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92화 (592/1,000)

592화 레흐락의 술 (7)

<애인급구 010-990X-XXXX>

이마에 이상한 낙서를 하고 있는 레흐락. 그는 오랜 친구의 앞에 섰다.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가 겨우 회복한 게. 녀석 역시도 오랜 친구의 앞에 섰다.

…휘이이잉!

둘 사이에 차가운 해류가 불어온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레흐락이었다.

[어리석은 녀석. 그렇게 무작정 기다린다고 죽은 놈이 돌아오겠느냐?]

그러자 게는 무거운 집게발을 들어 바닥을 향해 쿵 내리찍는다.

이윽고, 두 남자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이, 이 바보 같은 자식! 이깟 술이 뭐라고!]

레흐락과 게는 한달음에 달려가 서로의 몸을 꽉 부둥켜안았다.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게슈탈트 이 녀석, 정말 많이 컸구나! 원래는 손톱만 하던 녀석이!]

게와 레흐락은 서로를 향해 울음을 터트렸다.

뒤에 쌓여있는 럼주는 먼지와 진흙에 덮인 채 수백 년이 지난 세월 동안 그대로였다.

(물론 내가 몇 병 꼬불치긴 했지만 말이다)

레흐락은 눈물, 콧물을 훔치며 독주의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게슈탈트가 뿌듯한 기색으로 그런 레흐락을 궤짝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반짝!

수북하게 쌓인 진흙과 먼지를 걷어내자 투명한 유리병 안에 호박색으로 빛나는 럼주가 보인다.

[오오오! 그대로야! 모든 것이 폭풍우 치던 그날 밤 그대로라고! 이럴 수가!]

주정뱅이 레흐락, 그리고 그를 따르던 작은 게 게슈탈트는 뛸 듯 기뻐하며 주류창고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시자! 오늘은 마시는 거야! 이 녀석, 이 꼬마 게 녀석아! 너도 마셔라! 응? 그 큰 집게발로 병 주둥이를 잡을 수나 있겠냐! 하하하하! 그래! 마셔라! 예전처럼 한번 다 같이 마시고 취해 보자!]

레흐락은 럼주 병을 입에 꽂고 게슈탈트의 입에도 한 병 꽂아 준다.

[적셔!]

그리고 그렇게 병나발을 불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오-웨에에엑!]

그리고 동시에 둘 다 허리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했다.

술을 못 먹는 것은 둘 다 똑같은 모양.

나는 독주의 무덤 앞에서 이 오래 묵은 술들과 그만치는 오래 묵었을 이들의 우정을 바라보며 싱긋 웃고 있을 뿐이다.

그때.

-띠링!

귓가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히든 퀘스트 ‘레흐락의 독주(毒酒)’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몬스터/‘지옥바퀴 대왕게’의 호감도가 MAX 상태입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상해(上海)의 마지막 ‘미탐사구역’ 해금>

나는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상해(上海)’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해(下海)’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하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상해’와 대비되는 개념일 것이다.

‘…자, 말장난은 이만 하고.’

지금부터 내가 고정 S+급 몬스터를 잡으러 갈 맵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세계관은 지구평면설 이론에 입각하여 짜여진다.

제일 거대한 중대륙을 중심으로 울창한 밀림으로 되어 있는 서대륙, 뜨거운 사막으로 되어 있는 동대륙, 온화한 열대기후인 남대륙, 차가운 빙하지대인 북대륙이 십자가 모양으로 뻗어 있는 상태.

그리고 이 다섯 대륙의 주위로 수많은 섬들을 안고 있는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 거대한 바다는 동대륙의 ‘끓는 바다’, 서대륙의 ‘비만 바다’, 남대륙의 ‘숨 쉬는 바다’, 북대륙의 ‘가혹한 바다’로 나뉘는데 이는 사실 플레이어들이 임의로 나눈 구분에 불과하다.

작렬하는 열사에 의해 늘 부글부글 끓는 ‘끓는 바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침식물의 영양으로 인해 늘 영양 과잉 상태인 ‘비만 바다’,

극저온의 냉수와 빙하들의 영향으로 늘 차가운 ‘가혹한 바다’,

너무나 맑고 투명해서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는 ‘숨 쉬는 바다’.

이 네 개의 바다는 모두 합쳐 ‘상해(上海)’라고 불리며 NPC나 플레이어들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딱 두 군데만 빼고 말이지.’

대부분이 밝혀졌다고 알려져 있는 상해에는 오직 두 개의 미탐사구역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는 미지의 절대심연, ‘바다 밑의 바다’인 ‘하해(下海)’로 가는 통로.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상해의 왕’이 사는 구역이다.

<보상: 상해(上海)의 마지막 ‘미탐사구역’ 해금>

나는 상태창의 메시지에 주목했다.

‘…어디 보자. 상해의 마지막 미탐사구역이라고?’

아직 현 시대의 플레이어들은 모르겠지만 이 세계의 바다는 시스템 상 딱 두 가지로 구분된다. 아까도 말했지만 상해와 하해가 바로 그것.

그렇다면 하해로 통하는 입구는 상해에 속하는 영역이 아니니 상해의 마지막 미탐사구역이라는 말이 뜰 리가 없다.

고로 저 메시지가 뜻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상해의 왕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좋은 일이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루트를 찾아낸 것이니까.

“아틀란둠의 함대와 교전하지 않고 길을 뚫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저 멀리 레흐락과 게슈탈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아니, 길이 언제 열린다는 거야 근데?”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눈앞에는 포탈은커녕 땅바닥에 뚫린 구멍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대체 상해의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 언제 어디에서 열린다는 거야?

‘뭐지 이거? 설마 길이 열리긴 열렸는데 나를 거기로 데려다 준다는 뜻은 아닌 건가?’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상해의 왕에게 가는 길이 생겨났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걸까?

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네 이노오오옴!]

갑자기 어디선가 벼락같은 호통이 내 귓전을 때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수많은 해저인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헤엄쳐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톱상어 귀스타프와 그의 부하들이다.

“오, 끈질기네.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마침 히든 퀘스트가 찜찜하게 클리어된 것에 기분도 안 좋던 차다.

아키사다 아아캬 일행도 사라졌으니 피카레스크 마스크나 끼고 날뛰어 볼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자식! 꼼짝만 해 봐라 아주! 저기 있는 뼈다귀 탈옥수와 게딱지 녀석을 가루로 만들어 주겠어! 저 수북하게 쌓인 변변치 않은 술병들까지도 모조리!]

귀스타프는 교활했다.

녀석은 활과 쇠뇌, 대포와 투창으로 무장한 해저인 병사들을 풀어 레흐락과 게슈탈트를 포위했다.

“…으음.”

나는 팔짱을 낀 채 약간 고민했다.

지금 움직이게 되면 오랜만에 해후한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이대로 포격 속에 소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NPC와 몬스터의 우정을 위해 내가 죽을 수는 없잖아?’

참 난감한 일이다. 세상에 이런 선택지도 있나?

톱상어 귀스타프는 비열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네놈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내 여장 취미를 까발린 죄, 결코 용서 못 한다!]

…아, 필사적으로 추격해 오던 이유가 그거였어?

내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형제여! 우리 걱정은 마시게! 어서 도망쳐!]

저 멀리서 해저인들에게 붙잡힌 레흐락이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게슈탈트 역시 몬스터답지 않게 해저인들에게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니 레흐락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귀스타프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네놈만 얌전히 잡혀 준다면 저런 피라미들 쯤은 가여이 여겨 살려 줄 수도 있다.]

“…….”

나는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나를 어쩔 셈인데?”

나를 죽일 셈이라면 이대로 잡혀 줄 수는 없다.

레흐락과 게슈탈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하지만 귀스타프는 씩 웃을 뿐이다.

[어쩌긴? 나는 인도적인 왕이다. 두족류를 제외한다면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아. 네가 다시는 탈옥할 수 없게 가둬 버릴 것이다.]

아하, 그 정도라면 상관없다. 나는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고 해도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알겠다. 얌전히 잡혀 주지. 대신 레흐락과 게슈탈트는 손대지 마라. 그동안 나름 정들었단 말이야.”

[약속하지. 국왕의 명예를 걸고 여기 있는 모든 병사들 앞에서 말이야.]

귀스타프는 허세가 심하긴 해도 자기 명예를 끔찍이 중시하는 성격이니만큼 거짓을 약속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윽고, 해저인 병사들은 창과 활을 겨누어 레흐락과 게슈탈트를 멀리 쫓아내 버렸다.

[형제여! 안 되네! 저놈들의 형벌은 무시무시한……!]

레흐락은 끝까지 저항하며 나를 불렀지만 해저인들의 억센 손길에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게슈탈트는 그런 레흐락이 걱정되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레흐락을 따라간다.

이윽고. 나는 모래톱 위에 혼자 남게 되었다.

…척! …척! …척! …척!

해저인들이 그런 내 주위를 완전히 포위했다.

크라켄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8함대 전체가 어느덧 나를 꽁꽁 에워싸고 있었다.

이내 귀스타프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여봐라! 당장 죄인을 투옥하라!]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는 탈옥의 귀재, 그 어떤 감옥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상황은 이내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철커덩!

내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해저인 두 마리가 거대한 쇠붙이를 가지고 와 나를 덮어씌웠던 것이다.

“…응?”

나는 시야가 일순간 캄캄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조립식 쇠공이었다.

“어? 뭐야. 이러면 나도 못 나가는데?”

쇠공에는 아주 작은 구멍이나 틈도 없었기에 크라켄의 틈 특성으로도 뚫고 나갈 수가 없다.

뻐억-

부숴 버릴까 해서 마몬의 건틀릿으로 후려쳐 보니.

-띠링!

<본 아이템은 파괴불가 속성입니다>

들려와서는 안 되는 알림음이 들려온다.

내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게임에서는 가끔 있다.

플레이어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최악의 함정에 떨어져 결국 빠져나오지 못한 채 캐릭터를 삭제해야 하는 상황이.

‘…헉, 이거 괜한 짓을 한 건가?’

아틀란둠을 너무 띄엄띄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아주 잠시 뇌를 스친다.

그때. 쇠공 밖에서 귀스타프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후후. 그동안 깝죽댄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여봐라! 이 녀석을 깊은 곳으로 던져 버려라!]

그러자 다른 해저인 부관이 묻는 소리도 들린다.

[폐하. 여기가 가장 깊은 곳인데 어찌 이 쇠공을 깊은 곳으로 던져 넣는지요?]

이 상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해저도시 아틀란둠이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멍청아! 여기보다 더 깊은 곳이 한 군데 있잖아!]

나는 그제야 귀스타프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도.

상해의 유일한 미탐사구역.

<블루홀> -등급: ?

크라켄이 살던 둥지.

회귀 전이나 후를 통틀어 그 어떤 플레이어도 출입할 수 없었던 미지의 심연 속으로 나는 내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오직 나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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