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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90화 (590/1,000)
  • 590화 레흐락의 술 (5)

    사실 이곳을 탈옥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콰쾅!

    마몬의 힘이 깃든 주먹 한 방이면 철창이고 벽이고 모조리 뭉개 버릴 수 있다.

    [오! 쉩더훡! 이게 무슨 일이야!]

    [죄수가 Turn up! 탈옥했썹!]

    [수인 스웩-]

    해저인 병사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며 패닉에 빠진다.

    [요호! 형제여, 자네 제법 하는구만! 전성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해!]

    레흐락이 내 뒤를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좁은 해저감옥의 외길을 쏜살같이 내달렸다.

    나 역시 심해 특성을 가지고 있는 몸이기에 물속에서의 움직임은 지상에서의 움직임만큼이나 자유로웠다.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뭉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넘쳐흐른다.

    …펑! …퍼펑! …콰직!

    단단한 껍데기를 가진 가리비 해저인, 뾰족한 가시를 가진 성게 해저인, 다섯 개의 팔을 가진 불가사리 해저인 등등이 나를 가로막았지만 녀석들의 랭크는 기껏해야 A급 정도.

    전부 다 한 줌 경험치거리가 되었을 뿐이다.

    그때.

    […어이! 이봐!]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울퉁불퉁한 돌멩이 두 개를 문지르는 듯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긁었다.

    고개를 돌리니 외길 복도 양편에 즐비한 감옥 철창들 사이에서 수많은 손들이 튀어나와 나를 향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갈구하는 말미잘의 촉수들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나도! 나도 꺼내 주고 가!]

    [오오, 우리를 내보내 줘!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몇몇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감옥은 금세 죄수들이 절규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호 4885! 이 죄수! 힘차게! 외칩니다아아아!]

    [배고플 땐! 이 죄수를 꺼내 먹어요!]

    [자,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싸다 싸! 감옥 정리! 폐업! 죄수님이 미쳤어요! 오늘만 석방 대이벤트!]

    [독방은 열린 문~ 독방은 열린 무우우운!]

    급기야 죄수들은 저마다 꺼내 달라며 자기 PR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당장 이 철창을 열어! 그렇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릴 거야! 키히히!]

    [나는 나가서 기름을 캐야 해! 복수를 해야 해! 여기 있을 시간이 없다!]

    [딱 3초 준다! 열어 주세요!]

    [열어 줄 때까지 나는 숨 참는다. 흐읍-]

    수많은 죄수들이 폭발 직전의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선택지가 떴다.

    나 외에 다른 죄수들도 풀어 줄 것인가?

    두 번 고민할 이유가 없다.

    파캉! 파캉! 깡!

    나는 바로 주먹을 들어 나머지 철창들도 죄다 부숴 버렸다.

    그러자 지금껏 해저감옥 깊숙한 곳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이 일제히 세상으로 풀려났다.

    [흐하하하! 나는 자유다! 죽여 버리겠어 플라튠!]

    [오오! 나 에이햅! 자네에게 빚을 졌네! 언제고 하해(下海)로 찾아오시게!]

    [그아아앗! 드디어 탈옥이다!]

    [톱상어 귀스타프! 내 이놈부터 쳐 죽이리라!]

    다양한 외형의 죄수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낙타의 머리를 하고 흰 천으로 전신을 감싼 수인, 다리 여러 개 달린 두족류 계열 수인, 해골만 남아있던 전 세대의 흉악한 해적… 참 다양한 NPC들이 이곳에 갇혀 있었다 싶다.

    저 골칫덩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낸 여파가 어느 정도일까?

    ‘……알게 뭐야.’

    세계관의 인과율, 메인 스토리에 관여하는 비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좋다.

    그것이 헤비 게이머, 겜창의 로망 아니던가.

    “뭐, 모르긴 몰라도 나한테 손해날 것은 없겠지.”

    일은 내가 벌이고 수습은 나를 여기다 가둔 귀스타프가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노오오오오오오옴!]

    감옥 입구를 벗어나 아틀란둠의 성벽을 넘기 직전, 벼락같은 고성이 내 등 뒤를 겨눈다.

    내 어깨 위에 앉아있던 오즈가 재미있다는 듯 씩 웃었다.

    [인간. 버러지 같은 해저인들이 우글우글 몰려오는군.]

    […뿌!]

    [아, 아니. 버러지 비하 발언이 아니라. 자, 잘못했다 그만 때려! 아무튼 해저인들이 우글우글 몰려온다!]

    나는 티격태격하는 오즈와 쥬딜로페를 잠시 떨어트려 놓은 뒤 고개를 돌렸다.

    과연, 격노한 귀스타프가 이끄는 해저인들이 아틀란둠의 자랑 8함대를 이끌고 나를 추격해 오는 것이 보였다.

    지하감옥을 탈출한 수인들은 대부분 붙잡혀 뱃머리에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오, 간만이네 8함대.”

    한때 크라켄과의 전쟁에서 내가 진두지휘했던 범선들, 당연히 어느 위치에 어느 물건들이 적재되어 있는지 훤히 꿰고 있다.

    …콰쾅!

    2번 함선에서 날아온 대포알이 나를 때린다.

    나는 그것을 맞는 즉시 반사 데미지로 되퉁겨 주었다.

    퍼펑!

    내가 쏘아보낸 반사 데미지는 1번 함선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 그 안의 화약고를 온통 휘저어 놓았다.

    …기우뚱!

    1번 함선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옆구리에 적재되어 있던 쇠돌기들이 반대쪽 옆구리를 뚫고 튀어나온다.

    그것은 그대로 3번 함선의 난간에 걸렸고 두 함선은 항로가 어그러져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쾅! 뻐저저적!

    두 대의 함선이 제풀에 침몰하는 광경은 썩 인상 깊었다.

    맨 앞에 있던 귀스타프가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전 함대의 총력을 동원하라! 지금부터 저 녀석의 재해(災害)레벨을 크라켄 급으로 공포하겠다!]

    “…나 하나 잡겠다고 한 나라의 국력 전체가 움직인다고?”

    말하자면 S급 몬스터 취급이라는 건데… 뭐 따지고 보면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얼마 전 칠귀타 급 데스나이트와 1:1로 붙으며 알게 된 것은 나의 풀 파워가 위험등급 S랭크 최상위권의 몬스터와 맞먹는다는 것이다.

    S급 몬스터 중 순위권으로 강한 크라켄 정도면 나와 꽤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겠지.

    “귀스타프, 보는 눈 있네.”

    나는 피식 웃고는 발에 박차를 가했다.

    원래대로라면 크라켄과 능히 일전을 겨룰 수 있는 아틀란둠의 8함대와도 대등히 맞서 싸울 수 있지만… 굳이 여기서 힘 빼 가면서 아무런 득도 없는 싸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이기면 무슨 특전을 줄지 궁금하기는 하네.’

    설마 아틀란둠의 국왕 자리라도 얻으려나? 그렇다면 세금을 따져보았을 때 엄청 이득인데?

    하지만 오늘 나의 목적은 고정 S+등급 몬스터의 사냥.

    돈 버는 것 외에는 별다른 메리트가 없는 아틀란둠의 국왕 자리에는 솔직히 큰 관심이 없다.

    ‘…돈이라면 지금도 엄청나게 벌고 있으니까.’

    마몬을 잡은 보상금에 각종 대회나 레이드 유튜뷰 영상 수익금, 후원금, 거기에 어비스 터미널의 줄사다리를 독점하게 되면서 들어오는 세금, 각종 CF 광고료, 기타 잡템들을 경매소에 처분한 수익금, 레드문의 주식 떡상 등, 돈이라면 이미 썩어나게 많이 벌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듀!”

    나는 몸을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함대의 동선을 교란했다.

    쾅! 콰쾅! 퍼펑!

    육중한 함선들은 서로를 포격할까 두려워 머뭇거린다.

    답답한 귀스타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야! 적은 하나다!]

    [그…그치만…….]

    [대왕의 말에 토를 다는 게냐!?]

    [그치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귀스타프 쨩이 나를 봐 주지 않는걸!]

    귀스타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선상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파이프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는 바로 나, 고인물의 목소리니까.

    [아아, 잘 들리나? 너의 통신망은 이미 나에게 해킹 당했다.]

    이 배의 구조는 머릿속에 선명하다. 나는 확성용 파이프에 깎단으로 구멍을 뚫어 입을 대고 있었다.

    […어디냐!?]

    하지만 파이프 안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로 내 위치를 특정하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귀스타프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며 다른 배로 가 똑같이 파이프에 구멍을 냈다.

    [이 멍청이들아, 오른쪽이다!]

    구우웅-

    귀스타프의 목소리를 적당히 흉내 내자 배가 옆으로 기울었다.

    녹슨 관을 통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분간이 힘든 탓이다.

    [왼쪽이다! 아니, 오른쪽이다! 으아니, 역시 왼쪽이야!]

    [후진해라, 이 후진국 놈들아!]

    [왼쪽으로! …가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오른쪽! 레프트! 레프트로 꺾으라고! 우회전 말이야!]

    [꼬마야 꼬마야, 줄을 넘어라, 넘어서 넘어서, 배를 버려라!]

    [제자리에서 코끼리코 하고 15바퀴를 돈 뒤 십 미터 앞의 과자를 입으로만 먹어라!]

    [나는 사실 은밀한 곳에서 여장을 즐긴다! 오로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남자다운 행동이지!]

    마구 내려지는 명령에 배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귀스타프는 결국 하늘을 향해 대포를 쏘며 함대를 주목시켰다.

    [주목! 주목! 내가 다른 배의 파이프에 대고 명령을 전달할 일은 없다, 이 바보들아! 정신 차려!]

    하지만 이미 일대는 아수라장이다.

    이제는 해류를 잘못 타 저희들끼리 부딪치는 둥 난리가 났다.

    [헤엄! 차라리 헤엄쳐서 잡아라! 저놈 잡아!]

    하지만 내가 와류를 일으켜 해류까지 교란하고 있기에 물속에서 나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쿠르르르르륵!

    나는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너머로 몸을 파묻고 순식간에 놈들의 시야에서 탈출해 버렸다.

    [두고 보자아아아-]

    전형적인 3류 악당의 대사, 귀스타프가 외치는 악다구니만이 아련하게 메아리칠 뿐이다.

    *       *       *

    레흐락이 껄껄 웃었다.

    [거 멋지더군 형제여! 머저리 같은 플라튠, 아니 귀스타프 녀석이 아주 발광을 하던걸. 그런 놈은 칵 죽어야 하는데 말이야.]

    “한 바다에서 난 것은 한 배에서 난 거라면서요. 그러면 귀스타프도 형제 아닌가?”

    [허허허! 좋은 지적이군. 하지만 나는 저 멀리 떨어진 ‘하해(下海)’ 출신이고 귀스타프 그놈은 여기 ‘상해(上海)’ 출신이지. 난 배가 다르니 어미도 다른 법! 고로 그놈 하고 나는 형제 아냐.]

    레흐락은 웃으며 내 등을 팡팡 친다.

    ‘…상해(上海)와 하해(下海)라.’

    나는 레흐락이 구분 짓는 바다의 경계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일반적으로 유저들이 심해 맵으로 알고 있는 구역인 상해, 이에 반해 아예 그 존재조차 알려진 것이 없는 하해.

    하지만 하해에 비해 대부분이 알려져 있는 상해에도 분명 알려지지 않은 구역은 존재한다.

    내가 오늘 목적지로 하는 장소가 바로 그 미발견지역인 것이다.

    뭐, 아무튼. 나는 그를 데리고 독주의 무덤으로 향했다.

    우선 레흐락의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레흐락의 배가 침몰한 곳, 레흐락의 술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가.

    내가 막 해초돔을 돌아 육산호들의 군락지를 지나 독주의 무덤에 이르렀을 때.

    “…어?”

    나는 뜻밖의 광경을 마주해야 했다.

    …콰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옅은 지진이 몰아친다.

    독주의 무덤이 불벼락에 의해 요란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전기와 불, 암석과 얼음들이 한 곳에 사납게 몰아쳐 회오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키사다 아야카!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일본의 랭커들이 독주의 무덤을 공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주칠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 넓은 심해 맵에서 하고많은 던전들 중에 하필 이 독주의 무덤을 발견하고 공략할 줄이야.

    아무래도 내가 그녀를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콰콰콰쾅! 우지지지직!

    저 멀리 쏟아지고 있는 마법사들의 포격.

    그리고 그 폭발의 한가운데 서서 용감히 저항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지옥바퀴 대왕게!

    이 녀석은 오랜 세월동안 크고 단단해진 갑각을 방패삼아 옛 친구 레흐락의 술들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묵묵히, 우직하게, 꿋꿋이, 꼿꼿이!

    온갖 마법에 의해 천천히 붕괴해 내리고 있는 게딱지, 그런 대왕게를 본 레흐락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오오! 나의 친구! 게슈탈트야!]

    …게 이름치고는 좀 깬다 싶었지만 어쩌랴, 도와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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