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91화 (591/1,000)
  • 591화 레흐락의 술 (6)

    한편.

    아키사다 아야카가 이끄는 공격대는 정면에 있는 보스 몬스터 공략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쾅!

    옥타 캐스팅의 아키사다는 불, 바람, 얼음, 풀, 암석, 전기, 어둠, 빛 마법을 동시에 시전했다.

    동시에 그녀의 뒤를 따르는 스무 명의 마법사들도 제각기 강력한 한타 마법을 뿜어낸다.

    우에바라와 야마카미 역시도 참격을 날려 딜을 착실하게 꽂아 넣고 있었다.

    쩌적- 쩌저적-

    독주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지옥주정꾼 대게> -등급: A / 특성: 물, 심해, 주폭(酒暴)

    -서식지: 독주(毒酒)의 무덤

    -크기: 4.5m.

    -과거 대해적 레흐락의 배를 따라다니며 그가 흘린 술을 받아먹곤 하던 작은 게.

    시간이 많이 지나 레흐락은 죽었지만, 이 게는 친구가 나눠주었던 술맛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오지 않는 레흐락을 기다리며 그가 남긴 럼주를 지키고 있다.

    원래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게.

    지금은 한 등급 위의 상위종으로 진화한 모습이지만 하는 행동은 한결같다.

    여전히 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공격을 맨몸뚱이로 맞으며, 커다란 집게발을 휘둘러 공격보다는 수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게딱지가 깨져 내장이 흘러나와도, 다리가 끊겨 푸른 피가 번져도, 눈알이 터지고 더듬이가 찢어져 나가도 녀석은 버티고 또 버텨 낸다.

    …사실 애초에 이 정도까지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나쁜 몸 상태였다.

    아키사다는 눈앞에서 모든 마법을 탱킹하고 있는 게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A+등급의 몬스터가 어째서 이렇게 체력과 방어력이 높지? 마치 누가 한껏 두들겨 놓은 뒤 일부러 잡지 않고 간 것 같아.’

    간혹 드물게, 맞으면 맞을수록 방어력이나 체력 등이 증가하는 보스 몬스터가 있다.

    눈앞에 있는 대왕게가 아무래도 그런 종류에 속하는 괴물이 아닌가 싶었다.

    …콰쾅! …펑! 우지지직!

    대왕게는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져가는 몸을 움직여 침입자들을 걷어낸다.

    마치 자기가 죽어도 이 뒤에 있는 보물들을 절대 내줄 수 없다는 듯한 기세, 일반적인 던전 수호자와는 차원이 다른, 실로 필사적인 의지와 기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그만 쓰러지세요!”

    아키사다는 최후의 마력을 쏟아 부었다.

    일본 통합 랭킹 1위에 빛나는 그녀의 화력에 수많은 마법사들과 딜러들이 연합해서 넣는 버스트 딜!

    제아무리 A+등급의 엘리트 몬스터라고 해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뜨거운 화염이 주변의 물을 끓이며 게의 몸통을 휘감는다.

    물속에서 그 위력이 극대화되는 전류가 껍데기 위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얼음과 풀, 강철, 독, 바위 등등…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 게를 꺾기 위해 덤빈다.

    우지직- 우직!

    게의 몸을 지키고 있던 마지막 껍데기가 깨지며 안쪽의 부드러운 내장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일반적인 몬스터의 경우 사망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는 집게발을 휘둘러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마치 절대로 뒤에 있는 던전을 개방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던전을 지키려 드는 몬스터는 또 처음이군.”

    “그래 봐야 인공지능이지.”

    “얼마나 좋은 보물을 숨기고 있을지 기대되는데? 빨리 죽여 버리자고!”

    플레이어들은 게를 죽이기 위해 확인사살을 했다.

    또다시 막대한 화력이 게를 향해 날아들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전장에 난입해 드는 괴물체가 있었다.

    퍼-퍼퍼퍼펑!

    그것은 일본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전부 막아 낸 것도 모자라 도로 튕겨 내 버리기까지 했다.

    “…헉!?”

    아키사다를 비롯한 모든 플레이어들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그들의 눈앞으로 방금 전까지 그들이 뿜어냈던 공격들이 전부 되돌아오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쾅!

    대지가 뒤집어지고 묵직한 해진이 사방팔방 날뛴다.

    “으악!? 이게 뭐야!”

    “방금 그거 네 공격이지!? 돌아온 거야?”

    “뭐가 내 마법을 튕겨 냈어!”

    플레이어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욱한 흙먼지 너머를 바라본다.

    이윽고, 해류가 불고 모래 먼지가 걷히며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위풍당당한 알몸 사내. 까마득한 해저의 심해까지 고인 물. 바로 나다.

    “…한국 랭커?”

    아키사다 아야카는 나를 보고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다.

    아키사다와는 마동왕일 때 꽤나 좋은 사이로 있기에 나는 비교적 점잖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게는 지금부터 내가 지킨다.”

    내 말을 듣자 뒤에서 왈칵 우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쓰러진 게를 부축하고 있는 레흐락이 내지르는 감동의 하모니이리라.

    나는 뒤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게를 향해 허리춤의 포션을 아낌없이 뿌렸다.

    위기 시 내가 쓰려고 했던 고오급 포션이다.

    …게게게게게!

    게의 체력 게이지가 쭉쭉 차오른다.

    깨지고 부서졌던 갑각이 더욱 더 두껍고 단단하게 아물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키사다를 비롯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내 행동에 거세게 항의했다.

    “으악! 저 자식 게를 회복시키고 있잖아!”

    “우리가 얼마나 게고생을 해 가며 잡아 놨는데!”

    “인마! 이게 무슨 짓이야! 뭔 깽판이냐구!”

    하지만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뭐라 설명해야 하겠어 이걸.’

    내 퀘스트를 모르는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작정하고 하는 트롤링, 방해행위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저 뒤의 게(이름이 게슈탈트라고 했었던가?)는 진화하게 되면서 기존의 히스토리 설명이 사라져 버렸기에 더더욱 설명이 쉽지 않을 게 뻔했다.

    (말하자면 몬스터가 진화하면서 히든 퀘스트가 더욱 더 수행하기 어렵게 은밀해진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그것을 여기에 있는 이들에게 설명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

    그래서 나는 어려운 길로 돌아가기보다는 쉬운 길로 바로 가는 것을 택했다.

    “꼬우면… 아시죠?”

    나는 깎단을 들어 보이며 모래톱 중앙에 긴 금을 그었다.

    넘어오면 죽는다는 뜻이다.

    나는 짐짓 위엄 있는 태도로 말했다.

    “자신 있으면 넘어 봐.”

    이제 내 위명 앞에 그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물러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키사다 아야카의 힘과 용기를 너무 얕봤다.

    “죽어 주세요!”

    그녀는 순식간에 수인을 그려 8개의 원소마법들을 내게 쏟아 부었다.

    “…어엇?”

    내 예상과 다른 반응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기야, 저들이 알고 있는 나의 압도적인 힘은 마동왕의 것이지 고인물의 것이 아니다.

    “허어, 이렇게 되면 나가린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 수 있나, 실력행사에 나설 수밖에.

    나는 모래톱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오즈의 힘을 이용해 나를 과녁삼아 날아드는 마법들을 모조리 반사했다.

    퍼퍼퍼퍼펑!

    동시에 앙버팀 특성과 혈액포식자 특성으로 주변 상처 입은 것들의 혈액을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으, 으윽!? 저 녀석 흡혈을 한다!”

    “어둠 대왕과 비슷한 능력 같은데?”

    “혈액을 차단해!”

    몇몇 마법사들이 불의 벽을 쳐 허공으로 빨려가는 혈액을 익혀 버린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쭈욱! …쭈욱! …쭈욱!

    일본 플레이어들 말고도 흡혈을 할 대상은 많았다.

    모래톱 아래에서 파랗고 하얀 피들이 뽑혀 나와 나에게로 흡수된다.

    모래바닥 아래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저렙 몬스터들이었다.

    “이 자식!”

    “변태 주제에!”

    우에바라와 야마카미가 나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알몸을 코팅하고 있는 끈적한 점액으로 그 둘의 무기를 흘려보냈고 아예 점액 범벅으로 만들어 바닥을 구르게 만들어 버렸다.

    “으, 으윽! 끈적해! 미끈거려!”

    “메, 메챠쿠챠(めちゃくちゃ)…….”

    공격대의 메인 딜러, 심지어 국가대표급 실력을 가진 이 둘이 1초도 되지 않아 리타이어 되는 모습이 모든 이들이 경악한다.

    물론 아키사다 아야카 역시 마찬가지다.

    “마, 말도 안 돼. 프로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이런 힘을……”

    그녀는 경악 그 자체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마동왕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을 때 지었던 바로 그런 표정이다.

    나는 시선을 흘낏 내려 모래톱 바닥에 널브러진 플레이어들을 쭉 돌아보았다.

    그리고 짧게 한마디 했다.

    “꼬와요? 아니면 아니꼬와?”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내 말을 들은 일본 플레이어들은 저희들끼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껏 대왕게 레이드를 뛰며 체력도 마나도 한계를 보이고 있는 마당인지라 새롭게 등장한 실력 미지수의 랭커를 상대로 또다시 일전을 벌일 여유는 없다.

    이윽고.

    대표인 아키사다 아야카가 텅 빈 마나통을 응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가겠습니다.”

    그녀는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앙다문 채 말했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약육강식, 내가 이대로 보내 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를 느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는 순간.

    “…잠깐만요!”

    아키사다가 나를 부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당신은 한국의 아마추어가 아닙니까?”

    “맞아.”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인다.

    이윽고, 아키사다가 내게 물었다.

    “…마동왕 씨와 겨뤄 보신 적 있지요?”

    꽤 오래 전, 나는 고인물 대 마동왕 특집으로 방송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도플갱어를 이용한 미러전 전략으로 멋지게 만들어 낸 빅매치의 결과는 무승부.

    서로 1승 1패를 기록한 뒤 세 번째에는 둘 다 동시에 죽음으로서 만들어 낸 그림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키사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의 당신은… 마동왕 씨보다 강합니까?”

    음, 뭐라 대답해야 할까?

    나는 약간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친구끼리 싸우는 거 아냐.”

    “…….”

    “하지만 뭐, 굳이 따진다면… 비등비등 하려나?”

    사실 우열을 명확히 가릴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고인물은 1:1 PVP나 보스 몬스터 단일 개체 레이드에 특화되어 있고 마동왕은 대규모 레이드, 혹은 n:1 PVP나 공성전 같은 전장에 특화되어 있는 캐릭터이니까.

    ‘…마동왕이 내 부캐라는 사실을 안다면 기절하겠군.’

    언젠가라면 몰라도 지금은 밝힐 수 없는 비밀이다.

    한편, 아키사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름대로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마동왕에 대해 뭔가 복잡한 생각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자, 시간 없어. 빨리 떠나. 여기는 이제부터 레이드 제한구역이야.”

    나는 깎단을 휘휘 저으며 고압적으로 말했다.

    초토화된 전장의 황폐한 모습과는 달리 팀원들이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한 아키사다 레이드는 쓴맛을 다시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가 저 정도라… 한국에는 정말 강자가 많군요.”

    일본 랭킹 1위인 아키사다가 하는 말이다 보니 어딘가 국뽕 녹아든 사이다가 느껴지긴 한다.

    나는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라고 해 줄까 하다가 너무 가는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자, 그럼 이제 히든 퀘스트의 보상을 수거해 볼까?’

    레흐락과 게슈탈트.

    저 뒤에서 상봉하고 있는 두 친구의 해후를 지켜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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