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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79화 (579/1,000)
  • 579화 아시아 정복 (4)

    와-아아아아!

    아직도 열기가 잦아들지 않은 관중석.

    커다란 해파리와 게, 물범 위에 탄 한국인 응원단이 연신 빵빠레를 불며 축하의 퍼레이드를 벌인다.

    쌍둥이 섬에서 벌어진 한국 대 러시아전의 첫 선취점(First Blood)은 한국의 드레이크가 따냈다.

    1라운드부터 두 원딜 에이스 사이에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볼거리가 매우 많은 경기였다.

    더군다나 관객들을 열광하게 만든 한 가지가 또 있었다.

    -<‘오염된 긍지’의 단검> / 한손무기 / A+

    고귀하던 긍지가 더럽혀졌을 때의 좌절감은 당신을 무저갱보다 깊은 마음 속 심연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물리 공격력 +1

    -특성 ‘데드 엔드(Dead End)’ 사용 가능 (특수)

    ※아이템의 소유권자가 사망 시 그 사망에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한 이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됩니다. 그 외의 방법으로는 아이템 소유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땡그랑!

    궁귀 안혁수가 쓰던 히든 피스가 땅에 떨어졌다.

    그 단검은 이내 서서히 검은 연기로 변하더니 드레이크에게로 향한다.

    “…어엇?”

    드레이크는 조금 당황했다.

    갑자기 자신의 인벤토리에 새로운 아이템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천공섬에서 얻었던 단검, 즉사 특성이 붙어있는 ‘마헬살랄하스바스(Mahershalalhashbaz)’에 이어 두 번째 단검을 얻는 순간이었다.

    캐스터들이 다시 한번 환호했다.

    [아아! 드레이크 선수! 이렇게 또 생각지도 못하게 희귀 아이템을 얻습니다!]

    [저럴 경우 대회 규칙에 의해 다시 안혁수 선수에게 반납해야 하지 않나요?]

    [그것은 아이템의 고유 특성 때문에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드레이크 선수가 고의적으로 안혁수 선수에게 죽어야 할 테니까요!]

    [이것은 차후 두 선수 간에 개인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1라운드가 끝났다.

    드레이크는 HP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로 복귀했다.

    막판에 바람을 잘 역이용해 이기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 데스나이트화한 안혁수에게 상당히 집요하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태그.”

    드레이크의 뒤를 이어 2라운드를 뛸 선수가 출전했다.

    엄재영 감독의 판단 하에 한국 측에서는 투신 마태강이 필드로 나서게 되었다.

    그 반대편, 러시아 측에서 나온 선수는 ‘표트르 알렉셰이비치 크로폿킨’으로 독 메타로 유명한 마법사였다.

    풍덩!

    마태강은 나오자마자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러시아 선수가 있는 섬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캐스터들이 웅성거린다.

    [아아, 마태강 선수! 상당히 직접적으로 러시아 측과 접전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러다가 태그로 얼음 마법사가 나와서 바다를 얼려 버리면 어떻게 하죠!?]

    [흐음~ 이번 전장이 열대지방의 따듯한 바다이기 때문에 광역 빙결마법을 쓰기는 조금 힘들 겁니다.]

    [아마 마태강 선수는 그걸 믿고 헤엄을 치는 것 같네요!]

    중계가 이어지는 동안 마태강은 놀라운 속도로 바다를 가로질렀다.

    그때.

    …풍덩!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독 마법사인 표트르 역시 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지이이잉-

    어느덧 필드를 비추던 카메라들이 해수면 아래로 초점을 돌린다.

    …꾸르르륵!

    공기방울들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바다.

    산호초들이 아름답게 만발한 얕은 연안에서 두 선수는 이내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표트르는 싱긋 웃으며 마태강을 바라본다.

    “기세가 좋은데? 여기까지 헤엄쳐 올 생각을 하다니 말야.”

    “…….”

    하지만 마태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퍼펑!

    바다 속 암초를 박차고 돌진한 그는 곧장 눈앞의 적을 향해 주먹을 꽂아 넣는다.

    콰쾅! …쿠르르륵!

    맹렬한 수류가 몰아치며 주변의 암초들이 우르르 붕괴해 내렸다.

    커다란 쓰나미가 일어 러시아 측 해변의 모래톱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굉장한 사출력을 보였음에도 마태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중독! 어느 틈에!?’

    천천히 깎여나가고 있는 HP, 마태강은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단순히 도트 데미지만 거는 독이 아니었는지 손가락 끝도 저릿저릿했다.

    시야도 살짝 침침한 것이 이런저런 디버프에 연달아 중첩된 모양.

    그러자 표트르가 피식 웃었다.

    “나를 상대로 물에 들어오다니. 제정신이야?”

    그제야 마태강은 표트르의 검지손가락 끝에서 무언가가 시커먼 것이 물로 스멀스멀 번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독(毒).

    그렇다. 독은 본디 혼자 쓰이지 않는다.

    항상 음식과 같이 쓰이는 것이 바로 독,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게 투여되는 곳이 물이나 기타 식음료다.

    마태강은 입을 닫았지만 이미 몸 전신에 닿아 있는 따듯한 바닷물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표트르는 마태강이 바다에 뛰어들 때부터 천천히 이 근방 연안에 독을 풀었던 것이다.

    “내 몸은 마치 물에 탄 티백과도 같지. 자 보라구!”

    말을 마친 표트르는 두 팔을 쫙 벌렸다.

    그러자 그의 다섯 손가락에서 지독한 독액이 해류를 타고 번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각각 효과도 다를 것이리라.

    “…….”

    마태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전신을 통해 스며드는 독만은 어찌할 수가 없다.

    둥… 둥… 둥…

    해수면 위로 물고기들이 죽어 흰 배를 까뒤집고 떠오른다.

    마치 홍차 티백처럼 물에 우러나는 표트르의 독, 심지어 열대 기후의 따듯한 연안이라서 그런가 독이 퍼지는 속도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마태강은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독한 러시아 보드카를 한 병 원샷한 듯한 느낌.

    “물에 들어온 시점에서 너는 끝났어. 자, 홍차나 한 잔 하라고.”

    표트르는 윙크를 날리며 손에 찻잔 하나를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심지어 다른 쪽 손에는 보드카 병이 들려 있었다)

    그러자 찻잔 속에 시커먼 독액이 차올라 또다시 바다로 번진다.

    그때.

    “……티 타임도 나쁘지 않다만.”

    마태강은 고개를 들어 표트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짤막하게 한 마디 했다.

    “나는 차보다는 그냥 물이 좋아서 말이야.”

    동시에.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마태강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기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두 건틀릿이 극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며 주변의 바닷물이 온통 끓어오른다.

    “…헉!?”

    표트르는 일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침착을 되찾고 마태강을 비웃는다.

    “하하! 물이 뜨거워지면 독은 더 빨리 돌지!”

    말 그대로, 마태강의 몸을 중독시킨 독은 따듯한 공간에서 점점 활성화된다.

    HP가 깎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마태강이 온도를 더 올리자 주변의 기포들은 더욱 심해졌다.

    주변의 바닷물이 모조리 끓어오르며 이내 통째로 기화되기 시작했다.

    “으악, 뜨거워!?”

    표트르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보다 물이 끓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콰쾅! 퍼퍼펑!

    이제는 아예 수중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마태강의 몸에서 시커먼 기포들이 뿜어져 나와 수증기처럼 뭉게뭉게 퍼지기 시작했다.

    체온이 너무 올라가는 바람에 체내의 독까지 기화되어 버린 것이다.

    “흐헉!?”

    표트르는 어찌나 놀랐던지 손에 들고 있던 보드카 병과 홍차 잔까지 놓쳐 버렸다.

    “…제기랄!”

    표트르는 재빨리 연출용 소품들을 버리고 독 마법이 새겨진 마도서를 빼들었다.

    보드카 병과 찻잔을 우아하게 들고, 손조차 까딱하지 않은 채 적을 리타이어 시키겠다는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쿠르륵!

    이내 표트르의 양손에 진득한 검은 독액의 회오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보다 마태강이 한 발 빨랐다.

    “암살과 독은 들킨 이상 반을 못 먹고 들어가지.”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과 반을 못 먹고 들어가는 것의 차이는 바다와 땅 만큼이나 크다.

    마태강은 양손 건틀릿을 전면으로 힘차게 뿜어냈다.

    콰-콰콰콰콰콰쾅!

    물도 씹어 버리는 홍염의 파동권이 바다 밑에 수증기의 길을 만들어 폭사되었다.

    그 미쳐 버린 사출력과 분사력, 파괴력은 주변의 바닷물을 싸그리 기화시켜 날려버리며 수면에 거대한 흉터 자국을 패 놓는다.

    순식간에 생성되어 굳어 가는 소금의 결정들!

    그리고 당연히 그 열(熱) 폭풍에 적중당한 표트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도망치려 했지만 물속이라 운신이 부자연스러웠다.

    자신이 소환한 모든 독이 죄다 불에 타 버리는 것을 보며, 표트르는 바다에서 수면 위 해상 수십 미터 위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한 줌 잿가루로 변해 해풍에 흩날려 사라졌다.

    러시아 최상위권 랭커의 최후치고는 지나치게 갑작스럽고 허무한 것이었다.

    슈우우우우욱-

    주변 바다가 통째로 기화하면서 자욱한 해무가 피어오른다.

    일순간 바닷물 한복판에 깊게 패인 구덩이 안에는 허연 소금밭만 펼쳐져 있었다.

    …철썩!

    다시금 바닷물이 차오른다.

    하지만 그 직전에 마태강은 그 자리에서 소금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육지를 밟았다.

    …쿵!

    바로 러시아의 영역이었다.

    관중석의 팬들과 캐스터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우-오오오! 방금 보셨습니까!? 마태강 선수가 표트르 선수를 일격에 보내 버렸습니다!]

    [세상에, 주변 바닷물을 통째로 끓여 버릴 생각을 하다니! 여윽시 투신다워요! 저 판단력과 실행력은 이미 탈 아시아 클라스입니다!]

    [독은 불로 태워 버리는 것이 정석 아닙니까! 하지만 바닷물에 풀어진 독까지 태워 버릴 줄은 진짜 몰랐다구요! 저 카리스마 어떡합니까 진짜!]

    [심지어 지금 마태강 선수의 저 늠름한 모습을 보세요! 러시아 땅에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본진까지 침략을 허락한 러시아의 반응이 궁금해지는……!?]

    그때.

    한창 떠들썩한 환호성이 터져 나오던 한국 측 관중석이 일순간 정적에 빠졌다.

    기대감에 쑥덕거리던 캐스터들 역시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러시아 본토에 상륙해 선전포고를 한 마태강마저도 표정을 굳힌다.

    “…….”

    심지어 나 역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냐하면 리타이어 된 표트르의 다음으로 3라운드를 뛸 러시아 선수가 필드로 나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침묵으로 몰아넣는 존재감.

    다음으로 나온 이는 거의 4미터에 육박하는 덩치를 가진 오크 유저였다.

    근엄한 표정, 하얀 턱수염, 그리고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러시아 공식 통합랭킹 1위.

    아시아 공식 통합랭킹 1위.

    전 세계 공식 통합랭킹 4위.

    그리고 내가 회귀하기 전 아시아 챔피언스 리틀/빅리그의 우승팀을 이끌었던 주장이자 아시아 올 리그 MVP에 빛나는, 즉 자타공인 아시아 최강의 플레이어였던 남자.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공식적인 현재 아시아 넘버원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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