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87화 (587/1,000)

587화 레흐락의 술 (2)

둥그렇고 딱딱한 껍데기에 송곳 같은 가시들이 툭툭 돋아나 있는 게.

내가 오래 전에 발견했던 네임드 몬스터이다.

<지옥주정꾼 대게> -등급: A / 특성: 물, 심해, 주폭(酒暴)

-서식지: 독주(毒酒)의 무덤

-크기: 4.5m.

-과거 대해적 레흐락의 배를 따라다니며 그가 흘린 술을 받아먹곤 하던 작은 게.

시간이 많이 지나 레흐락은 죽었지만, 이 게는 친구가 나눠 주었던 술맛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오지 않는 레흐락을 기다리며 그가 남긴 럼주를 지키고 있다.

원래 나를 만나기 전 이 상태였던 게는 더욱 더 단단하고 큰 몸을 손에 넣게 되었다.

<지옥바퀴 대왕게> -등급: A+ / 특성: 물, 심해, 백전노장, 지진

-서식지: 독주(毒酒)의 무덤, 블루홀 ‘깊은 구역’, 침수림 수몰지대

-크기: 8m.

-지옥주정꾼 대게가 오래 묵으면 지옥바퀴 대왕게로 진화한다.

수백 번의 허물을 벗는 과정에서 껍데기는 더욱 단단해지고 두터워졌다.

심해 깊은 곳에 있는 동굴 등에 주로 서식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길 잃은, 혹은 무모한 생명체를 잡아먹는다.

아무래도 싸우는 도중 내가 직접 진화시켰던 녀석이니 기억할 수밖에.

가뜩이나 육중하던 집게발은 더욱 커졌다.

집게발 하나가 어지간한 SUV 승용차만큼이나 커다랗다.

뿜어내는 기운 역시도 제법 강렬해진 것이 아무래도 리젠된 이후 많은 습격자들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 모양.

“게태식이 돌아왔구나. 반갑다. 근데 그 크고 느린 손으로 뭘 어떻게 하겠냐? 레흐락 얘기는 들었다. 그 술 얘기도 들었고. 게태식이 슬퍼서 어쩌냐?”

내가 묻자 대왕게는 발끈하듯 커다란 집게를 들어 올렸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 속이 시원했냐!’ 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 위세.

하지만 나는 이 게를 넘어 술을 꼭 손에 넣어야 한다.

예전에 미처 다 깨지 못했던 해저의 메인 퀘스트를 마저 클리어하기 위해서이다.

“짜식, 그래도 옛 친구를 기다리는 거 보니 의리는 있네.”

설정을 보다 보면 나름 짠한 구석이 있는 보스몹이다.

나는 깎단을 거꾸로 들고는 대왕게의 전신 구석구석을 흠씬 두들겨 패 주었다.

…딱! …따악! …딱! …빡!

백전노장 특성 탓에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껍데기.

하지만 방어력이 높아진다고 해도 체력이 닳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대왕게의 엄청난 방어력을 깡 공격력으로 찍어 눌렀다.

…쿵!

대왕게는 어느덧 HP가 바닥까지 떨어져 벌렁 드러누워 쓰러져 버렸다.

“대왕게는 나가 있어. 뒤지기 싫으면.”

나는 굳이 녀석을 잡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몰라도 요즘은 게임 속 NPC들의 설정이나 감정에 꽤나 공감하게 되면서 마음가짐을 조금 달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회귀하기 전과는 꽤 달라진 마인드였다.

‘친구의 유품을 지키는 의리 있는 녀석을 한낱 잡몹처럼 잡을 수는 없지.’

놈의 히스토리도 [SKIP]을 누르지 않고 꼼꼼히 다 읽어 보았다.

어차피 잡아 봐야 경험치도 별로 안 주는 거 그냥 인심 쓴다 생각해야겠다.

“너는 의리 있고 멋진 놈이니까 따로 격에 맞는 최후를 찾아가도록 해라.”

나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않고 쿨하게 돌아섰다.

하지만.

…콰콰쾅!

대왕게는 아주 약간이나마 남은 HP로 술을 지키기 위해 반격해 온다.

친구가 남긴 물건을 지키고자 하는 처절한 의지가 엿보였다.

거대한 집게로 필사적으로 궤짝을 가로막는 게.

하지만 내가 놈을 만났을 때 레벨이 40이었던 것과 달리, 지금 내 레벨은 무려 92이다.

처음 나타났을 때도 아니고, 한껏 비실비실해져 있는 대왕게의 현재 공격은 맞아 봐야 아프지도 않다.

“게 섯거라.”

나는 한 손으로 대왕게의 집게발을 막아 냈다.

그리고 녀석을 번쩍 들어 올려 저 언덕 구릉 아래로 집어던져 버렸다.

“게 달리거라.”

저 구릉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대왕게.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짠해진다.

“원래는 다 훔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딱 세 병만 훔칠게.”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술병 세 개만 깔끔하게 집어 들었다.

애초에 이 아이템은 아틀란둠의 NPC들을 만나기 위한 매개물이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수확량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즈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흥! 인간. 비열하구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존재를 괴롭히다니.]

“…네가 할 말이냐?”

적어도 이놈에게만은 듣기 싫은 말이었다.

*       *       *

-띠링!

<‘해저도시 아틀란둠’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YOUdie>

나는 또다시 해초돔 안으로 들어왔다.

슬쩍 눈치를 보니 아키사다 아야카 일행은 벌써 돔 바깥으로 나간 모양이다.

레흐락의 술이 없는 이상 이 도시에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으니 아마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

뭐, 만난다고 해도 이 큰 도시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 그럼 이번에도 또 잘 부탁합니다.”

나는 훔쳐온 세 병의 술 중 한 병을 깠다.

거침없이 한 병을 원샷하자 이내 머리와 눈이 타는 듯 아프다.

이윽고, 아틀란둠 속의 전경이 서서히 변해 가기 시작했다.

검은색으로 물들었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져 온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음산하고 황폐한 폐허가 사라지고 떠들썩한 번화가가 보였다.

[어이! 질 좋은 고기가 들어왔어! 저녁 먹으러 오라고!]

[오늘 밤 맥주 한 잔 어때? 포커나 치면서 밤새 놀아 보자고!]

[거기 서! 소매치기야! 저기 도망간다! 아이고, 어떻게 해!]

[어휴, 시끄러! 저기 골목에서 노는 애들 좀 어떻게 해 봐요! 잠을 못 자겠네!]

도시 곳곳에서 들려오는 활기찬 소리.

해저의 주민들이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 명이 넘는 NPC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골목 사이를 오가고 있는 모습.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도 물때를 벗고 완전히 새롭게 탈피했다.

돔 천장에 박혀 있는 진주와 산호들 덕분에 도시는 온통 찬란한 빛무리로 가득하다.

마치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번화가의 밤거리를 보는 듯한 풍경.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여전히 두족류는 없네.”

수많은 생선대가리 인간들이 돌아다니는 와중에 오징어나 문어 따위의 해저인은 없었다.

설정 상 크라켄과 오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슬쩍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8시 28분.

‘…슬슬 시작할 때가 됐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이내 내가 기다렸던 신호가 눈에 띈다.

챙- 챙- 챙- 뿜- 뿜- 뿜-

요란한 악기소리들이 들리며 저 멀리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줄을 지어 걸어오기 시작했다.

병사를 모집하는 시가지 행진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번에도 해병대에 지원할 생각에 얼른 앞으로 달려나갈 채비를 했다.

왕궁의 함대들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눈앞에 보인 것은 다소 의외의 광경이다.

NPC '톱상어 귀스타프‘

예전에는 장군 직위에 불과했던 저 톱상어 수인이 대왕의 옥좌에 앉아 가마를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맨 앞 행렬에 서 있는 새우 모습을 한 자휘관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아틀란둠의 위대한 국왕 ‘귀스타프’ 님을 위해 싸울 멋진 군인을 모집하겠다!]

얼씨구? 아마 크라켄과의 싸움에서 전 대왕 플라튠이 사망한 틈을 타 국왕으로 즉위한 모양이다.

‘크라켄한테 쫓겨 꽁지 빠져라 도망가던 모습이 선한데 말이야.’

참, 새삼 이렇게 깊이 있게 게임 스토리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뿌듯하다.

아틀란둠의 현 국왕이 한때는 겁 많은 도망자였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어?

나는 웃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저요! 입대 지원합니다!”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았다.

이제 저 앞의 새우머리 지휘환이 내게 와서 군대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들을 할 것이고 나는 그것에 잘 대답하면 된다.

‘무조건 91번 선택지를 고르면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틀란둠의 함대를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뒤에 중간보스인 크라켄을 쓰러트리고 나면 더 깊고 위험한 곳으로 진입 가능하게 될 텐데 말이야.’

뭐, 확실한 공략은 아니다.

수많은 고인물들의 추측과 추리 루트를 따라가는 것일 테니 오류가 날 여지는 충분히 있다.

내가 지금부터 잡으려고 하는 것은 회귀하기 이전의 세상에서도 한 번도 잡힌 역사가 없는 존재이니까.

…하지만, 상황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예 시작부터 말이다.

[어억!?]

가마 위에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톱상어 귀스타프가 나를 보더니 수염을 파르르 떨며 경악했다.

[이, 이 자식!? 네놈이 왜 이곳에!?]

놈은 나를 알아봤는지 삿대질을 하며 아주 난리가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놈은 병사들을 시켜 나를 포박했다.

[저, 저놈의 입을 막아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단단히 틀어막아!]

아무래도 내가 무슨 말을 할까봐 몹시 두려워하는 기색.

‘…이런 선택지가 있었던가?’

나는 일단 해저인들의 말에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이윽고. 병사들을 모두 뒤로 물린 귀스타프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이, 이 자식! 왜 또 온 거야! 설마 그때 내가 대왕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을 폭로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아하, 아무래도 게임 스토리가 조금 바뀐 것 같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