 받을 때의 HP는 419,518,000.
하지만 지금 크라켄은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의 접근조차 불허하는 블루홀 최심부에 도사리고 있다.
놈의 특성도 그냥 심해가 아니라 ‘대심해’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놈의 총 HP는?
‘…839,036,000!’
총 팔억 사천 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피통.
이 정도면 고정 S+등급 몬스터와 견주어도 그리 밀리지 않는 수준의 체력이다.
‘다른 스탯들도 엄청 뻥튀기됐겠지?’
블루홀에서 막 올라온 심해 크라켄보다 2배, 지상에서 상대했던 크라켄보다는 4배나 강한 스탯.
확실히, 크라켄은 S급 몬스터들 중에서도 개체값 최상위권의 초엘리트 몹으로 분류된다.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 식인황제 보카사. 하나 더 추가로 꼽자면 데스웜 정도가 이에 견줄 수 있을까?
‘…하긴, 저번에도 온갖 꼼수들을 죄다 동원해서 겨우 잡았었지.’
나도 많이 파워업하긴 했지만 크라켄 역시도 그만치는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여기는 놈의 홈그라운드이니 싸워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블루홀 속의 지형을 완벽하게 숙지하지도 못했는데 싸워 봐야 필패지.’
더군다나 오늘 레이드의 목적은 이 녀석이 아니다.
나는 가능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심해의 협곡 절벽을 타 내려갔다.
밑. 더더욱 밑으로.
“……!”
그때, 나는 그냥 지나치려던 크라켄의 촉수 밑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거대한 촉수들이 모여 꽁꽁 감싸고 있는 것,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난파선이었다.
반으로 쪼개져 있는 거대 갤리온 선.
크라켄은 그것을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 촉수들로 꽁꽁 감싼 채 잠들어 있는 것이다.
“흠, 무슨 배게 끌어안고 자는 것 같네.”
나는 크라켄의 수면 자세에 묘한 호기심이 들었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다른 난파선들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한 저 반쪽짜리 배가 뭐기에 저렇게 꼭 끌어안고 자는 것일까?
고인물 특유의 감이 외친다.
나는 천천히 헤엄쳐 크라켄의 빨판들 사이로 움직였다.
…꿈틀!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둥근 빨판들은 어둠 속에 묻힌 덫처럼 도사리고 있다.
자칫 건드리기라도 했다가는 촉수들이 독자적으로 나를 덮쳐오겠지.
하지만 나는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서 크라켄이 끌어안고 있는 배로 다가갔다.
짤랑-
귓불에 매달린 귀걸이가 움직이며 작은 소리를 낸다.
-<크라켄의 알껍질 귀걸이> / 귀걸이 / S
크라켄은 평생을 살며 단 하나의 작은 알을 낳는다.
부화한 크라켄의 새끼는 평생토록 자신이 나온 알껍질을 소중히 보관한다고 한다.
-이동속도 +300%
-파괴불가 (특수)
-특성 ‘틈’ 사용 가능 (특수)
이것은 마치 도난 위기에 놓인 자동차의 경보벨처럼 연달아 울린다.
아득한 심해의 정적 속에서 그 소리는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
“…뭐야?”
나는 갑작스러운 반응에 약간 당황했다.
그래서 손으로 귓불을 꽉 쥐어 귀걸이가 짤랑이는 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다.
짤랑- 짤랑-
하지만 귀걸이는 계속해서 울려댔다.
마치 잠들어 있는 크라켄을 깨우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빼 놔야겠네.”
나는 귀걸이를 잠시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그러자 귀걸이가 짤랑거리는 소리도 멎어 버렸다.
꾸르륵…
잠들어 있던 크라켄이 물거품을 한 무더기 뱉는다.
다행스럽게도 대처가 빨랐는지 놈은 깨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헤엄쳐 크라켄의 촉수다발 틈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물에 잠긴 배가 보인다.
배의 허리, 용골이 토막 나 있는 부분에는 크라켄의 촉수가 꽉 들어차 있었기에 나는 뱃머리 쪽으로 에둘러 전면에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향했다.
따개비와 산호로 뒤덮인 원형 창문으로 몸을 집어넣자 이미 초토화된 배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배 안쪽에는 훨씬 더 많은 따개비와 산호, 조개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낙지와 문어, 오징어 등등, 아틀란둠에서 추방된 온갖 두족류들이 곳곳에 숨어 누런 눈알을 굴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습격해온 크라켄에게 저항했던 해적들의 해골이나 칼자국들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배 중앙에 떡하니 놓인 커다란 철 덩어리였다.
가로, 세로, 높이 2미터의 정육면체 쇳덩이.
그것은 하나의 금고였다!
“…이것 봐라?”
나는 입맛을 다셨다.
가까이서 본 금고는 아주 매끈매끈했다.
작은 따개비 한 마리조차 달라붙지 않고 깨끗한 것으로 보아 크라켄이 얼마나 물고 빨고 했을지 짐작이 간다.
“설마 함정은 아니겠지?”
간혹 보물상자나 아이템 등으로 위장하고 있는 몬스터들이 있지만 이 경우에는 아닌 것 같았다.
크라켄이 내뿜은 것으로 보이는 끈적한 점액이 금고를 보호하듯 코팅하고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해 보인다.
“크라켄 자식, 이 금고를 지키고 있었던 거였군.”
잘 때 꼭 끌어안고 잤던 것은 이 안에 뭔가 소중한 것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그게 뭔지 매우 궁금한 사람이다.
그때.
[……한번 열어 보지 그래?]
내 어깨 위에서 쑥 솟구치는 머리가 있었다.
오즈, 녀석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금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관심 있냐?”
[솔직히 말하면 있다. 오래 전, 상해에 커다란 문어 한 마리가 사는데 그놈이 진귀한 보물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거든.]
오? 이런 곳에서 또 세계관의 일부 히스토리를 듣게 되는군.
오즈는 은근히 게임의 감칠맛을 더해 주는 펫이다.
나는 손을 뻗어 금고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꽈아아악!
마몬의 힘으로도 이 금고는 개방되지 않았다.
-띠링!
<이 금고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파괴불가를 알리는 알림음만이 들려올 뿐이다.
“……으음,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보겠는데.”
나는 혹시나 금고에 작은 균열이라도 있나 하고 주변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때.
“오? 이건 뭐지?”
나는 금고 손잡이 밑에서 작은 구멍을 찾아냈다.
“……에이.”
그곳으로 비집고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단념했다.
그것은 안으로 통하는 구멍이 아니라 열쇠구멍이었기 때문이다.
‘포기해야 하나?’
내가 잠시 고민하는 순간.
[……뿌!]
오즈가 올라타 있는 반대쪽 어깨에서 쥬딜로페가 튀어나왔다.
“어?”
나는 어느새 인벤토리 한 구석이 빈 것을 발견했다.
쥬딜로페 이 녀석이 내 인벤토리를 뒤져 아이템 하나를 무단으로 가지고 나온 것이다.
-<알 수 없는 열쇠> / 재료 / S
아주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열쇠.
쥬딜로페의 손에 들려 있는 거무튀튀한 열쇠.
그것은 심해 스토커 씨아블로를 잡고 얻은 아이템이었다.
“에이, 이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금고랑 열쇠가 몇 개인데, 이게 여기 열쇠라고?”
만약 그렇다면 우연도 이런 우연이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군.”
게이머라면 믿을 수 있는 상황이다.
한 던전 속에서 마주친 금고와 열쇠라, 상당히 확률이 높이 보이긴 한다.
까닥까닥-
내가 쥬딜로페를 향해 이리 오라는 손짓을 보내자.
까닥까닥-
쥬딜로페는 옆에 있던 오즈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이리 오라는 시늉을 한다.
[…….]
오즈도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펫의 펫 신세인 녀석보다 밑에 있는 존재는 없다.
과연 ‘낮으신 분’다운 처지였다.
줄도 백도 없는 오즈는 결국 쥬딜로페를 등에 태우고 뽈뽈뽈 날아와 열쇠를 건넨다.
나는 열쇠를 들고 금고로 다가가 손잡이 밑에 있는 구멍에 슬쩍 그것을 끼워 넣어 보았다.
그러자.
…철커덕!
놀라운 소리가 들려왔다.
열쇠는 금고의 열쇠구멍에 꼭 맞았고 너무나도 쉽게 금고의 문을 열어 버린 것이다.
“잘했다.”
나는 쥬딜로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듯 고양이 같은 하울링 소리를 낸다.
옆에서는 오즈가 부러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뭐 아무튼. 나는 금고 문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기기긱-
오래된 철문이 나무 바닥을 긁는다.
과연 크라켄이 그토록 소중하게 지키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부디 쓸모가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