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77화 (577/1,000)
  • 577화 아시아 정복 (2)

    아시아 챔피언스 빅리그.

    왕좌의 주인을 가리는 최후의 승부가 오늘 시작되었다.

    한국 대 러시아!

    용산에 있는 공식 중계장에만 43만 명의 인파가 몰렸고 실시간 중계나 게임 월드 안에서의 직관, 스트리머들의 방송 등으로 구경하는 인파까지 합산하면 억 단위가 가볍게 넘어간다.

    그래서일까? 늘 흥분에 가득 차 중계를 하던 열혈 캐스터들은 오늘따라 조용하다.

    아니, 조용하다기보다는 긴장과 떨림, 초조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네. 한국이 저번에 대만을 꺾었을 때까지는 울면서 방방 뛰고 좋아했는데, 오히려 여기까지 오니 어딘가 비장하면서도 싸늘한 느낌이 듭니다.]

    [맞습니다. 어째 제가 너무 좋아하면 부정 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요. 저는 어제부터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떨립니다. 한국 게임사에 전무후무한 순간이잖아요 솔직히? 이 자리에 중계인으로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구한 영광입니다. 그저 한국 대표팀에게 경외감만이 들 뿐입니다. 그저 오늘 경기는 꼭!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보셔야 한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아시아에서 현재 내전이나 전쟁 중인 모든 국가들도 오늘은 휴전이라고 하더군요! 정부군, 반군들도 모두 오늘 국지전은 취소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대 러시아 전을 봐야 하거든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경기 시작 전 상황을 중계하는 전용진 캐스터 외 3명이었다.

    이윽고.

    엄청난 수의 한국 팬들이 성원하는 아래, 드디어 대망의 진검승부가 시작되었다.

    일척도건곤(一擲賭乾坤).

    아시아의 왕좌를 놓고 벌이는 게임.

    그 최후의 대격돌이 드디어 막을 올린 것이다!

    *       *       *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협회 측에서 마련해준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은 뒤 오늘의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쌍둥이 섬-

    마치 해수면 위에 커다란 엉덩이 하나가 볼록 솟아 있는 듯한 외형의 섬이다.

    문제는 섬과 섬 사이에 커다란 바다가 흐르고 있다는 것.

    “언제 봐도 특이한 경기장이야.”

    나는 회귀 전의 기억과 완벽히 같은 맵 세팅에 약간 감탄했다.

    이런 것을 보면 참 내 기억이 정확하다 싶다.

    야자수 울창한 두 개의 섬은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다.

    그 사이로는 간격이 3km 정도 되는 바다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아, 오늘의 맵은 쌍둥이 섬이군요.]

    [특이하게도 경기장 중앙에 광대한 바다가 있습니다! 바다 지형인지라 해풍도 상당히 심하군요!]

    [그렇다면 맵의 특성 상 초반에 낼 수 있는 선수폭이 상당히 제한이 있겠어요!]

    [맞습니다. 아마 먼 바다를 건너 공격을 날릴 수 있는 원거리 딜러, 아니면 바다를 얼릴 수 있는 한빙계열 마법사가 초반에 나오지 싶은데요!]

    어떤 쪽이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섬과 섬 사이를 넘어 공격을 날릴 수 있는 저격수, 혹은 바다를 얼려 발판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주변 필드를 자기의 속성으로 장악할 수 있는 얼음 마법사.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엄재영 감독이 준비한 전략에 따라 카드를 빼든다.

    그의 첫 번째 패는 바로 드레이크였다.

    …탁!

    드레이크가 세이프 존을 넘어 필드로 걸어 나왔다.

    ‘과연 상대는?’

    나는 턱을 짚고 조금 고민했다.

    아마 드레이크를 상대로 한 1라운드에는 얼음 타입 마법사인 ‘올가 알렉셰예브나 크로폿키나’, 아니면 원거리 딜러인 ‘빅토르 안’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내 내 예상은 현실로 드러났다.

    나와 캐스터들이 예측한 대로, 드레이크가 서 있는 맞은편 섬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검은 장포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궁수였다.

    “오랜만이군.”

    빅토르 안. ‘궁귀(弓鬼)’ 안혁수.

    그가 드레이크를 향해 건너편 섬에서 손을 들어올린다.

    하지만 쌍둥이 섬은 서로 3킬로미터의 간격을 두고 있기에 그들은 상대를 작은 점 정도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캐스터들은 각각 한국과 러시아를 대표해 나온 선수들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한국도 러시아도 궁수를 내보냈습니다! 이거이거, 천하제일 궁수대전이 되겠는데요?]

    [해외에서 한국으로 온 선수와 한국에서 해외로 간 선수가 만났습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요!]

    [3,000m를 사이에 둔 명사수들의 원딜 대전입니다! 일반적인 올림픽 양궁의 최대거리가 90m이하임을 고려한다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리에요! 아무리 에임 시스템이 보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나저나, 이거 게임이 되긴 할까요? 아무리 둘 다 원딜이라고 해도 사람의 한계라는 게 있는데… 3킬로미터는 아무래도 좀… 서로 공격이 닿기는커녕 보이기나 할지……]

    캐스터들이 원딜 대결이 성사될 수나 있을지 우려를 표하고 있는 동시에.

    따앙-

    화살 한 대가 날아 금속음을 냈다.

    안혁수가 쏘아 보낸 화살이 건너편 섬에 있는 드레이크의 어깨 견갑을 때린 것이다.

    “…쫄?”

    안혁수가 드레이크를 보며 싱긋 웃는 순간.

    따앙-

    화살 한 대가 안혁수의 투구 끝을 빗겨 때렸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헤드샷.

    물론 드레이크의 반격이다.

    “그럴 리가.”

    씩 웃어 보이는 드레이크.

    안혁수와 드레이크는 시작부터 일발일전(一發一戰)을 주고받는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후폭풍처럼 한 발 뒤늦게 터져 나왔다.

    3천 미터를 두고 벌어지는 고인물 궁수대전!

    시작부터가 살벌한 이 싸움은 1라운드부터 수많은 관중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       *       *

    한편.

    드레이크와 안혁수는 서로를 향해 꽤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안혁수는 드레이크를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레드문의 차규엽과 협회의 김협회가 실각한 것은 기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다. 이번 대회에서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겠어.”

    더군다나 안혁수는 예전에 한번 드레이크에게 패배의 쓴맛을 맛본 적이 있었다.

    이번 경기는 리벤치 매치임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주목하고 있는 공식 리그!

    절대로 질 수 없는 것이다.

    “후후, 어디 실력이 좀 늘었나 볼까?”

    드레이크는 쇠뇌를 꺼내들며 정면을 향해 에임을 맞춘다.

    천상계 궁수 둘의 샷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원딜전.

    서로 퍽퍽 꽂고 꽂히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아! 드레이크! 빠릅니다! 두 대의 쇠뇌가 쉴 새 없이 불을 뿜어내고 있어요! 오오! 안혁수… 아니 빅토르 안 선수의 대응사격 속도 역시 장난이 아닙니다!]

    [사실 활이 싱글게임에서는 손맛도 좋고 원샷원킬하기도 좋고 무소음이라 활용도도 좋은데 멀티 게임에서는 들고만 있어도 욕먹는 무기거든요! 하지만 잘 하는 사람이 들면 얘기가 다르죠!]

    [누가 궁수를 비주류 클래스라고 했습니까! 저 고급기술들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전율만 일 뿐입니다!]

    [이야, 오늘 눈이 호강하는데요? 저도 개인적으로 궁수로 플레이를 해서 잘 알죠. 저, 저 끌어치기 실력 좀 보세요! 브레이킹 샷에 예샷, 빽샷, 덕샷, 대기샷, 순줌, 패줌… 온갖 초고난이도 기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난무하고 있어요!]

    캐스터들의 중계 그대로, 드레이크와 안혁수의 대결은 시작부터 불을 튀긴다.

    …뻑!

    드레이크가 고개를 숙이자 화살 한 대가 날아들어 야자수에 달린 코코넛을 박살냈다.

    …푹!

    안혁수가 재빨리 옆으로 점프하자마자 그가 서 있던 모래톱에 화살이 박혔다.

    일전일퇴의 공방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HP가 빠지고 있는 쪽은 드레이크였다.

    스팟!

    안혁수가 쏘아보낸 화살이 드레이크의 옆구리를 스쳤다.

    화살이 점점 더 가깝고 정확하게 드레이크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둘의 실력 차이 때문이 아니다.

    [아아! 미묘하게 안혁수 선수의 화살이 더 멀리, 세게 날아가고 있습니다!]

    [해풍이에요! 해풍이 러시아에서 한국 쪽으로 불고 있습니다!]

    [이 해풍은 항상 이 방향으로 고정되어서 부는 바람이기에 방향이 변하지도 않아요!]

    [이런! 한국에게는 아주 불리한 상황입니다! 러시아가 운 좋게도 바람을 등지는 바람에 원딜 대전에서 유리하게 되었어요!]

    러시아의 안혁수는 바람을 등지고 있었고 한국의 드레이크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다.

    때문에 안혁수의 화살은 바람의 힘이 실려 더욱 강해지고 드레이크의 화살은 바람의 힘 때문에 힘이 반감되는 것이다.

    이것은 스쳤을 때 들어가는 데미지와 화살의 사거리로 점점 뚜렷하게 가시화되고 있었다.

    핑- 피핑- 핑-

    심지어 드레이크가 날려보낸 화살은 어느 순간부터 바람을 타고 아예 이상한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해풍이 점점 러시아 측의 섬을 둥글게 감싸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바람의 보호막을 두른 것처럼!

    캐스터들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형 특성을 주도면밀하게 파악하지 못한 한국 측의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아, 드레이크 선수. 운이 나빴습니다! 실력이 모자란 게 아니에요! 운이 모자랐던 겁니다!]

    [이대로 가면 궁수 대전 자체가 불공평하게 이루어지겠는데요? 바람이 아예 노골적으로 러시아 편을 들어주고 있는 마당에 드레이크 선수를 계속 내보낼 필요가 있나요?]

    [하지만 한국 측에는 바다를 얼릴 마법사가 없습니다! 러시아에만 유일하게 올가 선수가 있지요! 즉 드레이크 선수 말고는 러시아 선수들을 이쪽으로 넘어오게 할 만한 선수가 없다 이겁니다! 한국은 지금 시작부터 러시아에게 끌려 다니고 있는 거예요!]

    관중들 역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드레이크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흐름을 느낀 안혁수가 이를 악물었다.

    “웃기는 소리, 내가 운 때문에 유리하다고?”

    그는 저 멀리 있는 드레이크를 향해 눈을 빛냈다.

    “운 따위는 필요 없어. 나는 오늘 너를 실력으로 누르러 왔다.”

    동시에, 안혁수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오염된 긍지’의 단검> / 한손무기 / A+

    그것은 시커먼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한 단검이었다.

    “운이 나빠서 졌다는 생각을 못 하게, 확실하게 밟아 주지.”

    안혁수는 손에 검은 단검을 쥔 채 정면을 노려보았다.

    캐스터들은 의아한 기색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아~ 빅토르 안 선수! 갑자기 활 말고 단도를 쥐었습니다!]

    [경기 전에 미리 사전 등록한 아이템이니 룰 위반은 아닙니다만… 원딜 대전에서 갑자기 왜 단도를 쥐는 것이죠?]

    [설마 이 거리에서 단도를 던질 생각은 아니겠죠?]

    [3천 미터나 떨어진 적을 두고 근접무기를 꺼내는 의도가 뭘까요!? 과연 어떤 공격패턴을 보여 줄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캐스터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안혁수는 시커먼 단검을 들어 내리찍었지만 그것이 드레이크를 향한 공격은 아니었다.

    …푹!

    검은 단검이 향한 곳은 바로 안혁수 본인의 몸이었다!

    ???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안혁수의 자학에 경악한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런 안혁수의 기행을 의미심장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회귀자. 앞으로 벌어질 일을 이미 알고 있는 존재.

    바로 나다.

    ‘……저걸 드디어 쓰는군.’

    예전 안혁수와 드레이크가 붙었을 때, 안혁수는 드레이크에게 죽기 직전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다가 말고 죽음을 택했던 적이 있다.

    그때 그가 꺼내려고 했던 히든 피스가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윽고.

    …우득! …우드득!

    단검에 찔린 부위가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안혁수의 몸 전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이 오크나 리자드맨으로 변하는 것과는 또 다른 변화였다.

    ‘흑화(黑化)’

    전혀 새로운 종류의 진화가 전 세계인 앞에 선보여지는 순간이었다.

    0