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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78화 (578/1,000)
  • 578화 아시아 정복 (3)

    나는 안혁수의 손에 들린 단검에 주목했다.

    -<‘오염된 긍지’의 단검> / 한손무기 / A+

    고귀하던 긍지가 더럽혀졌을 때의 좌절감은 당신을 무저갱보다 깊은 마음 속 심연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물리 공격력 +1

    -특성 ‘데드 엔드(Dead End)’ 사용 가능 (특수)

    ‘I’자 모양의 손잡이에 송곳 모양의 뾰족한 칼날이 튀어나와 있는 배즐러드(basilard)형 단검.

    시커먼 기운을 불길하게 뿜어내는 것이 딱 보기에도 요물(妖物)이다.

    어디서 드랍되는 아이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능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저 단검은 남을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칼이라는 것을.

    …우드득! …뚜둑!

    이내, 안혁수가 몸에 변이를 일으켰다.

    단검이 허벅지를 찌르자마자 허공에 부유하던 검은 마나가 칠흑의 갑옷이 되어 전신을 감싼다.

    그 모습은 마치…….

    “데스나이트.”

    내가 조용히 읊조리는 순간, 세계가 안혁수의 변화에 모두 깜짝 놀라 했다.

    [아아, 빅토르 안 선수! 이게 무슨 일인가요!?]

    [단검에 찔리자 마치 언데드 같은 모습으로 변신했습니다!]

    [종족이 바뀌었으니 이것도 ‘진화’라고 봐야 하나요!?]

    [저 모습은 흡사 데스나이트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활을 쏘는 데스나이트가 다 있나요!?]

    캐스터들이 경악할 만하다.

    으레 데스나이트는 중장갑으로 무장한 채 거대한 칼, 혹은 창을 휘두르는 근접 딜러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안혁수의 메타는 확실히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활을 쏘는 데스나이트라니!

    거기에 일견 보기에는 무거워 보이는 저 중장갑은 기실 활동성을 크게 저해하지 않는 신체 부위에만 덮여 있어서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가볍고 단단할 것이다.

    안혁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임드 데스나이트 ‘빌헬름 텔’을 쓰러트리고 얻은 히든 피스지. 뭐, 말해 줘 봤자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차피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것이라는 확신에 내뱉은 말.

    그것도 속삭이듯이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

    ……하지만 회귀 전, 랭커들의 개인적인 사담까지 엿듣기 위해 독순술까지 마스터한 초 고인물인 나만은 안혁수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하, 그 몬스터가 떨구는 아이템이었군?’

    일명 ‘언데드 도핑’이라 불리는 히든 피스, 저 단검에 찔린 대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언데드로 변화한다.

    레벨에 따라 스켈레톤 모드나 좀비 모드, 구울 모드 등이 활성화되며 고렙 플레이어의 경우에는 데스나이트 모드도 지원된다.

    물론 상대방을 언데드로 만들지, 자신을 언데드로 만들지는 전적으로 단검 소지자의 선택에 따라 달렸다.

    ‘……좋은 정보를 얻었다. 빌헬름 텔이라면 칠귀타의 하위호환 몬스터이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 리젠되기만을 기다려야겠군.’

    나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엄재영 감독을 비롯한 우리 구단 식구들은 모두 초조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혁수는 데스나이트가 된 뒤로 더욱 더 위력적인 화살을 쏘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쉬익- 펑! 우지지직!

    안혁수의 화살에 맞은 야자수 나무가 뚝 꺾여 버렸다.

    강궁이 부러지기 직전까지 휘었다가 탁- 퉁기며 터져 나오는 강력한 화력!

    심지어 안혁수는 거기에 자신의 언데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온 사기(死氣)까지 실어 방출하고 있다.

    쾅! 콰쾅! 콰콰콰쾅!

    볼텍스(Vortex). 시커먼 와류를 몰고 온 화살은 꽂히는 즉시 그 반경 몇 미터를 온통 폭파시켜 놓는다.

    이제 안혁수가 쏘아 보내는 화살은 거의 포격에 가까웠다.

    휘이이이잉-

    강력한 해풍을 등에 업은 안혁수는 계속해서 드레이크를 향해 사격한다.

    반면.

    핑- 피잉- 핑-

    드레이크의 화살은 역풍을 맞아 계속 이상한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제는 아예 안혁수에게 닿지조차 않고 있었다.

    “예전의 굴욕을 되갚아 주마.”

    안혁수는 시커멓게 물든 눈을 부릅떴다.

    드레이크에게 속수무책으로 역공당해 죽었던 지난날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캐스터들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아아, 빅토르 안 선수의 사격이 점점 더 빠르고 정확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경기가 어려워지는데요, 드레이크 선수!]

    [안혁수 선수가 데스나이트가 되고 나서 스탯이 확 늘은 것 같아요! 그 증거로 아까 인간일 때의 화살은 코코넛을 부수거나 나무에 꽂히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아예 코코넛은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나무도 부러트리고 있지 않습니까!]

    [반면 드레이크 선수의 화살은 역으로 부는 해풍 때문에 데미지가 반감됩니다. 거기에 아예 궤도도 전부 다 이상한 곳으로 틀어지고 있어요!]

    [아아! 드레이크 선수, 또 미스가 뜹니다! 이번 화살은 아예 하늘로 솟구쳐 버렸어요! 러시아 선수들이 있는 섬 주변에 부는 바람이 천연 방어막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정말 애석합니다!]

    과연 경기는 캐스터들의 중계 내용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불어 닥치는 역풍과 한 차원 랭크업한 안혁수의 화살 앞에 철저한 사냥감이 되어 이리저리 내뺄 뿐이다.

    초장거리 저격전의 승기는 확실하게 안혁수가 잡아가고 있었다.

    …푹!

    갑자기 안혁수의 등에 날아와 박힌 의문의 화살 한 자루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응?”

    안혁수는 등이 따끔한 것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등팍 한가운데 정통으로 꽂힌 화살 한 가닥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못 본 줄 알았지만 잘 본 것이었다.

    왜냐하면 HP게이지가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이건?”

    안혁수는 놀라기 이전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갑옷의 틈 사이를 절묘하게 피해 박힌 화살촉. 이것이 대체 어디서 날아왔단 말인가?

    그가 뭔가 싶어 고개를 뒤로 슬쩍 돌리는 순간!

    -피피피피핑!

    엄청난 수의 화살들이 ‘뒤에서’ 날아들기 시작했다.

    “어억!?”

    안혁수는 재빨리 앞으로 굴렀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 몇 대가 안혁수의 뒷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날아간다.

    “대체 뭐냐고 이게!? 누가 어디서 쏘는……!?”

    안혁수는 고함쳤다.

    그때, 그의 눈에 화살 끝에 달린 깃이 보였다.

    그것은 분명 아까 전에 드레이크가 허공에 대고 날리던 화살이었다.

    안혁수는 혹여나 자기가 잘못 본 것인가 싶어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끔뻑거린 뒤 다시 보았다.

    자기 등에 날아와 꽃인 화살을 살펴보니 분명 아까 드레이크가 날려 보냈던 화살이 맞다.

    뭘까? 지구는 둥그니까 그새 한 바퀴를 돌아온 걸까?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된다.

    애초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월드맵은 지구평면설을 기조로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피피피핑!

    또다시 후방에서 화살비가 쏟아진다. 여전히 안혁수의 등을 노리고!

    휘이이이이잉-!

    매서운 해풍이 불어 화살들을 안혁수에게로 인계하고 있었다.

    그제야 안혁수는 이 기현상의 원인을 눈치챘다.

    “이 자식! 설마 바람을 노리고……!?”

    그렇다.

    드레이크가 아까부터 계속 헛발질을 한 화살들은 해풍을 타고 섬을 한 바퀴 빙 돈 뒤 다시 순환 대류를 타고 섬의 중심부, 바람이 시작되는 곳을 향해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노출된 안혁수의 등팍을 향해 사정없이 꽂힌다.

    …퍽! …퍼퍽!

    또 한 대의 화살이 안혁수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곧바로 뒤이어 날아온 다른 하나는 그의 어깻죽지를 반쯤 관통했다.

    “크윽!?”

    안혁수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자 드레이크가 야자수 뒤에 숨겼던 몸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바람을 계산하는 것은 궁수의 기본이지.”

    바람에 두 번 튕긴 화살은 원래 쏘아졌을 때보다 더욱 더 강력해져서 과녁을 노린다.

    드레이크가 지금껏 헛발을 날렸던 것은 이 발사각과 바람 궤도의 각을 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필드를 바라보았다.

    “맞아. 무조건 불리한 맵이라는 것은 없지. 특정 돌파구만 찾아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승기는 뒤집을 수 있어. 장하다 드레이크, 완연한 고인물이 됐구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금껏 드레이크가 쏘아 보냈던 화살들이 역풍을 타고 안혁수의 뒤를 노린다.

    “제길!”

    안혁수는 화살의 샌드위치에 끼인 패티가 된 기분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뒤에서는 눈 먼 화살들이, 앞에서는 눈 뜬 화살들이 날아오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때쯤 해서, 드레이크는 기상천외한 고급 기술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 봐라, 물수제비 샷! 이것은 난반사 샷! 그리고 이번 것은 물살 가르기 샷!”

    물 위를 참방참방 뛰어서 건너오는 화살, 야자수나 바위에 맞아 튕겨나가서 유탄 데미지를 입히는 화살, 물살 위를 갈라 긴 공간을 만드는 선발 화살과 그 뒤를 바로 따라와 데미지를 입히는 후발 화살…….

    퍽! 퍼퍽!

    앞에서 오는 화살들을 아무리 잘 피하고 막아 내도 뒤에서 오는 화살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심지어 역풍의 힘마저 실려 있는 것들이고 워낙에 많이 쏴 댔어서 더더욱 그렇다.

    드레이크가 미스 샷을 수없이 날릴 때마다 비웃었던 것이 이제는 역으로 안혁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큭! 크으윽!”

    안혁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살을 난사하며 버텼지만.

    “돌아와라, 화살들아.”

    드레이크가 자질구레 화살통마저 꺼내들자 결국 승기는 완벽하게 역으로 기울어졌다.

    츠츠츠츠츠…

    안혁수의 몸뚱이에 박힌 드레이크의 화살 세 대가 화살통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안혁수의 이동을 방해했다.

    안혁수가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피해 옆으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 다리 쪽에 박힌 화살이 제멋대로 앞으로 향해 움직이는 통에 완벽한 회피가 불가능해졌다.

    퍼-억!

    결국 뒤에서 날아온 눈먼 화살 한 대가 안혁수의 뒤통수에 박혀 앞쪽의 투구를 뚫고 나오고 말았다.

    헤드샷. 그것도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상대라는 눈 먼 화살에 의한.

    이번에는 유언을 남길 시간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쿵!

    안혁수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 순간, 암초나 바다생물형 펫 위에서 관전하던 모든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우-와아아아아아!

    별다른 중계 멘트는 따로 들려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용진 캐스터를 비롯한 모든 캐스터들도 관중들과 다 같이, 그저 한 마음으로 발을 구르며 환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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