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레흐락의 술 (4)
<감옥의 주정뱅이 ‘레흐락’>
먼 옛날 모든 바다를 지배했었던 해상왕이자 전설의 해적으로 통하던 사내.
악마의 만찬 호를 이끌던 치 카이와 더불어 이 세계관에서 가장 유명한 마도로스다.
또한 나에게도 퍽 익숙한 이름이었다.
-<레흐락의 럼(Rum)> / 재료 / D
대해적 레흐락이 목숨 다음으로 아꼈던 명주.
알코올 도수 105%의 위엄을 자랑하는 독주 중의 독주(毒酒)로 너무 많이 마셨다간 실명한다.
아틀란둠의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해서 꼭 마셔야 하는 물약.
이 물약을 만든 이가 바로 레흐락이기 때문이다.
레흐락은 감옥 한 구석에서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반갑네, 형제여.]
“내가 왜 당신 형제예요?”
[바다는 만물의 어머니 아니던가? 지금 이렇게 한 어머니의 배 안에 있으니 모두가 형제나 마찬가지지.]
레흐락은 호탕하게 웃으며 웃어댔다.
상당히 기괴한 외모였지만 웃을 때마다 이마에 붙은 따개비에 새겨진 <애인급구 010-990X-XXXX> 라는 글귀가 덜거덕 덜거덕 소리를 내며 떨리는 통에 어쩐지 조금은 우스꽝스러웠다.
이내 레흐락은 내게 말했다.
[이곳을 탈옥할 생각이라면 나도 좀 데려가 주지 않겠어? 이 좁은 곳에 갇혀만 있었더니 답답해 죽겠군 그래! 술을 마시고 싶다고!]
“미안하지만 철창을 넘어갈 수 있는 건 나 혼자라서.”
[그런가? 에잉, 아쉽게 되었군.]
레흐락은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탈옥에 성공한다면 내가 만든 술을 한번 꼭 마셔 봐. 찾을 수 있다면 말이야. 그 술은 정말 천하의 명주지. 다시 한번 그 술을 맛볼 수 있다면 정말 소원이 없을 텐데…….]
“아, 그 105도 짜리 설정오류 술이요?”
내가 묻자 레흐락은 빠져나가고 없는 아래턱 대신 목 근처에 붙은 조개껍데기를 벌리며 껄껄 웃었다.
[오, 아나? 하긴, 지금쯤 전설로 남았을 테니 자네도 들어본 적은 있겠지. 아, 그리고 105도가 아니라 105%일세! 술의 도수와 퍼센트는 다른 개념이라네. 퍼센트(%)는 물과 알콜의 합에서 알콜이 차지하는 비중을 100분율로 나타낸 것이지. 예를 들어 25%짜리 술이라고 한다면, 물 75%에 알콜이 25% 들어 있다는 거야. 그러면 이것의 비율은 75:25 즉 3:1이 될 게 아닌가? 즉, 물에 대한 알콜의 비율은 0.3333…… 이 되고 이것을 도수로 환산하면 100을 곱하여 33.333333…… 도가 되는 것이지.]
“엥? 그러면 당신 술은 왜 105%라는 거예요?”
[그야 초자연적으로 독하고 초자연적으로 맛있는 술이기 때문이지.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는 거야. 이 드넓은 바다 속에는 더더욱 그런 일이 많다고!]
말을 마친 레흐락은 약간 시무룩해졌다.
[말을 하고 나니 더더욱 술이 고프구먼. 내가 만들었던 그 술을 다시 한번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휴, 하지만 이제는 헛된 소원이겠지. 세상 천지에 흩어져 있을, 아니 어쩌면 바다 속 깊은 곳에 영원히 수장되어 있을 그 술들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바로 예측할 수 있었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레흐락의 독주(毒酒)’>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아틀란둠의 해저감옥에 수감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레흐락의 럼 2/1>
<※히든 퀘스트 ‘심해의 악몽’을 완료한 자만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히든 퀘스트를 받아 버렸다.
심지어 게이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 바로 퀘스트를 받자마자 바로 완료할 수 있는 상황이다.
나는 예전에 레흐락의 럼주를 세 병 꼬불쳐 왔던 적이 있었다.
그중 한 병은 아틀란둠에서 마셔 버렸고 품속에는 두 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때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오길 잘했네.’
여유분이 넉넉해서 다행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레흐락의 럼주 한 병을 꺼내 레흐락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내가 건네주는 술병을 본 레흐락의 두 눈이 확 벌어진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 안에 담겨 있던 게와 새우들이 호다닥 뛰쳐나올 정도였다.
[이럴 수가! 세상에! 자네 이 술 어디서 났나!?]
레흐락은 거의 울 듯 뛸 듯 좋아하며 내 손에서 술병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술병 주둥이에 입을 가져다 댔다.
벌컥벌컥-
요란하게 술을 들이켜는 레흐락.
나는 그걸 보며 감탄했다.
“이야, 그 쓴 술을 잘도 드시네요?”
[자네는 이 술이 쓰게 느껴지나? 나는 인생의 쓴맛을 많이 봐서 그런가 달게 느껴진다네.]
말을 마친 레흐락은 반 정도 술병을 높게 들었다.
[적셔.]
그 허세 가득한 건배사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한데?
술을 반쯤 마신 레흐락은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남은 술을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레흐락 씨. 왜 갑자기 술 먹는 속도가 느려지셨죠? 혹시 한번 먹어 보니 생각보다 독해서 꺾어 마시는 건가요?”
[…으, 으응?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술이 얼마 안 남아서 아껴 마시는 거야. 원래는 나도 원샷하고 막 그러는데, 아깝잖아.]
“술 한 병 더 있어요. 아끼지 말고 아까처럼 드세요.”
[그, 그럴까? 아냐. 그래도 맛을 음미하면서 마셔야지.]
“음? 방금 슬쩍 바닷물 마셨죠? 독해서 물로 희석하는 거 아닌가요?”
[아닌데? 물 안 마셨는데? 아닌데?]
레흐락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흐락 씨. 지금 화장실 가시는 건가요?”
[아닌데?]
“술 독하다고 물 많이 마셔서 오줌 마려운 것 아닌가요?”
[아닌데? 아닌데? 세수하러 가는 건데?]
레흐락은 럼주를 몇 모금 마시자마자 감옥 끝에 붙어 있는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더니 갑자기 속이 안 좋다며 감옥 바닥에 누워 버렸다.
[우욱! 너무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술이 안 받네.]
“레흐락 씨 원래 술 잘 못 먹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내가 어제 밤늦게까지 못 자서 몸 컨디션이 좀 나빠서 그래. 왕년에는 내가 말야, 앉은 자리에서 술을 궤짝으로 쌓아두고 마셨어!]
술 허세를 부리는 레흐락의 입에서 독한 술 냄새가 나서인지 쥬딜로페가 표정을 찌푸린다.
뭐, 아무튼.
레흐락은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 내 평생 이 술을 다시 마셔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뭘요. 저도 우연히 얻은 건데요 뭐.”
[그래? 그거 참 신기하구만. 이 술은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너무 맛있어서 훔치려는 이들이 줄을 섰었지.]
레흐락은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칼 한 자루 차고 해상을 누비던 그 자유로웠던 시절. 하하, 벌써 몇 백 년도 더 전의 이야기로군. 어느 비 오는 밤, 술을 노리고 덤벼든 약탈자들과 싸우다가 배가 침몰하지만 않았어도.]
이내 그의 푹 파인 눈구멍에서 뜨거운 수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술을 한 번이라도 꼭 다시 마셔 보고 싶어서 그동안 죽지도 못하고 성불도 못 한 채 이렇게 살아왔지. 하지만 이제는 삶에 여한이 없어. 마음 편히 성불할 수 있겠네.]
어느덧, 레흐락의 몸이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여한을 풀었으니 이제 성불하려 하는 것이다.
레흐락은 천천히, 마치 유령처럼 대기에 녹아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이 술을 맛보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웠네. 한데 자네는 이 술을 어디에서 구했는가? 중부대륙의 암시장? 북부의 도적떼들? 남부의 사기꾼들? 동부의 무법자들? 서쪽의 야만인들? 어떤 운 좋은 놈들이 내 술을 차지했지?]
하지만 나는 그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있던데요?”
내 대답을 들은 레흐락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다시 한번 설명했다.
“침몰한 상태 그대로 있었어요. 당신 배와 술들.”
[뭐, 뭐라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심해까지 내려와 내 술을 훔치려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보물 같은 술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거기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리가……]
레흐락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었다.
“당신의 술을 지키는 수문장이 여간 단단해야지요.”
내 말을 들은 레흐락은 당최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만 갸웃한다.
순간.
[……!]
레흐락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까 술을 받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급격한 감정 변화였다.
[호, 혹시, 혹시 그 수문장이라는 존재가… 작고 귀여운 한 마리의 게는 아니겠지? 하, 하긴. 그럴 리가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말도 안 되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분명 레흐락의 술을 지키고 있던 게는 작고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히스토리 상 레흐락이 감옥에 갇히기 전, 아니 살아서 바다 위를 누비던 시절이라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흐락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려 오열했다.
[오오! 그 술을 지키고 있는 게라면 그 녀석뿐이야! 아직 나를 잊지 않고 있었어! 오오, 이 미련한 녀석 같으니! 나의 친구여!]
동시에 레흐락의 기억이 나에게 밀려들어온다.
내가 눈앞에 뜨는 스크린 창의 동영상을 재생하자 오래 전, 젊었던 시절의 레흐락의 과거가 재생된다.
푸른 물결 위를 항해하는 위풍당당한 배.
젊고 호탕한 레흐락.
(물론 이때도 술은 잘 못 마셨던 것 같지만)
그리고 술 담그는 냄새에 이끌려 온 작은 게 한 마리.
술통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레흐락과 작은 게.
때론 작은 게를 바다로 뻥 차버리는 레흐락, 때론 자는 레흐락의 발가락을 꼬집는 작은 게.
그렇게 술이 먹고 싶냐며 작은 게에게 술잔을 넘겨주는 레흐락.
술잔을 원샷으로 비우는 작은 게를 보며 껄껄 웃는 레흐락.
자기 술 맛을 알아줘서 고맙다는 레흐락. 그리고 으쓱거리는 작은 게.
다 같이 술을 마시며 흥겹게 춤추는 레흐락과 선원들. 그리고 흥겹게 가위 춤을 추는 작은 게.
매일매일 마시고 취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레흐락. 그리고 항상 그 옆에 있는 작은 게.
폭풍우 치는 밤, 술을 빼앗으러 온 습격자들과 맞서 싸우는 레흐락. 그리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게.
작은 게를 대신해 칼에 맞는 레흐락. 그리고 칼에 맞아 바다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술을 지키고 싶어 하던 레흐락을 지켜보는 작은 게.
이 모든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츠츠츠츠!
그 자리에서 흐려져 가던 레흐락의 몸은 갑자기 다시 선명해졌다.
또한 흐리멍텅하던 그의 눈에서도 갑자기 다시 선명한 흑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 아직은 성불 못 하겠네. 혹시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갑작스럽게 이어지는 히든 퀘스트.
물론 거절할 이유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