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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88화 (588/1,000)

588화 레흐락의 술 (3)

[이, 이 자식! 왜 또 온 거야! 설마 그때 내가 대왕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을 폭로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아하, 아무래도 게임 스토리가 조금 바뀐 것 같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방이 적의를 가지고 있는 이상 호의적으로 대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확 이놈의 병사들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 버려?’

귀스타프가 전 대왕이었던 플라튠을 버리고 냅다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저 뒤의 병사들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굳이 얻을 것 없이 깽판을 칠 필요도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한편, 내가 팔짱을 낀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귀스타프의 표정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이 자식! 네놈도 무능력하긴 마찬가지잖아! 함대를 몇 척이나 침몰시키고 도망친데다가 전 대왕님까지…!]

하지만 나는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는 동작만으로 놈의 입을 닥치게 할 수 있었다.

-<크라켄의 알껍질 귀걸이> / 귀걸이 / S

크라켄은 평생을 살며 단 하나의 작은 알을 낳는다.

부화한 크라켄의 새끼는 평생토록 자신이 나온 알껍질을 소중히 보관한다고 한다.

-이동속도 +300%

-파괴불가 (특수)

-특성 ‘틈’ 사용 가능 (특수)

[뿌!]

쥬딜로페가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내 귀에 달린 귀걸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나는 잡았거든?”

[…….]

내가 크라켄을 잡은 걸 인증하자 귀스타프는 뭐라 말하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귀스타프의 반응이 이상하자 멀리 떨어져 있던 해저인 병사들이 창을 들고 준비태세를 취하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상관없다. 예전에 레벨이 40에 불과했을 때야 놈들의 작살이나 창날이 무서웠지만 지금 내 레벨은 무려 92, 거기에 사용하고 있는 아이템 등급만 해도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니까.

‘여차하면, 뭐. 피카레스크 마스크 쓰고 한판 떠야지.’

이제부터! 해저인 병사들을 해치우는 데!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겠다!

내가 막 깎단을 들고 움직이려 하는 순간.

[여봐라! 이놈을 당장 잡아다가 지하감옥에 처넣어라!]

내 행동을 멈추게 하는 귀스타프의 한 마디가 있었다.

‘…지하감옥?’

아틀란둠에 이런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애초에 내가 가 본 곳도 왕성의 중심부, 왕과 고관대작들이 기거하는 장소뿐이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원래부터 지하감옥 마니아다.

‘원래 소설, 만화, 게임, 영화 어디를 찾아봐도 메인 퀘스트는 지하감옥에서 시작되지.’

멀끔한 장소보다는 후미지고 어두운 곳에서부터 메인 퀘스트의 단서는 시작되는 법이다.

나는 해저인들을 녹신녹신하게 쥐어 팰 계획을 잠시 보류했다.

“…후후후후후.”

내가 포승줄에 묶이는 내내 음침하게 웃고 있자 나를 호송하는 해저인 병사들이 약간 움찔했다.

[…뭐야, 묶이는 게 좋냐?]

[이런 변태를 봤나!]

[이따가 내 방으로 오라구 boy♂]

내 양 어깨에 올라앉아 있는 오즈와 쥬딜로페도 눈살을 찌푸린다.

[속박과 감금이라. 인간, 그런 것 좋아하는가?]

[…뿌.]

나는 요 두 녀석의 말은 당분간 신경 끄기로 했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겠냐 이거야.

*       *       *

…철컹!

창살이 닫히는 소리.

[이봐, 변태. 거기 얌전히 갇혀 있으라고.]

[그래그래, 우리가 이 감옥(jail)에서 JAIL 무서운 간수들이니까 말이야. 앗핫핫핫! 스웩-]

[이봐, 이방인! 가라가라 갇혀 확 갇혀! 감옥 안에 갇혀 확 갇혀!]

마지막 해저인 병사의 말에 잠시 감옥 안에 정적이 감돈다.

[……오우 쒯!]

[헤이, 제임스! 오마갓! 나 소름돋았어. ‘이봐’, ‘이방인’의 각운 롸임에 클래식 히트곡을 이용한 펀치 라인. 제임스 유 소 핫. 오 마 스윗 베이비!]

[췌임쑤에게 주어지는 합껵의 목커리. 수웩-]

[…후우, 놀랐잔항. 칭찬 고마워, 브로. 쓰웨그-]

해저인들은 자기들끼리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주먹과 어깨를 부딪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턱을 만지며 곰곰이 생각했다.

‘역시. 회귀하기 전이나 후나 해저인들의 수액(水液) 문화는 이해를 할 수가 없군.’

하지만 지상과 1만 미터나 떨어져 있는 그들만의 리그에 태클을 걸 생각은 없다.

“이봐.”

[안 돼.]

“아니, 자물쇠를 그렇게 대충 거는 게 어디 있어. 좀 잘 걸라고.”

[안 들려. 안 돼.]

“아니, 저기. 자물쇠를 제대로 걸어야 내가 갇힐 거 아냐. 그래야 히든 퀘스트도 발견할 거고.”

그러자 해저인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린다.

[제임스, 뭐해. 받아 주지 말고 가자고. 자꾸 말 들어 주면 지가 상전인 줄 안다고 like phase transition.]

[워우, 피터. 그건 설마 통계역학적 계의 매개변수를 바꾸는 과정에서 물리적 성질 가운데 일부가 급격하게 변하는 현상인 ‘상전이’를 지가 ‘상전이인 줄’에 대치시킨 고급 롸임?]

[풕 예아-]

[지져스, 전 대왕 플라튠 님의 혓바늘이 당신과 함께하길. 당신의 혀는 독사와 같다. 치명적인.]

[친구들! 어서 가자고! 오늘은 댄스 나잇이잖아!]

[오케이! 근무교대, 너무 LOVE야.]

“야! 야 이……자식들아!”

[아아, 잠깐. 생각해 보니 자물쇠를 제대로 걸지 않았군.]

철컥-

덩치 큰 병사 한 명이 커다란 자물쇠를 잠그더니 뒤를 돌아 나를 째려보았다.

[이방인. 아까부터 참았는데 감옥 안에서는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에게 자물쇠가 제대로 잠기지 않았다고 알려 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그랬는…….”

[노우. 질문은 받지 않겠 UH.]

해저인 병사들은 나를 감옥에 가두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개노잼이네.’

참 재미없고도 정신없는 소란이었다.

-띠링!

동시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히든 던전 ‘아틀란둠의 해저감옥’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야, 이것 봐! 역시 최초 특전이 있잖아!

아카식 레코드에 최초 방문자로서 이름을 남긴 것만 해도 수확이 있는 것이다.

“…좋아. 여기서부터는 완전 미지의 영역이로군.”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묵직한 수압이 짓누르고 있는 4*4평방미터의 작은 석실.

심해의 차가운 해수로 가득차 있음은 물론이요 바닥 곳곳에는 야생 해초들이 자라나 있다.

아마 이것이 죄수들에게 제공되는 유일한 먹거리인 모양.

창살은 제법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어 날씬한 죄수라면 창살 틈새로 몸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창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뾰족한 따개비와 굴, 산호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으, 여기 지나갔다가는 바로 쓸리겠네.”

나는 뾰족뾰족 튀어나와 있는 따개비와 굴껍데기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 나의 경우에는 씨어데블의 점액과 크라켄의 틈 특성이 있으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마 아틀란둠의 감옥에 갇힌 사람은 회귀 전이나 후나 내가 유일하겠지.”

보통의 유저들은 아틀란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니 이런 데 올 일이 거의 없긴 할 것이다.

카르마 유저라고 해도 대부분 추방되거나 자경단 선에서 정리되기 마련이니까.

“일단 기다려 볼까?”

시간이 지나면 나오는 선택지도 있는 법이기에 나는 한동안 감옥에 갇힌 채 얌전히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감옥 안을 꼼꼼하게 뒤졌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찾을 수 없었다.

텅 빈 석실 안에는 해초와 물거품만이 흐늘흐늘거릴 뿐이다.

벽과 벽, 바닥이 만나는 모서리 부근에 조개껍데기와 따개비들이 들러붙은 덩어리 같은 게 있기는 했지만 그냥 맵의 일부인 오브젝트처럼 보였다.

…아니, 잠깐. 오브젝트라고?

고인물은 으레 맵에 툭 튀어나와 있는 지형지물을 보면 호기심이 일기 마련이다.

나는 감옥 구석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따개비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석회물질처럼 단단하게 굳은 채 구석 한켠에 들러붙어 있었다.

…딱!

내가 그것을 몇 번 깎단으로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정말 그냥 맵의 일부일까?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

나는 이 뭉툭한 덩어리에 피도 뿌려보고 열도 가해 보고 데미지도 넣어보고 말도 걸어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애인급구 010-990X-XXXX>

심지어 낙서까지 남겼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인도 구해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으음, 뭔가 느낌이 오긴 오는데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감이 온다고 해도 이곳에서 시간을 무한정 쓸 수만은 없다.

꿀렁-

나는 숨을 참고 온몸에 점액을 둘렀다.

그리고 좁은 곳도 잘 빠져나가는 문어의 힘을 이용해 좁고 울퉁불퉁한 쇠창살 틈을 빠져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내가 철창 사이로 몸을 비집고 나가는 순간.

…꿈틀!

방금 전까지 가만히 있었던 오브젝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떨그럭! 떨그럭!

따개비와 굴 껍데기, 산호들이 갈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구석에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이내 감옥 바닥에 짙은 물그림자가 음산하게 드리운다.

[…케케케, 이봐. 감옥을 나갈 생각인가?]

놀랍게도 그것은 사람이었다!

낡아빠진 선장모 아래 푹 패인 두 눈, 삭아 버린 잇몸 대신 뼈에 곧바로 붙어 있는 이빨들.

심해로 가라앉은 시체가 아주 오랜 시간을 홀로 견뎌 낸 듯한 모습.

이 음산한 해저감옥에서 마주하기에는 조금 공포스러운 외형일 수도 있지만…….

‘오? 뭐야. NPC인가? 히든 퀘스트 주려나?’

게이머의 눈에는 그저 좋은 퀘스트 자판기일 뿐이다.

하지만 히든 NPC가 주는 히든 퀘스트에도 엄연히 등급이라는 것이 있다.

형편없는 보상 뿐인 잡퀘가 있고 훌륭한 보상이 있는 꿀 퀘스트가 엄연히 따로 존재한다.

나는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NPC의 정체를 잘 살펴본 뒤 잡퀘라면 거절하고 감옥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라? 이건 꽤…….’

이내 드러난 NPC의 정체는 내 구미를 상당히 당기게 만드는 것이었다.

<감옥의 주정뱅이 ‘레흐락’>

이 자식… 꽤나 익숙한 이름인 것이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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