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86화 (586/1,000)
  • 586화 레흐락의 술 (1)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로그인 소리, 하지만 로그인을 알리는 빛무리는 터져 나오지 않는다.

    내가 OFF로 설정해 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지금 접속해 있는 곳은 해저 1만리, 심해의 끝자락.

    심해(心海).

    밀도 깊은 어둠만이 모든 것을 짓누르는 아득한 공간.

    이런 곳에서 빛을 내뿜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어그로이다.

    그것이 아무리 로그인을 알릴 정도의 작은 빛무리라고 해도 그렇다.

    ‘아마 이 근방의 해저괴물들을 죄다 끌어모으겠지.’

    내 레벨이 아무리 높다고 한들 심해의 정수로 만든 거품구슬 안에 들어있는 입장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해의 정수> / 재료 / D

    심해의 기운이 담긴 구슬이다.

    저번에 씨어데블을 잡고 얻은 이 아이템이 있어서 이번에도 편하게 심해로 내려올 수 있었다.

    오늘은 예전에 한번 들렸던 적이 있는 해저도시 ‘아틀란둠’을 향해 기나긴 침강을 시작한 지 딱 3일째 되는 날.

    “도착한 모양이네.”

    나는 발을 움직여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바닥’의 감촉을 느꼈다.

    나는 앞을 더듬어 가며 묵직하게 흐르는 해류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내가 노리고 있는 것은 오즈, 마몬, 벨제붑에 이은 네 번째 고정 S+급 몬스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냥에 실패한 벨페골도 있으니 다섯 번째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에는 크게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왜냐하면 내가 이번에 잡으려고 시도하는 몬스터는 15년간 살았던 미래에서도 정보가 거의 없었던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약간의 기대를 하고 있는 이유는…….

    [흥. 인간. 나보고 지금 동족을 팔아먹으라는 건가?]

    내 어깨 위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요 거만한 검은 도마뱀 때문이다.

    오즈, 이 녀석은 신기하게도 같은 용족의 냄새를 캐치해 내는 재주가 있었다.

    [아무리 용들끼리는 서로를 무시하며 지낸다지만, 그래도 너 같은 하등생물에게 붙어서 동족을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암.]

    “그래서, 길을 못 알려 주겠다고?”

    [그렇다 인간.]

    오즈는 팔짱을 낀 채 코로 물거품을 흥 내뱉었다.

    “어쩔 수 없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오즈가 앉아있는 내 어깨의 반대편 어깨에서 또 다른 작은 녀석이 툭 튀어나왔다.

    [뿌앵스.]

    쥬딜로페였다.

    나는 오즈가 비협조적으로 나올 때마다 녀석의 담당일진인 쥬딜로페를 내보냈다.

    […뿌!]

    쥬딜로페는 해저의 바닥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오즈의 머리를 딱콩딱콩 때리기 시작했다.

    펫 시스템 때문일까?

    주인님의 체벌은 방어력을 무시하고 들어와 펫을 아프게 만든다.

    그런 마당에 주인님의 주인님이라면 그 데미지가 더욱 아프게 책정되는 것이 당연한 일!

    쥬딜로페에게 얻어맞는 오즈는 눈물을 흘리며 찡얼거린다.

    [아악! 그만 때려라! 알려 주면 될 것 아니야! 이, 인간! 앞으로 쭉 가라! 그리고 700미터 앞에서 좌회전, 과속방지턱을 주의해라! 제한 속도 50km구역이니 조심해라, 그 속도를 넘기면 바다소들이 쫓아오게 되니까. 그리고 다시 300미터 앞에서 우회전……]

    오즈게이션.

    나는 오즈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계속해서 어둑한 심해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눈앞에 낯익은 구조물이 보인다.

    반투명한 해초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내고 있는 커다란 벽이 반구형 건축물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독한 적막, 긴 촉수를 드리운 해파리들이 뿌리는 어슴푸레한 빛 때문에 해초돔은 약간 으스스해 보인다.

    “드디어 찾았네.”

    해초들의 틈을 비집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익숙한 풍경이 드러났다.

    귓가에 알림음들이 들려온다.

    -띠링!

    <‘해저도시 아틀란둠’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유다희>

    안으로 들어가자 멸망한 지 오래된 고대 문명이 보였다.

    산호와 따개비들로 뒤덮인 왕궁의 벽.

    온통 낡고 부식된 탑과 콜로세움들.

    한때는 거대하고 웅장했을 옛 문명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말라붙은 소금과 물이끼, 꾸덕한 물때와 깨진 조개껍데기들만이 이 황폐화된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

    하지만. 나는 이 유령도시의 주민들을 다시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자, 그럼 레흐락의 술을 구하러 가 볼까.”

    전에도 그랬지만, 이 도시의 NPC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해초돔 반대편으로 넘어가 히든 피스 하나를 구해야 한다.

    알콜 105%라는 이상한 설정이 붙은 ‘그 술’ 말이다.

    그 술을 마시고 ‘만취’ 상태이상에 걸리는 순간 이 도시의 진면목을 보게 될 수 있는 법이다.

    취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나는 해초돔의 중앙을 가로질러 반대편 출구로 나서려 했다.

    그때.

    “…어?”

    나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몇 명인가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아틀란둠의 폐허를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먼.’

    나는 약간 반가움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저 멀리서 열심히 빈 집을 뒤져 아이템을 파밍하는 이들은 전부 나와 안면이 있는 자들이다.

    아키사다 아야카. 그리고 그녀가 이끌고 있는 마법사 길드.

    그 외에 아키사다를 졸졸 따라다니는 우에바라 아츠카네, 야마카미 시가쿠도 보인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틀리그에서 만났던 일본 대표팀 멤버들이 지금 이곳 아틀란둠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이야, 이 멀고 깊은 해저에서 딱 만나게 될 줄이야. 엄청난 우연인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벨제붑을 잡으러 가기 전, 아키사다와 밥을 먹었던 자리에서 그녀가 앞으로 해저 탐험 레이드를 갈 것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레이드! 저 역시 그렇습니다. 북방, 바다, 심해로 레이드 갈 예정입니다.’

    ……라고 말했었지 아마?

    그런데 설마 이 먼 아틀란둠에서 딱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심지어 내 쪽에서 먼저 그들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호오, 보아하니 빈 집의 항아리나 궤짝을 뒤져서 산소 코팅을 하는 법은 알아낸 모양이네.’

    그들은 빈 집에서 산소 코팅제를 찾았는지 돔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기와 방어구, 마법을 점검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해저의 몬스터들을 바로 사냥하러 나갈 모양이다.

    ‘그래도 NPC들의 도움 없이는 힘들 텐데. 소모품 벌충도 쉽지 않겠고.’

    나는 조금 도와줄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동왕이 아니라 고인물로서는 저들과 인연이 없다. 갑자기 도와준다고 해도 의심받을 공산이 컸다.

    그리고 뭐, 애초에 도와줘 봤자 내게는 아무런 득도 없는걸.

    ‘알아서들 잘 하겠지 뭐.’

    애초에 뉴비들이 저 정도 스스로 해냈으면 꽤나 상당한 성과다.

    이곳의 몬스터는 경험치도 잘 주고 아이템도 좋은 것을 떨어트리니 저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아틀란둠의 숨겨진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지만 말이야.’

    아틀란둠이 좋은 사냥터이기는 해도 NPC들을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 불과하다.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러 온 나와 저들의 동선이 겹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띠링!

    <히든 던전 ‘독주(毒酒)의 무덤’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나는 아틀란둠에서 얼마간 떨어진 해구를 찾았다.

    <독주(毒酒)의 무덤> -등급: A+

    움푹 패인 구덩이 안에 침몰해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오크통.

    난파선의 주류창고가 통째로 가라앉은 모양새이다.

    “추억이네. 예전에는 드레이크와 둘이 왔었지.”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다.

    불확실한 여정에 윤솔과 드레이크까지 데려오기엔 조금 미안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둘은 빅리그 이후로 슈퍼스타가 되어 여기저기 부르는 데도 많아 요즘 시간도 부족하고… 아무래도 한동안은 나 혼자 레이드를 뛰어야 할 것 같다.

    한편.

    꾸르르륵…

    물거품이 올라오고 있는 주류창고 속.

    산호와 따개비로 뒤범벅된 ,수없이 많은 궤짝들이 나를 반긴다.

    그 썩어가는 나무떼기들 속에는 마찬가지로 물이끼에 뒤덮인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레흐락의 럼(Rum)> / 재료 / D

    대해적 레흐락이 목숨 다음으로 아꼈던 명주.

    알코올 도수 105%의 위엄을 자랑하는 독주 중의 독주(毒酒)로 너무 많이 마셨다간 실명한다.

    “도수와 퍼센트는 다른 개념인데. 설정을 멍청하게 해 놨네.”

    나는 알콜 도수 105%라고 표기되어 있는 라벨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뭐, 아무튼. 이 술을 마시면 이제 본격적으로 아틀란둠의 풍경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크라켄 이후 중단되었던 메인 퀘스트를 다시 속행할 수 있겠지.

    그렇다. 해저도시 아틀란둠의 메인 퀘스트는 크라켄을 잡았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해저의 권력 순위 상 크라켄은 서열 3위에 불과하지.’

    예전에 말했던 대로, 크라켄은 이 바다의 진짜 주인이 아니다.

    나는 오늘 이 바다를 둘로 나누어 지배하는 두 주인 중 하나를 만나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뿌우-]

    쥬딜로페가 내 볼을 탁탁 치며 경고를 해 왔다.

    쿠구구구구…

    궤짝들이 가득 쌓여 있는 더미 위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다각- 다가각- 끼긱-

    썩은 나무궤짝 위를 긁는 단단하고 뾰족한 것.

    이쪽을 향해 느리게 침강해 오는 괴물체.

    나는 녀석의 존재 역시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게태식이 돌아왔구나. 반갑다.”

    날카로운 뿔과 단단한 갑옷.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육중한 집게.

    <지옥바퀴 대왕게> -등급: A+ / 특성: 물, 심해, 백전노장, 지진

    -서식지: 독주(毒酒)의 무덤, 블루홀 ‘깊은 구역’, 침수림 수몰지대

    -크기: 8m

    -지옥주정꾼 대게가 오래 묵으면 지옥바퀴 대왕게로 진화한다.

    수백 번의 허물을 벗는 과정에서 껍데기는 더욱 단단해지고 두터워졌다.

    심해 깊은 곳에 있는 동굴 등에 주로 서식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길 잃은, 혹은 무모한 생명체를 잡아먹는다.

    레흐락의 술을 지키는 파수꾼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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