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81화 (581/1,000)

581화 아시아 정복 (6)

[아~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힐러인 윤솔 선수가 갑자기 등판했습니다!]

[이 타이밍에 힐러를 내보냈다는 것은… 아마 현재 빨피인 드레이크 선수를 치료하겠다는 뜻일까요?]

[글쎄요, 확실한 것은 유세희 선수와 마태강 선수가 사망 로그아웃을 당해서 치료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마동왕 선수는 풀피인 상태라 치료가 필요 없고요. 드레이크 선수를 회복시킬 계획이 아니고서야 이 타이밍에 힐러가 나올 수가 없는데……]

[드레이크 선수를 회복시킬 타이밍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드레이크 선수가 워낙에 잔존 체력이 낮은 상태라 교체하는 도중에 리타이어 될 수도 있고, 거기에 회복을 시켜 준다고 해도 드레이크 선수가 트로츠키 선수를 상대로 상성이 워낙에 나쁜지라……]

캐스터들은 모두 의아한 반응이다.

관중들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갑분솔 무엇?

↳ㅇㅇ그니까ㅋㅋㅋㅋ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

-엥??? 엄재영 감독 뭔 생각인 거냐???

-아니 거기서 마동왕이 나가야지!!

-누가 봐도 마동왕 타이밍이었는데..

↳ㅇㄱㄹㅇ 반박시 뎀알못

↳이번 판은 마동왕 각이었다고... 진짜...윤솔 뭐야...

-왜 저기서 힐러가 나갔는지 알려주실 분?

↳어짜피 마태강이랑 유세희 사망해서 치료할 상대도 없는데...

↳드레이크는 잘하긴 하는데 치료해봤자 트로츠키 상대로는 상성이 넘 나쁨;;

↳혹시 아냐 그래도, 드레이크가 잘할지. 대만전에서도 의외로 활약해 줬고

-???나만 이 분위기 이해 못함???

↳22222...

↳333333....

.

.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댓글들.

모든 커뮤니티가 이번 라운드 이야기로 시끌시끌하다.

한편.

윤솔을 본 트로츠키는 미간을 찌푸리고 뒤로 물러섰다.

“뭐지? 이 타이밍에 힐러를 내보낸다고?”

윤솔에 대한 연구는 이미 진행된 상태다.

꽤나 강력한 신성력을 보유한 고렙 힐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좋은 게임 센스로 게임 전반의 밸런스를 유지시켜 주는 역할.

가끔 비공식적인 곳에서 괴력을 발휘했다고는 소문으로 들었지만 그것이야 뭐 주문서나 물약으로 인한 한시적 효과일 테니 소모품을 사용할 수 없는 공식 대회에서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소문이 확실한지조차 알 수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뭔가 찝찝하긴 하군.’

트로츠키는 눈앞에 있는 윤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강호에 나가면 여자, 노인, 어린아이를 제일 조심하라고 했던 고려인 스승의 가르침이 떠오르자 더더욱 찜찜했다.

더군다나.

…욱신!

발가락 끝이 점점 무뎌지고 있는 것이 아까 피격당했던 마나 번의 여파가 천천히 도는 것 같다.

유세희가 최후에 남겨 놓은 디버프다.

“태그.”

결국 트로츠키는 다음 선수와의 교대를 택했다.

트로츠키의 다음으로 필드에 나온 이는 러시아 측의 힐러 라스푸틴이었다.

그는 나오자마자 윤솔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안녕하신가? 힐러끼리 만나게 되었군.”

윤솔은 그냥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라스푸틴을 바라본다.

딱히 공격을 한다거나 하는 모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라스푸틴은 껄껄 웃으며 윤솔을 향해 걸쭉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예쁜 처자가 이런 곳에서 험하게 싸우면 안 되지요~ 얼른 집에 가서 남편 밥이나 해 주라고. 아, 남편이 없으면 나는 어떤가? 껄껄껄~ 넝담~”

자기 할말만 지껄여 댄 라스푸틴은 또다시 태그를 외쳤다.

츠츠츠츠츠츠……

이윽고 나온 트로츠키는 라스푸틴이 남기고 간 힐 마법의 잔상을 통해 몸을 완전히 회복시켰다.

그때까지도 윤솔은 그저 가만히 트로츠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흐음. 한국 측의 속셈을 당최 알 수가 없군.”

트로츠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남은 선수라고는 윤솔과 마동왕 뿐인 것을 뻔히 아는데 마동왕이 안 나오고 힐러만 필드에 남아 개기고 있는 이유가 뭘까?

‘……설마 유인책인가?’

트로츠키는 일말의 의심을 품었다.

그는 실력도 뛰어나지만 백전노장답게 성격도 차분하고 관록도 깊었다.

트로츠키는 윤솔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껏 1:1에서는 단 한 번도 져 본 역사가 없다. 치졸한 수를 꾸미고 있거든 포기하는 것이 좋아.”

“…….”

“마동왕, 그 선수를 내보낼 생각이 없다면 나 역시도 진심으로 경기에 임할 필요가 없겠지. 힐러를 상대로 공격을 하는 것도 모양 빠지니 말이야.”

“…….”

“힐러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군 그래. 겁이 많은 성격인가?”

“…….”

“……뭐라고 말 좀 하지 그래?”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입을 열다가 문득 윤솔과는 종족이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그.”

트로츠키는 힐러인 윤솔과 싸우는 것조차 체면이 상한다고 느꼈는지 바로 태그를 외쳤다.

그리하여, 윤솔은 러시아의 마지막 선수까지 모두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올가 알렉셰예브나 크로폿키나’

극한의 얼음마법을 사용하는 그녀가 필드로 나왔다.

“표트르를 리타이어 시켰겠다?”

자기 오빠를 죽인 마태강 때문에 심기가 언짢아 보이는 올가였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대단위 빙계마법을 캐스팅했다.

쩌저저저저적!

주변의 연안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다.

따듯한 열대의 바다가 순식간에 꽝꽝 얼어붙은 빙판 천지로 변해버렸다.

“오호호호, 어때? 부동항(不凍港)조차 얼려 버리는 내 힘이!?”

올가는 자화자찬을 하며 안 그래도 높은 콧대를 한껏 세웠다.

하지만 그 자뻑을 들어줄 윤솔은 이미 단단한 얼음 속에 파묻힌 상태였다.

“어머? 너무 빨리 끝내 버렸나? 재미없네.”

올가는 눈앞에 있던 윤솔이 거대한 빙산 속에 갇혀 버린 것을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래도 마동왕이라는 남자는 내 눈으로 직접 보겠네. 내가 처음으로 붙어 보는 거잖아?”

그녀는 반짝이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섬 저편을 바라본다.

그때.

“이봐. 태그해.”

뒤에서 트로츠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올가가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할배. 마동왕은 내 몫이야.”

“전략적으로 판단해라. 네가 지형을 얼음필드로 만들었으니 이제 내가 나설 차례야.”

“싫어! 재밌는 거 혼자만 하려고 그러지? 마동왕은 내가 제일 처음으로 잡을 거라고! 첫 데미지는 꼭 내가 새겨 줄 거야♥”

“아니, 그 녀석과 싸우기로 되어 있던 것은 나다. 돌아와서 태그해 빨리.”

“싫지롱~ 내가 얼음 속에 꽁꽁 가둬서 인형처럼 가지고 놀 거지롱~”

트로츠키와 올가가 태그를 하네 마네로 다투고 있을 때.

“……어엇!?”

순간 올가와 다투고 있던 트로츠키의 표정이 급변했다.

“올가! 태그해라! 어서!”

다급하게 태그를 요청하는 트로츠키, 하지만 올가는 여전히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젓는다.

“아앙, 싫어! 내가 마동왕이랑 싸울 거야~”

“빨리! 당장 태그하라고!”

“아, 싫대두! 왜 자꾸 강요하는……?”

순간, 올가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쩌억!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응?”

올가가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리자, 이내 그녀의 눈을 찢어질 정도로 벌려 놓는 광경이 보인다.

콰쾅!

단단한 얼음이 반으로 쪼개지며 그 안에서 무언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아, 시원하다.”

바로 윤솔이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커다란 뿔 두 개가 돋아나 있다.

심지어 말도 안 되게 거대한  왼손과 오른손 끝에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손톱이 칼날처럼 툭툭 튀어나와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올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윤솔을 바라본다.

이윽고, 그녀는 제정신을 차리고는 손에 든 흰 마도서를 펼쳤다.

“뭐 하는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힐러는 하나도 안 무섭거든?”

올가의 주위로 차가운 북풍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저적!

한빙계열 쪽에서도 수준급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절대영도’ 특성이 발동되어 주변을 온통 단단하게 얼려 버린다.

윤솔 역시도 걸어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 것 봐.”

올가는 코웃음치며 눈앞의 윤솔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쩌적! …쩡!

놀랍게도 윤솔은 자신의 몸을 뒤덮은 얼음을 힘으로 깨부수고 계속 걸어왔다.

몸에 걸려 있던 동상 등의 상태이상은 이미 자체 힐 마법으로 깨끗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 어어!? 뭐야 저 여자!”

올가는 당황한 채로 얼음마법을 캐스팅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용의 아가리가 윤솔을 집어삼킨다.

하지만.

쩌-억!

윤솔은 두 손을 벌리는 것으로 얼음 용의 아가리를 너무도 쉽게 찢어 버렸다.

애초에 극지대에서 사는 하린마루의 두 손이 얼음에 데미지를 입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올가는 얼굴이 설원의 색처럼 하얗게 질린 채 빙계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으라고!”

차고 단단하고 뾰족한 얼음들이 계속해서 윤솔을 향해 날아든다.

하지만 윤솔의 팔 끝에 달린 하린마루의 손아귀는 그 모든 것들을 무자비하게 씹어 버렸다.

“엇-차!”

윤솔은 두 주먹을 높게 들었다. 그리고.

콰-쾅!

하린마루의 두 주먹은 이내 단단하게 얼어붙은 빙판을 모조리 깨 부숴 버린다.

퍽! 퍼억! 펑!

곳곳에서 얼어붙은 땅봉우리가 툭툭 불거져 나오며 세상천지가 아주 개박살이 났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지진으로 인해 온통 난장판에 된 지면 위, 올가가 균형을 잃은 채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부동항을 얼린 얼음이 깨지며 푸른 물결이 유빙 틈새로 터져 나온다.

“으, 으아아아아…….”

올가는 상태이상 ‘혼란’에 걸린 채 빙판을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주변 관중들이 지르는 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패닉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거대한 악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윤솔이 발아래 벌레처럼 기는 올가를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커다란 손아귀를 뻗어 올가의 머리를 턱-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작!

마치 메추리알을 부수듯, 너무나도 쉽게 그녀를 사망 리타이어 시켜 버린다.

[……! ……! ……!]

[……! ……! ……!]

[……! ……! ……!]

[……! ……! ……!]

네 명의 한국 캐스터들, 그리고 반대측에 있는 러시아 캐스터들 역시 너무나도 황당한, 그리고 상식 밖의 광경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많은 관중들까지도 경악하여 아무런 소리를 못 낸다.

함성도 야유도 없는 완벽한 정적 상태.

그 한가운데 윤솔은 악귀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평소의 수동적이고 온순한 모습 따위는 훌훌 벗어던진 채로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연출을 기획한 나는 앉은 자리에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다.

“벌써 놀라면 쓰나.”

이번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최고의 서프라이즈 쇼는 지금부터야 비로소 시작인 것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